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3.1 독립 운동: 일제의 폭정으로부터의 독립이 3.1운동의 근본 원인
1) 전 민족이 참여 한, 나라의 국권을 되찾기 위한 애국독립운동
3.1독립 시위는 한일합방 후 무단정치로 행해진 일제의 민족 수탈과 차별과 통제에 대하여 지도층과 일반 민중이 함께 봉기하여 민족 독립을 요구 천명한 것이다. 조선 총독부는 사회제도적으로 마약의 유포와 공창제도를 도입하고 유곽을 설립하여 청년의 도덕적 퇴폐를 유도하였다. 종교적으로는 천황제도의 확산을 위한 신사(神社)를 설립하였고, 일본의 조합교회가 늘어가도록 방조하였다. 종교행사는 가질 수 있었지만, 목사의 설교는 일제 헌병과 경찰의 요시찰의 대상이 되었다. 3.1독립선언은 일제의 1910년 국권 쟁탈에 의해 빚어진 지난 10년 동안 쓰라리게 받았던 민족적 차별 대우, 각종 통제와 기본권의 제한에 반발한 나라의 국권을 되찾기 위한 애국독립운동이었다.
기미독립선언문은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선언하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문 초안>
3.1운동이 발발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의 무력정치에 의한 강압 지배에 대한 한국 국민의 독립의지였다. 일제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언론, 집회, 결사 자유도 박탈하였다. 조선인들에 대한 사법 처우와 행정기관의 차별대우가 심하였고, 조선인들의 해외여행도 제한하였다. 임야조사사업, 토지조사사업을 벌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조선인들로부터 많은 땅을 수탈하였고 회사령을 통해 조선인들의 경제생활을 통제하였다. 3.1운동이 실패한 독립운동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중요성과 별개일 수가 없다.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분연히 항거하여, 억압될 수 없고, 억압되지도 않는다는 민족의 정신과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3.1독립운동은 일부 지역적이거나 일부 엘리트 집단의 운동이 아니라, 전 민족, 민중이 참여 한, 역사 이래 최초의 비폭력 독립운동이다. 이 운동이 패망한 일제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는 정신적 자산과 능력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2) 3.1운동은 헝가리 항쟁과 체코의 봄 같은 역사적 의미성
지난주 2019년 2월 25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국제컨퍼런스 - 3.1운동의 의미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미래구상'에서 해외학자로서 초청된 '희망의 신학자'요 독일 튀빙엔대 명예교수 위르겐 몰트만은 3.1운동은 '민중의 외침'이자 '한국민족 공동의 미래를 위한 정치적 약속'이라고 규정했다. 몰트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구권 사회주의국가 헝가리, 체코 등지에서 일어났던 소비에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운동이 외견상 실패로 보였지만 의미가 없지 않았다며 한국의 3.1운동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몰트만은 3.1운동의 의미를 다음같이 3가지로 지적했다. 첫째, 1919년 3월 1일 한국 민중들은 하나의 목소리로 외쳤다. 둘째, 자신의 자긍심을 증명하고 자유와 연대를 위해 희생했다. 셋째, 한 민족의 문화적 기억에 있어 실패와 고난은 승리로서 각인된다. 몰트만은 비슷한 사례로 1956년 헝가리 '부다베스트의 항쟁'과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을 들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1956년 소련에서 후계자 후러시쵸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고 사회주의 이상의 다양성이 인정되자 헝가리에서 민주화 열풍이 일어났다. 1956년 10월 23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학생·시민이 연대해 소련군 철수· 복수정당제에 의한 자유선거 실시, 표현과 사상의 자유, 정치범 석방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당황한 소련군은 12월 4일 대규모 군사 개입을 단행, 헝가리 전 국토를 장악해 버렸다. 결국 민주화 기수 너지(Imre Nagy) 수상이 주도한 헝가리의 반소 자유화 운동은 수천 명이 희생되고 20만 명이 국외로 망명하는 참담한 비극을 남기고 끝났다.
1956년 소련에서 벌어진 스탈린 격하운동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국민의 불만이 높았다. 이 상황에서 1968년 1월 총회를 통해 스탈린주의자인 노보트니가 사임하고 개혁파인 두프체크가 당 제1서기를 맡았다. 개혁파는 4월에 열린 총회에서 새 강령을 채택하였다. 내용은 재판의 독립, 의회제도의 확립, 사전검열제의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언론·방송·출판·집회의 자유 보장 등이다. 개혁을 통해 한동안 '프라하의 봄'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체코 사태가 동유럽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소련군은 1968년 8월 20일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1969년 4월 후사크가 당 제1서기가 되었다.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끝나버렸다.
