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의 불모지와도 다름없던 대한민국, 그것도 완도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에서 한국인 첫 우승하며 한국 골프계의 신화를 일궈낸 '탱크' 최경주(42) 선수를 만났다.
1990년대 말 한국 골프계를 주름잡던 최경주는 ‘지옥의 관문’이라는 퀄리파잉 토너먼트를 두 번이나 거친 끝에, 2000년 단 한 명의 한국 선수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미 PGA투어에 입성했다. 게임에서는 매서운 기세로 그라운드를 장악하고 거침없는 플레이로 상대를 압도해 ‘탱크’라고 불리지만, 실상 그는 매우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였다.
골프 선수 나이 40대이면 대부분 은퇴를 생각하고, 피 말리는 현역 선수로는 뛰지 않는다. 더욱이 PGA 투어에서 8회나 우승했다면 은퇴 후 편안한 삶을 추구할 만도 하다. 그러나 최경주 선수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대회 우승만이 그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비전을 심고자 오늘도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는 최경주 선수의 환한 웃음에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 130야드 날았던 ‘인생의 첫 샷’, 지금도 마음에 불꽃으로
- 어떻게 골프를 시작하게 됐나?
중학교 때 역도를 했는데 쉽지 않았다. 역도 선수는 팔과 다리가 짧아야 하는데, 난 선천적으로 다리는 짧았지만 팔이 길었다. 팔이 길어 역기를 들 때마다 뒤로 넘어졌다. 역도 국가대표가 되겠다고 나름대로 열심을 냈는데 그때는 정말 절망했었다. 완도 수산고등학교 입학식 때, 체육선생님이 전에 역도를 해봤던 사람, 수구를 해보고 싶은 사람을 찾았다. 12명이 역도를 하고 싶어 앞에 나갔는데 그 중 절반은 골프부로 편성됐다. 그렇게 뭔지도 모르고 골프를 시작했다.
완도에 어느 날 철봉이 하나 둘씩 올라가고 그물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꿩 사육장이라고 생각했다. 완도에는 당시 꿩 사육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본 처음 본 골프공은 구슬치기 하기에는 크고, 야구하기에는 작았다. 골프장에 처음 갔을 때, 연습장에 떨어진 5천개 넘는 공을 주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단 한 사람이라도 골프공을 쳐서 이 매트를 넘는 사람은 열외라고 했다. 그 많은 공을 줍기 싫어 멀리 쳐보고 싶었다. 당시 나는 동네에서 야구도 하고 역도를 해서 그런지 몸도 좋고 하체가 통나무 같이 튼튼했다. 역도 선수는 유연성도 좋았다. 처음 골프채를 잡은 내 마음은 매우 편했다. 7번 아이언을 야구 그립처럼 잡고 힘차게 친 공은 높이 올라 130야드를 날았다. 그 때 날아가는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당시 그 느낌을 나는 불꽃이라고 표현한다. 그 불꽃이 내 마음 속에 지금도 남아있다. 어느 누구도 내 연습량을 말릴 수 없다고 하는데, 그 불꽃이 모든 힘의 근원이다. 그 순간 불꽃을 느끼며 이거구나 하고 시작한 것이 골프다.
- 그동안 도움을 준 사람도 많을 텐데…
PGA 우승컵을 안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얼떨결에 골프를 시작한 나의 재능을 알아보고 서울로 이끌어준 분이 계신다. 어느 날 완도 연습장을 찾은 서울 한서고 재단 김재천 이사장께서 내가 프로인 줄 알았다면서 명함을 주고 가셨다. 희망이 뭔지, 꿈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김재천 이사장께 전화를 드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17살 당찬 소년이던 나는 장학금을 받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골프를 배울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소식이지만 내가 서울로 올라간 후에 완도 골프 연습장은 문을 닫았다. 만약 그 때 게으름을 피웠다면 지금의 최경주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주변에 계신 분들이 나를 가만히 두질 않았다. 계속 필드에 데리고 나갔다. 내가 하고 있는 모습이 주위 사람들에게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준 것 같다. 그리고 그 분들이 최경주의 후원자들이 됐다. 도움을 주신 분들을 생각하며 남들보다 더 열심히 연습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했다. 연습하고 나서 그립을 푸는데 그립이 풀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그립을 잡고 공을 너무 치니까 손이 풀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 한 순간도 긴장 풀지 않고, 있는 자리에서 최선 다해
- 골프 인생 가운데 배운 교훈이 있다면?
