자연(Nature), 인간(Human), 기계(Machine)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이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목적론’적으로 해석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이유는 대지(大地)를 촉촉이 적시기 위함이었다. 비가 내려야만 식물들이 자랄 수 있었고 호수의 물고기도 물이 충분히 공급될 수 있어서 살 수 있었다. 푸른 초원에서 목을 축이는 야생 동물들에게도 비는 생명수와 같다. 바다의 풍랑과 파도 또한 조류의 흐름을 일으켜 바닷물이 섞이는 작용을 한다. 이처럼 자연의 모든 활동은 일련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두고 목적론적인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보면 당시 과학이 발달되지 않고 단지 눈으로 보이는 것만 믿는 세계관에서는 비가 내려 땅을 적시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태양이 돌고 지구가 가만히 있는 것조차도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지극히 옳게 보였을 것이다.
중세 이후에도 목적론적 세계관은 꽃을 피우게 된다. 바로 신중심의 세계관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중세는 교황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듯 높은 시기이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는 오직 신중심의 가치관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현상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도 절대적인 신의 뜻이 중요했던 시대였다. 자연 현상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형이상학의 황금기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초월적인 존재를 중심으로 세계관이 펼쳐지다 보니 이 시대는 형이상학(metaphysics)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형이상학은 보이지 않는 근원적 실재를 다루는 학문이다. 형이상학의 출발은 플라톤의 이데아(Idea)에서 발견된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는 일시적이며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동굴의 비유에서 이데아를 설명하고 있다. 동굴에 죄수 한 명이 앞만 볼 수 있게 묶여 있었다. 그는 뒤를 돌아볼 수 없이 앞만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 사람의 모습이나 어떤 존재들의 모습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보는 모습은 불빛에 비춰진 그림자의 모습이었다. 뒤를 돌아볼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의 그림자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림자가 실재(Reality)인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죄수가 밧줄에서 풀려나서 자유로워졌다. 그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지금까지 자신이 본 것은 진짜 모습(실재)의 그림자였으며, 그림자의 본래(참) 모습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는 바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림자가 아니라 원래 그림자의 실재 형상이었다.
형이상학은 모든 가시적인 세계, 즉 눈으로 관찰되어지는 세계 이면에 그 원래의 모습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한다. 형이상학의 꽃은 바로 신의 존재이다. 모든 만물의 근원은 바로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신은 모든 가시적인 세계를 만든 최초의 원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의 존재를 ‘부동의 원동자(the unmoved mover)’ 라고 불렀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대상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 바로 초월자인 신이다. 형이상학은 중세에 꽃을 완전히 피운다. 신 중심의 세계에서 형이상학은 최고의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모든 세계의 질서가 신의 섭리에서 비롯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첫 출발, 즉 근원은 오직 신이었다.
2020년 전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세계보건기구(WHO)는 팬데믹(pandemic)을 선언했다. 아시아와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올림픽도 연기되고, 세계 경제도 마비에 이르렀다. 항공, 선박은 멈추었고 사람들의 이동이 금지되기까지 했다.
코로나의 확산처럼 과거 세계 대유행으로 많은 인명을 앗아간 악명 높은 흑사병은 아픈 역사적 기억을 가지고 있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페스트라 불리는 흑사병의 원인을 신의 노여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금식을 통해 질병을 극복하려 했다. 과학이 발달한 뒤, 의사들은 페스트는 설치류와 같은 쥐에 기생하는 세균에 의해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 사람에게 옮겨져 발생하는 급성 고열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처럼 과학이 발달되기 이전, 고대와 중세 시대는 자연,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중심으로 이해되는 세계관이었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의 세계관은 모든 것을 지배했다. 자연 현상과 인간의 삶 그리고 질병과 삶의 다양한 모습, 그리고 인간 출생의 신비까지 모든 것이 초월적인 존재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과거 인류는 자연 현상에 순응하면서 살아왔다. 자연의 모든 현상은 인간의 삶을 지배했고, 우리는 단지 수동적으로만 자연의 다양한 현상에 따르기만 했다. 일식(solar eclipse)은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서 태양을 가리는 현상이다. 하늘에서 일식이 일어나면 낮에는 잠시 동안 어두워진다. 일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되기 이전, 일식은 하늘의 진노로 여겨졌다. 자연현상은 초월적인 존재와 연결되었다. 자연의 형상도 형이상학적 해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 형이상학의 가치는 말 그대로 절정의 시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근대(Modern) 이후, 전혀 새로운 가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동시에 과학의 발달로 코페르니크스적 전회를 맞이하게 된다. (계속)
김광연 교수(숭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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