몰트만은 두 나라에서 시민봉기 모두 옛 소련의 탄압으로 무산됐지만 3천여 명의 시민들의 목숨이 희생된 헝가리 항쟁은 '소련 침략에 맞선 국가적 저항'으로, '프라하의 봄'은 문화혁명으로 자리매김했다고 강조했다. 몰트만이 언급하는 바같이 1960년대 동구 두 나라 헝가리, 체코의 저항운동이 실패로 끝났으나 1990년에 들어와 동구의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와 민주화의 꽃을 피운 것 같이 1919년 3.1독립운동도 당시에는 외형적으로 실패했으나 내면적으로는 독립정신을 고양시켰고 외형적으로는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실행하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5. 가장 위대한 민족 운동: 기독교인에게는 민족구원 신앙운동
역사학자 200명에게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80%가 3.1운동이라고 대답했다. 3.1운동이 우리 민족사에 큰 사건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3.1운동은 참가한 많은 국민들의 피해를 초래한 실패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 결과 일본이 망한 것도 아니고, 조선이 독립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적 민족 정기(精氣)를 세우는 면에서는 성공했다.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당시 일부 기독교인들은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적 행위가 아닌 것으로 착각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 신앙의 지도자들은 기독교 신앙과 애국 및 구국의 길을 분리될 수 없는 다고 보았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그 시대의 역사적 과제 해결에 무관심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보았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 거의 모두는 신앙적 결단에 의해 참여했다."
장로교 이승훈 장로와 감리교 신석구 목사가 이러한 신앙과 애국을 연결시킨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장로교 이승훈 장로와 감리교 신석구 목사가 이러한 신앙과 애국을 연결시킨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승훈 장로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난과 싸웠다. 유년시절 남의 집 심부름꾼으로 겨우 끼니를 해결하는 가난한 삶을 살았고, 이 후 청년기에 사업을 일으켜 큰 부자가 되었다. 남강은 부를 누리면서 편안한 삶 대신 불쌍한 조선의 백성을 선택했다. 선생은 나라를 위해 신앙과 애국을 결합한 기독교 학교 오산학교를 세우고 3·1운동의 민족대표로 활약했다. 남강의 유훈은 오늘날 우리 후손들에게 희생의 정신을 일깨운다: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을 위하여 쓰게 하라. 그리고 서로 돕고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전진하라."
신석구 목사는 신앙의 승리자, 희생적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목회자로 존경받고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신앙으로 결단하고 민족의 문제에 뛰어들었다. 그는 당시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오화영 목사에게 민족 대표로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바로 결정할 수가 없어 이 문제를 놓고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 그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마침내 2월 27일 새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4천 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에 즉각 3.1운동에 참여할 뜻을 결정하였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3.1운동은 민족 독립 운동이며 동시에 민족구원 신앙운동이었다. 국권을 상실하여 시민의 기본권(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을 빼앗긴 일제의 정치적 속박 상태에서 민족과 국가의 권리를 찾는데 기독교 신앙인들이 참여하는 국가구원 신앙운동이었다. 3.1운동은 "경건한 신앙의 내연이 곧 역사적 요청에 따라서는 민족이나 사회의 차원에서 증언된다는 구조적 발전이었다."
"1919년 3월 평남 강서지역에 '독립단 통고문'이라는 전단지" 내용은 이렇다.
"...신자는 매일 세 때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서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을 돌아가며 다 읽을 것이라."
"말씀과 기도를 통한 3.1운동 참여는 기독교인의 독특한 것"이라며 "고난 중에 소망을 잃지 않고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이점이 "당시 총인구 1.5%에 불과했던 기독교 세력이 지도적 총 피검자(기소)의 17.6%나 차지하게 했던 주요 요인" 이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신앙운동으로 이해하였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은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하였고, 이때에 이웃이란 일제라는 강도를 만나서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자기 동족이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민족 구원 신앙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금욕적 은둔의 기도원이나 신비주의적 경건에서도 겨레나 나라를 위한 기도의 언어가 떠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경건주의는 역설적으로 역사적 신앙이었다."
