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민족주의와 결합한 기독교
한국 근대화의 백년 역사는 기독교와 분리될 수 없으며, 기독교 수용자체가 구한말의 애국애족적 민족주의 운동과 통합되어 있다. 당시 민족주의 애국자들은 한국교회를 한 종교의 예배처가 아닌 민족의 교회로 여겼던 것이다. 춘원 이광수는 우리 민족이 기독교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일이 있다며, 여덟 가지를 언급한 일이 있다.
이광수는 기독교가 ① 한국인에게 서양사정을 알리는 데 공헌한 점, ② 도덕의 진흥에 기여한 점, ③ 교육의 보급에 기여한 점, ④ 여자의 지위를 향상시킨 점, ⑤ 조혼(早婚)의폐(弊)를 교정한 점, ⑥ 한글(諺文)의 보급에 기여한 점, ⑦ 사상의 자격(刺激)에 기여한 점, ⑧ 개성의 자각에 기여한 점 등을 감사의요인으로 꼽았다(이광수, "朝鮮의 예수敎(一事一言)",〈朝鮮日報〉 1934년 2월 6일자(《전집제9권》, p. 377).
한국교회가 일제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는 애국지사들의 거점으로서 민족 사회를 향하여 헌신했던 일들은 가치가 있었으며, 비신자들 겨레까지도 감동시켰다.
교회 안에는 일제 항거와 민족 독립과 국가 사회의 도덕증진을 지향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서재필을 중심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을사조약반대의 전통을 이어 구국기도운동, 청년회활동, 계몽운동, 무장투쟁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연이어 일어났다. 신민회(新民會)라는 비밀결사 단체에는 안창호, 윤치호, 이회영, 전덕기를 비롯한 800여 명의 기독교인들이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황해도에서는 1908년경 김구, 최광옥, 송종호, 김홍량, 도인권, 이승길 등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해서(海西)교육총회를 조직하고 일면일교의 학교설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당면과제는 이러한 반일적인 성향이 강한 기독교 세력을 제압하는 일이었다.
기독교가 민족주의와 결합한 그 예가 최근에 발견된 자료가 제시하는 "애국가가 기독교 찬송가로 작사돼 보급 유통됐을 가능성"이다. 美에모리대학 소장된 윤치호의 찬송가모음집(찬미가 15곡, 1908)에 애국가가 수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찬미가는 윤치호가 한영서원 학생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치기 위해 1908년 역술해서 펴낸 노래집으로 15곡의 찬송가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14장에 현행 애국가가 실려 있다. 15쪽에 실린 애국가는 부제가 '애국적 찬송가(Patriotic hymn)'로 명시된 가운데 노래를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에 맞춰 부르는 것으로 표기했다.
현행 애국가는 해방 후 안익태(1906-1965)의 곡을 붙인 것이다. 윤치호 '찬미가' 15곡 찬송가에 애국가 수록; 현행 애국가가 작사자 윤치호의 친일 논란은 물론,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 활동 및 표절설까지 거론되온만큼 "차제에 통일 코리아를 염두에 둔 애국가 제정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작품을 지나치게 저자와 관련시키는 것은 작품의 자율성 견해에 위배될 수 있다. 작품은 공개되어 독자들이 읽으면 그것은 저자의 소유물에서 벗어나 자체의 자율성을 형성한다. 애국가는 이미 백년 넘게 우리 민족의 정서를 형성해 온 것이다. 그대로 존중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애국가는 교회 찬송가?" 美에모리대학 찬송가모음집 수록 뉴시스 입력 : 2014.02.04 10:22 윤치호 '찬미가' 15곡 찬송가에 애국가 수록)
애국가가 기독교 복음주의와 애국심의 결합으로 탄생된 찬송가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안창호(1878-1938)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흥사단측도 "1907년 안창호가 귀국 후 선천 예배당에서 금식기도 후 찬미가에서 시상을 얻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라는 애국가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가 심의 당시 거론된 최병헌 정동교회 목사. 교회 음악가 김인식 등 애국가 작사와 관련된 모든 인물들이 기독교 복음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은 애국가가 초기에는 찬송가로 창작되고 수용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고신대 명예교수 이상규는 "일제는 기독교 회유정책에 실패하자 탄압과 분열을 시도하는 제재를 가했고 식민지배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심리적 저항이 일제히 만세운동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유와 공의 등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의 일제 저항운동은 믿음의 고백 아래에서 민족과 나라를 향한 사랑을 구체적 행동으로 옮긴 것이었다. 장신대 교수 임희국은 "기독교의 3.1운동 참여는 단순 가담이 아니라 순교를 각오한 신앙적 차원이었다"며 순수성을 강조했다.
