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는 말
삼일 후면 북미 정상 간의 2차 회담이 베트남에서 열립니다. 기대가 큰 만큼 우려와 걱정도 함께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민족,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걸린 사건인 만큼 관심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회담이 열리는 그 베트남에 며칠 전 다녀왔습니다. 제게는 남다른 의미가 곁들인 그런 여행이었습니다. 그곳을 다녀온 분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점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와 발전이 이뤄지고 있는 점입니다. 최근 매년 7% 내외의 경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노동의 질이나, 정부정책, 시장개방화, 치안문제 등에 있어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아시아 국가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입니다. 섬유나 신발 등 경공업 분야의 글로벌 기업 이전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자동차, 전자와 같은 분야로도 투자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한국이 70~80년대, 중국이 90년대 이후에 이룩한 고도성장을 베트남에서 기대하게 합니다. 거기다 1억 명에 달하는 인구와 자원 또한 성장의 잠재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전벽해나 천지개벽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의 상흔이 가신 다낭 시 해변 가는 수십 층짜리 고층 빌딩으로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어 그 외관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러나 저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5,100명의 한국군과 58,000명의 미군이 그 귀한 목숨을 희생한 전쟁이었는데, 과연 그 대가는 무엇인가라는 것이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 지독한 더위와 악조건 속에서 정글을 누비며, 목숨을 걸었던 그 엄혹한 전쟁의 흔적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의문이 꼬리를 잇습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공산정권이 들어서면 베트남은 존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참전을 독려하던 목소리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 지 궁금합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국민이 선택하고 국가의 정책이 올바른 과정을 거쳐서 추진되어 정당성을 갖게 되면, 그 결과가 긍정적인 효과로 나타나는 것을 오늘의 베트남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승전한 전쟁이 아닌, 패전한 전쟁터를 찾아가서 오히려 패전의 결과가 더 긍정적인 베트남 역사로 펼쳐지고 있는 현장을 보고 있는 역설이 혼란스럽기 까지 합니다. 하지만 100여년의 프랑스 지배, 10여년에 걸친 세계 최강 미국과의 전쟁, 그리고 수없는 생명의 희생위에 얻어진 오늘의 베트남을 보면서 오늘의 성서일과를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2. 오늘의 성서일과
○ 시편 37:1~11, 39~40 - 악한 자들이 잘되는 세상,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라.
문학 유형에 관한 한, 시 37편은 "시"라기보다는 오히려 "잠언 수집물"로 보아야 하며, 그 잠언의 교훈들을 잘 암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두 절 간격으로 각 절의 시작을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 순서에 따라 배열한 아크로스틱 구조의 잠언 편집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인의 번영과 경건한 자의 고뇌 때문에 악인을 부러워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자신의 길을 주께만 맡기고 의지하라는 메시지를 유지합니다. 7절, "잠잠히 주님을 바라고, 주님만을 애타게 찾아라.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자랑하는 자들과, 악한 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는 자들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 시의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창세기 45:3~11, 50 - 요셉이 형들을 만나고 화해하다
39장에서 시작한 요셉을 주인공으로 하는 한편의 드라마 클라이맥스를 이 부분에서 읽게 됩니다. 자신을 팔아버린 형제들에 대한 미움이나 징벌보다는 용서하고 포용하는 그의 모습은 그의 신앙적 관점, 자신이 이집트에 팔려온 이유는 가족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온갖 고생이나 역경보다는 그 안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고 있는 요셉을 만납니다. 고난의 결과가 어떤 보상으로 나타나는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 고전 15:35~38, 42~50 - 몸의 부활
바울은 부활의 과정과 새로운 몸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곧 죽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능력이라는 관점 하에서 서술합니다. 부활의 몸이 어떻게 나타날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인간 인식의 한계성을 일깨웁니다. 모든 인간은 죄와 죽음에 노출된 연약한 존재로서 썩어질 몸을 지니고 있으나, 예수의 부활은 이 죄와 죽음을 이기는 역사를 통해, 썩어질 몸으로 새로운 부활의 몸을 덧입게 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 누가복음 6:27~38 - 원수를 사랑하라, 남을 심판하지 말라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비교되는 누가복음의 평지설교 가운데 사랑에 대한 설교를 이 부분에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사랑은 세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보복하지 않는 사랑(27~31절), 보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32~36절), 그리고 비판하지 않는 사랑(37~38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사랑으로 채워져서 우리를 괴롭히고 박해하는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왜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까지도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지 옳게 이해하고 잘 살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말씀입니다.