6. 지도층과 일반 백성이 함께 일으킨 근대화를 여는 혁명적 사건
3·1운동 당시 조선에는 일본 육군 2개 사단과 1만3000명의 헌병경찰이 그물을 치고 있었다. 3.1운동은 한국 역사에서 지도층과 일반 백성이 함께 일으킨 최초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다른 7개 지역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됐다. 3.1운동은 우발적이며 즉흥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의 애국적인 젊은이들에 의하여 잘 준비된 기반 위에서 일어난 운동이었다. 삼천리 곳곳에서 수많은 민중이 만세를 불렀다. 3월 1일을 기하여 고양, 해주,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에서 동시다발의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독립선언서 낭독, 독립만세 외침, 시가행진과 같은 닮은꼴 시위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평양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고종 추도회를 거행하고 시내에서 합류해 만세 시위를 벌였다. 3월 3일 고종 국장 참석차 올라온 수십만 지방 인사들은 3월 1일과 5일의 만세 시위를 목격하거나 참여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3월 10일 서울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리자 학생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전국 곳곳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3·1운동 첫 10일간 평안남도가 선봉에 섰다. 3월 4일 강서군 모락장(사천시장)에서는 강서군 모락장교회와 반석교회, 인접 대동군 원장교회와 산수리 교회 등 4개 교회가 연합해 5000명이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독립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전후로, 시기는 그해 5월 말까지 또는 그 이듬해 3월 말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물론 해외에 이주해 있던 동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던 운동이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수가 202만여 명, 시위 횟수 1,542회,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피체포자 46,948명, 파괴 및 전소된 민가피해 715호, 교회 74개소, 학교 2개 등이었다.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1,500여 회를 넘었고, 참여 연인원은 202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1919년 3·1운동은 전국 220군(郡) 가운데 211군(95.9%)에서 일어났다. 지역별로 평안남도는 3월 1~7일, 함경남북도와 경북·전북은 3월 중순, 경기도와 충청남북도 등은 3월 말에 시위가 정점에 이르렀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교수 이송순는 다음같이 분석한다: "서울과 거리가 먼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도 기독교와 천도교 등 종교 세력의 조직적 운동으로 빠르게 시위가 시작돼 대규모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국편 DB 자료를 통해서도 3·1운동의 전국적, 전 민족적, 전 계층적 성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충북 청주와 충남 청양 등 전국 43군에서는 야간에 산 위에서 불을 피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산상 횃불 시위'가 벌어졌다. 이송순은 그 이유를 다음같이 설명한다: "경찰이나 헌병의 출동이 어렵고 폭력 진압을 피하기 쉽기 때문에 시위 참여자의 피해와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독립과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으로 산 위에서 야간 횃불을 사용한 것"이다. "산상 횃불 시위는 농민들의 지역 공동체 중심 자발적 시위에서 두드러졌다."
경남 합천군 가회·상백·백산면과 인근 산청군 생미량면 유지들이 반경 20㎞ 내 마을 주민들을 동원한 독립 만세 시위였다. 시위에 소극적이라고 알려졌던 유림도 앞장섰다. 4월 2일 통영 장날 시위엔 소복을 입은 통영 기생들이 5000명 시위 대열 선두에 섰다. 정막래(丁莫來·21)·이소선(李小先·20) 등 7명이 기생단을 조직해 시위에 불을 지폈다. 수원, 안성, 진주, 해주 기생들도 만세 대열에 합류했다.
3·1운동은 전 민족이 참여한 독립운동이었다. 이 만세시위운동에 당시 백성 거의 전부가 참여했던 것은 일제의 반인륜적인 무력적 억압통치와 착취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공유된 저항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1천 800만 정도였으니 총인구의 10%가 넘는 참여는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로서 우리 시민이 역사 형성에 주체적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근대화를 여는 시민혁명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7. 폭력운동 아닌 평화적 저항운동
기미독립선언서에 나타난 독립사상은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보편적 가치관과 인류공존을 지향하는 비폭력적 저항이었다. "1919년 3월 평남 강서지역에 '독립단 통고문'이라는 전단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존경하고 고귀한 독립단 여러분이여, 어떤 일이든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니, 독립의 주의를 손상할 뿐이니 행여 각각 주의할 지며..." 독립단 전단지 내용은 억압자 일본인에 대한 적대와 폭력을 자제하고,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의지했던 태도를 나타내며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위와 더불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의지할 것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자 최남선은 "그 내용이 기독교 이념과 관련됨을 훗날 법정에서 증언한 바 있다"
당시 기독교인만의 독특한 3.1운동 방법이란 "억압자 일본인에 대한 적대와 폭력을 자제하고,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유지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독립할 것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자는 것"이었다. "(요일별) 말씀과 기도를 통한 3.1운동 참여는 기독교인의 독특한 것으로,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을 계획하고 적극 참여한 것은 권익 신장이나 권력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민족을 위해 선두에 서서 자신을 희생하고 일제에 항거했던 것"이었다. 3.1운동 당시의 한국교회의 신앙은 오늘날의 한국교회처럼 개인화되지 않고 공공성을 띄었던 것이며, 복음과 정의를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긴 것이다.