4. 민족독립 운동을 위한 초교파적인 협력
장로교와 감리교 목회자들이 중심이 된 초교파적 연합운동은 한국기독교를 하나로 연결하고 협력하도록 하여 민족 전체의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3.1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기독교계 인사는 감리교 인사가 9명, 장로교 인사가 7명이었다. 민족 대표에 기독교인사 16명 참여에는 이승훈의 노력이 컸다. 그가 동분서주하면서 길선주, 양전백, 오화영, 정춘수, 김병조, 유여대, 이명룡, 함태영, 이갑성, 박도희 등을 설득해서 결국 기독교 지도자 16명이 33인 중에 포함되도록 했다. 기독교측 민족 대표 16명은, 감리교회 측 9명으로 이필주, 신홍식, 최성모, 신석구, 오화영, 정춘수 목사와 김창준, 박동완, 박희도 전도사이었다. 장로교회 측 7명은 길선주,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목사와 이명룡, 이승훈 장로와 이갑성이었다. 이들은 교파를 너머서 민족 독립을 위한 대의(大義)에 합의하여 함께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1903~1907년에 일어난 감리교와 장로교 부흥운동의 여파로 초교파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민족 독립을 위하여 협력하는 데 있어서 이들에게 있어서 교파의 벽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이러한 연합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3·1운동 당시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했고, 각 지방에서 교파를 초월해 만세운동을 진행했다.
5. 교회의 피해
1)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피해
전국에 산재한 지역교회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지역사회에 보급하는 일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에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므로 그 역할에 따른 대가는 실로 큰 것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일제의 탄압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불에 탄 47개의 교회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바로 경기도 화성에 있는 '제암리감리교회'다.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은 일본군과 경찰에 의한 만행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1919년 4월 15일에는 경기도 화성에서 만세시위 참가자와 33명 신자들이 제암리교회 예배당에 갇혀 학살되는 만행이 자행됐다.
일제 경찰들은 1919년 4월 15일 오후, 제암리교회당에 교인들을 모이게 하고는 문을 폐쇄하고 불을 지른 후에 창문으로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28명이 목숨을 잃었다. 창문밖으로 내 놓은 어린 아이들을 단창으로 죽이고 불을 끄려고 오거나 남편을 구하려고 교회당에 온 부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이는 4월 5일 발안지역에서 발생했던 만세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제암리교회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엄청난 핍박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다시 거세게 저항했다. 교회 안수집사 이상 직분자 50%가 옥고를 치르거나 죽었고, 약 28,000명의 교인들도 옥고를 치르거나 죽었다.
3.1운동에 참여함으로 인해 기독교는 평신도들을 포함해 목사, 장로, 전도사, 교사 등 교역자까지도 3.1운동을 주동하고 참여함으로 일제의 주목을 받았고, 핍박과 피해도 매우 컸다.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1919년 말까지 3.1운동 관계 피검자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종교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많아 3,426명으로 비종교인까지 포함한 총 피검자 19,525명의 17.6%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3.1운동은 한국기독교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역사상의 대표적 민족독립운동이요, 신앙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2) 천주교의 불참: 당시 천주교의 정교분리 정책 반성
당시 종교계가 주도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개신교 16명, 불교 2명이 참여했으나 천주교는 참가하지 않았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하면서 2019년 2월 20일 일제강점기 천주교회의 '신자 독립운동 참여 금지' 조치 등에 대해 "잘못"이라며 사과했다. 김희중 대주교는 이날 발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담화를 발표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다."
김 대주교는 "100년 전에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선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며 "그러나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고 말했다. 그는 31.운동참여금지가 정교분리 정책에 기인했다고 말했다: "외국 선교사들로 이뤄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일제의 강제 병합에 따른 민족의 고통과 아픔에도,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政敎)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 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다."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정교(政敎)분리 정책에 따라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세례명 토마스) 의사의 마지막 고백성사와 미사 요청을 거부했으며 지시를 어긴 빌렘 신부에겐 2개월간 미사 집전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1990년대 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의사에 대해 "일제 치하 교회가 안 의사 의거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1993년)고 사과했으며, 정진석 추기경도 안중근 의사에 관하여 "애국충절뿐 아니라 열심한 신앙인으로서도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분"(2009년)으로 재평가한 바 있다.
당시 선교사들이 정교분리를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지도자들은 3.1운동을 신앙운동으로 파악하고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신교 선교사들도 이를 간접적으로 참여했으나 천주교 지도자들과 천주교 선교사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개신교 신앙은 성경에 기반을 두는 인격적 신앙의 역동성에 기인하는 데 반해서 천주교 신앙은 교황청 주도의 제도적 위계질서 종속성에 근거해 있는 데 기인한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교황청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는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그대로 따랐으나, 교회 총회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우선시하는 개신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개신교 지도자들은 성경 이야기를 통하여 성경 인물들인 하나님 사람들 모세, 다윗, 다니엘, 에스더 등을 애국적인 인물로 보았고 기독교 신앙과 애국 신앙을 동일시하였던 것이다.
둘째, 천주교는 교황청의 방침이 지교회에 하달되는 하향식 시스템인데 반해서 개신교는 지교회에서 총회로 올라가는 상향식 시스템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연습장이 되었고 민주주의의 실험장이 되었다. 천주교 지도자들은 교황청의 방침이 불만족스러웠으나 그대로 추종한 데 반하여 개신교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정책으로 인하여 한국 개신교신자들이 결코 정치적 이슈에 관여하지 않도록 교육했다. 하지만 개신교 지도자들은 민족 독립에 관한 일에는 선교사의 가르침을 듣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 민족이 일본 총독부에 의한 차별대우 받는 것에 대한 강한 반감과 이를 벗어버리려는 강한 독립의지를 이심전심으로 느꼈으므로 외국인인 선교사들에게 알리지 않고 한국인 독자적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계속)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