골프장에서 연습 프로로 일하며 청소를 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손님들의 골프백에 쌓인 먼지를 닦고, 오래 되어 녹이 슨 골프채의 녹을 닦아냈다. 우리가 처음에는 먼지를 우습게 생각하지만 1-2년 되면 그것을 닦기 매우 어렵다. 묵어서 굳기 전에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한다. 우리 인생도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먼지가 쌓이는 것을 보고만 있으면 나중에는 처리하기 어렵게 된다. 또 당시 손님들이 깨끗한 매트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아침 일찍부터 매트를 청소했다. 사람들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감동했다.
골프채를 잡고 티 박스로 올라갈 때는 언제나 긴장된다. 인생은 그런 것 같다. 매 순간 긴장이다. 긴장을 푸는 사람과 긴장 속에 사는 사람은 다르다. 긴장을 순간 풀면 보기와 더블이 쏟아진다.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고 열심과 최선을 다해야 한다.
◇ 아내와 데이트 하려고 갔던 교회, 지금은 '삶의 중심'
"우승 인터뷰 때 영어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어"
- 원래 크리스천 집안에서 성장했나?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머니는 물 떠 놓고 소원을 빌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1년에 12번의 제사를 드릴 정도로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93년도에 부인을 만났다. 데이트 하고 싶으면 교회에 와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교회에 갔다.(웃음)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교회에 갔다. 그 전에는 ‘교회에 뭐 하러 가느냐? 다 쓸데없다’고 말했는데 교회에 나가면 뭔가 나한테 이야기하는 듯하고 편한 마음이 들었다.
90년도 당시 나는 아시아 컵에서 우승하지 못하면서 국내용이란 말도 많이 들었다. 99년 4월에 세례를 받게 됐는데 2주 후에 기가 막히게 일본에서 우승을 했다. 일본에서 2주 후에 또 우승했다. 아시아는 당시 PGA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없었는데, 일본에서의 우승으로 막차로 PGA에 올랐다.
미국에 왔지만 외국 선수들과 실력차가 너무 났다.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특별히 2002년 첫 우승은 잊을 수 없다. 마지막 샷은 가장 싫어하는 4m 거리였는데 너무 긴장돼 평강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 때 하얀 선이 홀 안으로 그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 떨림이 멈췄는데, 친 공이 그대로 들어갔다.
8번 우승을 했는데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와주심이 있었다. 경기 결과가 좋지 않은데도 대회를 리드하고 있었다. 경기를 풀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데도 공이 자꾸 좋아하는 자리로만 가는 것이다. 한번은 17홀에서 공을 쳤는데 긴장한 나머지 공이 갤러리들의 뒤까지 넘어갔다. 갤러리들을 비켜세우고 공을 치는,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6m 넘는 긴 거리를 집어넣기 전에 기도를 했는데 공이 홀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사람들은 내 실력으로 된 줄 알았다.
매 우승 때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셨는데, 만약 내 생각으로 이 계산 저 계산 했다면 우승하지 못했을 것이다. 골프를 하면서 우승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영어 때문에 인터뷰를 많이 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우승 인터뷰를 할 때는 영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 재단 통해 베푸는 삶 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
- 대회지에 가서도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배 중심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경기 때문에 주일예배를 못 드리면 수요예배에 꼭 간다. 게임 중에 수요예배를 드리면 보통 11시 이후에 잠을 잘 수 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피곤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이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다. 정신이 멀쩡하면 육체는 따라온다. 골프의 기본은 그립을 갖추는 것이다. 잘 가기 위해서는 기본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기본이 없으면 좋은 지식과 능력이 있어도 공은 바로 가지 않는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기본이 있어야 한다.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본이 있어야 한다.
- '최경주 재단'을 통해서도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최경주 혼자만 온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격려해줬다. 지금까지 나를 도와주신 분들이 하나의 저축 통장처럼 쌓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하나님이 세우셨지만 많은 분들의 격려와 사랑이 없이는 최경주는 없었다.
93년도에 사랑 나눔을 시작했다. 청소년들은 20년 후에 우리나라를 짊어질 일꾼들이다. 기성세대들이 책임져야 한다. 아이들이 재단을 통해 도움을 받고, 제대로 된 훈련을 받으며 무척 좋아한다. 아이들 생각을 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우승해서 이 상금을 벌면 아이들에게 가겠지,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지 생각할 때 힘이 생긴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이다. 처음에 올 때도 제로로 왔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없다. 재단을 통해서 조금씩이라도 베풀면서 삶을 살아갈 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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