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과 발톱은 푸르스름하게 변했고 어쩌면 당신의 무릎이나 뼈나 입술까지도 그럴 겁니다. 피가 몸 안에서 빨리 돌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쇠약함이 입술을 헤벌리게 하고 뺨은 움푹 들어갑니다.'
2019년 독일의 한 작가는 『죽음의 에티켓』(롤란트 슐츠)이라는 책에서 죽음 당일에 육체가 어떻게 사그라져가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해서 많은 독자들이 죽음을 실감하도록 만들었다. 살아 있는 육체가 차가운 시신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림처럼 묘사하면서 '이 싸늘한 죽음이야말로 언젠가 당신에게 일어날 일!'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성경에서도 죽음은 큰 주제다. 특히 전도서에서 저자가 반복해서 말하는 게 삶의 허무함과 죽음이다.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전도서 1장 11절).
신간 『죽음 인문학』 은 죽음에서 시작된 책이다. 저자 황명환 목사는 암에 걸려 투병하면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다. 또 주위에서 사람들이 나이와 상관 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긴장이 그의 삶을 덮쳤다. 이에 3년 동안 죽음에 대한 책을 파고들면서 여러 사상과 종교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비교 연구, 그 결과물로서 이번 책을 출간했다.
의미를 잃어버린 무신론적 죽음 이해
그에 따르면 죽음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신론적, 범신론적, 유신론적 이해가 그것이다.
이중 첫번째 무신론적 이해는 다시 두 가지 - 세속적 이해와 비세속적 이해 - 로 나뉘는데, 전자 '세속적 이해'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인본주의적 이해,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진화론적 이해에서 비롯된 죽음 이해를 가리킨다. 인간은 단지 진화의 산물이므로 인간의 죽음 이후에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죽음 자체에 특별한 의미도 없다고 본다.
다소 '썰렁한 인생'이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이러한 이해에 대해, 황명환 목사는 이러한 죽음 이해에서 인간은 자기 가치를 찾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죽음 앞에서 궁극적 의미를 잃어버린 존재가 된다. 그의 모든 존재가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자 '비세속적 이해'는 무교, 유교, 도교에서의 죽음 이해를 가리킨다. 이 '비세속적 이해'는 저승, 사후 심판을 이야기하고 죽은 자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는 점에서 '세속적 이해'와 다르지만, 절대적인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신론적 이해로 분류된다.
무교, 유교, 도교 순으로 점점 인간의 욕심은 작아지고 자연에게 자기를 내어주고 있다. 무교에서는 신령도 인간의 욕심에 따라 다스리려 한다. 유교는 자연이 부여한 인간의 도리를 다하려 한다. 도교에서는 유교의 그러한 가르침도 너무 인위적이므로 자연 앞에 인간의 의지를 다 내려놓고 완전히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는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신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오히려 삶에 더욱 집착하게 만드는 퇴보를 낳았다. 후손이 드리는 제사에서 구원을 찾거나(유교), 육체적인 불로장생(도교)을 추구하게 된 것.
한마디로, 무신론적 죽음 이해에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절망한다.
모순으로 가득한 범신론적 죽음 이해
그렇다면 '범신론적 이해'가 죽음에 대해 희망적인 이해를 제시할 수 있을까.
범신론적 이해를 대표하는 종교는 불교와 힌두교다. 이들 종교에서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을 신적 존재처럼 여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일시적 생명이 다가 아니라, 영원토록 존재하는 불멸의 존재이다. 또 인간에게는 궁극적인 원리에 도달해야 할 임무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너무나 어려워 한 번의 생애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애의 반복이 요청되며, 이에 '윤회설'이 도출된다.
그러나 업보에 따라 생사를 거듭한다는 윤회설은 "너무나 많은 모순이 있다"고 황명환 목사는 지적한다. "모든 출생이 환생이며 모든 생애가 전생의 상벌(업보)이라면 최초의 생애는 무엇에 대한 상벌인지 설명할 수 없다. 또한 윤회설이 사실이라면 세상은 갈수록 나아져야 할 텐데 도리어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윤회설을 인정한다면 전 세계 인구는 고정불변이라야 한다. 육체에 깃든 한 영혼이 거듭 돌아와서 또 다른 육체를 입는 것이라면, 인구가 늘어날 이유가 전혀 없다. 게다가 어떤 영혼들은 성공적으로 해탈했을 것이므로 세상의 인구는 도리어 점차 줄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인류 역사 이래 최다 인구가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다."
기독교적 죽음 이해, 가장 소망스러운 해결책
마지막으로 황명환 목사는 유신론적 죽음 이해를 지니고 있는 세 개 종교 -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 - 를 비교하면서, 이 중에서도 기독교의 죽음 이해가 "죽음에 대한 가장 소망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바르트(Karl Barth)가 말한 바와 같이, 죽음은 '하나님의 소환장'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그가 만드시고 이 땅에 보내신 인간을 부르셔서(calling) 가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무신론자들의 주장처럼 죽음 이후에 제로 상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범신론적 이해에서처럼 죽음과 삶이 수없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다.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 있다 ...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삶에서 불멸의 삶으로 변화되며, 제한된 현존재에서 현재적인 현존재로 변화된다. 죽음은 인간의 영을 시간적 제한과 공간적 제한에서 자유롭게 한다."
기독교의 죽음 이해는 예수의 죽음 이야기에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예수님은 죽음 당일, 자기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람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3일 후'나 '마지막 날'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늘'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은, 3일 후 부활이나 종말의 마지막 때 등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뜻한다. 이 '오늘'은 "하나님의 영원한 오늘" 즉 영원한 시간 속에서의 새로운 삶의 시간이다.
또 기독교의 죽음 이해는, 죽음 이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관계를 향해 나아가게(going ahead) 될 것이라는 비전을 포함한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장 12절)'고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러한 기독교의 죽음 이해가 왜 "가장 소망스러운 해결책"이라는 것일까. 기독교는 죽음을 죄인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라고도 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인간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율법 아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강력한 영향 하에 있는 존재라고 기독교는 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죽음을 포함하여 모든 하나님의 진노의 체험을 변화시킨다. 교만하고 거역하는 사람은 죽음의 파괴적 체험에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정을 만난다. 그러나 그가 죽음의 체험 아래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이 복음 안에서 제공하시는 긍휼로 피할 때, 그는 '부정' 아래에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긍정'을 받게 된다. "
이러한 기독교적 죽음 이해 속에서, 인간은 더이상 죽음 앞에 절망하는 존재가 아니다. 죽음 이후 완전히 사라진다는 허무함도 없으며(무신론적 이해), 업보를 가지고 다른 생애로 들어간다는 막연함도 없다(범신론적 이해). 그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다만 잠드는 것처럼 조용하고 평화롭게 죽음으로 들어간다."
기독교적 죽음 이해에 소망의 빛을 더하는 또 하나의 성경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다. 시간적으로 볼 때, 부활 사건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인생의 끝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인생의 마지막이, 단지 손톱과 발톱이 푸르스름하게 변해가며 쇠약함에 입술을 헤벌리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예수처럼 부활한다는 것,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황명환 목사는 말한다.
▶ 저자 황명환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신대원을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구약학(Th.M.), 윤리학과 기독교문화(Th.D.)를 공부했으며, 현재 서울 수서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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