평안남도 강서군 모락장(사천시장)에서 모락장교회, 반석교회, 인접 대동군 원장교회와 산수리 교회 등 4개 교회가 연합해 5천명이 모인 만세시위에서 일제 총격으로 13명이 목숨을 잃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무단 발포를 한 사천헌병주재소를 습격해 헌병과 보조원 4명을 살해했다. 시위대의 폭력응징은 처음부터 의도된 사건이 아니라 일제의 발포로 53명의 사상자가 난 위기상황 속에서 벌어진 정당방어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3.1운동은 비폭력이란 이름으로 수 많은 사상자만 내고 독립쟁취라는 목적에서는 실패한 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사회개혁을 갈망하던 많은 세력들에게 무기력한 투쟁에 대한 회의만 안기고 이들을 기독교로부터 떠나게 만들고 그로인한 운동역량의 손실,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무단 통치를 종식하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문화 통치로 더욱 강화하도록 초래한 면도 있다.
8. 임시정부 태동의 계기: 3.1운동으로 대한민국 국가 탄생
1) 임시 정부 탄생 계기
실패한 운동으로 기록되지만 3.1운동은 임시정부가 생겨나는 원동력이 되었고, 비폭력운동으로서 세계에 우리의 존재를 증명했으며,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나면서 백성들의 참여도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라와 민족에 대한 개념이 변하면서 민주주의 토대를 마련했다, 왕을 위한 궐기가 아니라 민족 자결주의 영향 속에서 민족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그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거족적 독립운동은 자주 독립, 민주 평화를 내세우며 지속적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3.1정신으로 승화되어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만주 일대의 무장 독립 투쟁은 대원(隊員)을 모아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통하여 한국이란 나라가 존재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게 되었고, 미국, 중국을 중심으로 해외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나아가서 해방되어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도 3.1정신 위에 건국되었다.
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중국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이들이 상하이에 집결한 것은 선언서를 통해 천명한 '독립국'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1919년 4월 10일 밤, 이들 중 29명이 대표가 되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먼저 설립한 것은 임시의정원이었다. 임시의정원은 요즘 국회와 같은 것이다. 임시의정원은 설립과 더불어 첫 번째 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의장으로 선출된 이동녕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국호(國號)였다. 신석우(申錫雨)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칭하자"고 동의하였고, 다른 의원들의 재청을 거쳐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정해졌다. 이로써 한민족 역사에서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가진 국가가 탄생되었다.
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고, 내무·외무·법무·재무·군무·교통의 6개 행정부서를 둔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임시의정원은 이 관제에 따라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그리고 행정부서 책임자인 국무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헌법으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 통과시켰다. 회의를 마친 것은 1919년 4월 11일 오전 10시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이를 유지 운영하기 위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2)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탄생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하이에서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건립은 한국민족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수립 당시 제정·공포한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하면서,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군주 주권과 전제(專制)군주제의 역사가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이런 민족사의 대전환은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건립되면서 이루어졌다.
3·1절이란 단지 독립선언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3.1 독립선언서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그 독립국으로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세웠기 때문이다. 만일 독립국이라는 것을 선언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다면, 3·1독립선언은 별다른 역사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런데 4월에 상하이에서 민족 지도자들이 모여서 대한민국을 세우는 역사적인 임시정부를 세운 것이다. 3·1절을 맞아 그 수단인 만세시위운동도 기념할 필요가 있지만, 본질을 더 중요하게 기념할 필요가 있다. 3·1 독립선언의 본질은 독립국임을 선언한 데 있고, 그 독립국으로 세운 것이 대한민국이었다. 3·1 독립선언이 갖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는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탄생시켰다는 데 있다.
3.1독립선언문이 선포한 '자유롭고 민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3·1 정신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포한 임시헌장에 그대로 반영돼 대한민국의 청사진이 됐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1조)임을 선언하고,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4조)가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명백히 밝혔다.
오늘날 국민소득 3만1천달러(2018년)로서 '3050클럽'(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고 인구가 5000만 명 이상인 국가클럽[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7번째 진입국가 되고 11대 경제대국이 된 토대에는 3.1절이 선언한 자유민주독립국가 정신이 있다. 윤치호, 한규철, 박영효를 비롯한 당시 일부 지도층이 근시안적 시각에서 청일전쟁과 로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강대국 중국과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제압한 군국주의 일제의 국제적 위상과 일제로부터 받을 박해를 두려워하여 '달걀로 바위를 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 3.1운동은 오늘날 1백년 후 세계 9위 수출국, 11대 경제대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위상에서 그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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