3. No Pain, No Gain
얼마 전 동네 목욕탕에서 몸에 문신을 한 젊은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가슴에 그려진 용 모양의 문신보다는 그의 등에 새겨진 "No Pain, No Gain"이라는 문구가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고통 없이 얻어지는 보상은 없다'는 의미로, 어떤 성취를 위해서는 그에 못지않은 대가를 지불해야하는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뜻인 듯합니다.
2016년 그 춥고 긴 겨울 동안 촛불을 들고 박근혜 퇴진을 외쳤던 고통스런 과정도, 2017년 대선으로 이어져 문재인 정부의 등장이라는 보상을 얻은 것도, 모두 이런 문구로 치환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불안한 형국이 여전한 정치현실을 보면, 아직도 우리가 치러야 할 고통의 깊이와 길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진보적인 인사들과 관련된 You Tube의 확인되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불길한 소식들이나 가짜 뉴스가 폭주하고 있는 현상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주말이면 광화문 광장을 누비고 있는 소위 태극기 부대의 소란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의 이런 사회적 분위기나 여러 현상들은 사회의 변화와 진보를 열망해 온 저희들의 근심과 걱정을 이어가게 합니다.
오늘 성서일과 중에서 저의 관심은 복음서의 말씀과 시편의 말씀으로 집중해보고 싶습니다. 이들 말씀을 통해 '고통 없이 얻어지는 보상은 없다'는 현실을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시편 37편의 저자가 강조하려는 중심 주제는 "행악자 때문에 분개하지도 말고, 악인을 시기하지도 말아라. 행악자에게는 장래가 없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고 만다."는 잠언 24장 19~20절의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잘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라."고 하거나,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자랑하는 자들과, 악한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는 자들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 말라고 하면서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에 우리는 정말로 순순히 긍정하고 따를 수 있을까요? "조금만 더 참아라. 악인은 멸망하고야 만다."는 말씀만 믿고 기다릴 수 있을까요?
1~2절의 말씀, "악한 자들이 잘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는 지혜교훈은 이 지혜 시 전체의 중심사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번영을 누리는 것을 보고 경건한 자들이 마음으로 불평하고 투기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시인은 강조합니다. 동시에 그렇게 불평하고 시기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악인들이 외적으로 잘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 악인들이 잘되거나 번영하는 것은 마치 풀이나 푸성귀처럼 쇠잔할 것이기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23절 이하에서 우리는 구약의 신앙인들이 끊임없이 씨름하여 왔던 한 문제, 경건한 자가 겪게 되는 '역경'이라는 것은 악인의 경우처럼 완전한 몰락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의 역경 속에서도 또한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몰락'에 이르지 않는다는 신학적 문제와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늘 바르고 의롭게 살려는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고뇌는 왜 악을 행하거나 불의한 자들보다 더 많은 시련과 불행에 봉착하는 것을 볼 때 생겨납니다. 선과 악의 인과응보적인 신념은 선민의 수난 역사와 만나면서 이미 심각한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지혜문학권의 신념에서는 욥기와 전도서 같은 대표적인 저항문학의 심각한 신학적 반성에 의한 돌파구가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악인의 번영에 대한 투기'라는 인간 심성이 갖고 있는 심적 갈등의 문제는 미해결의 문제로 남습니다. 시편 37편의 저자는 매우 대담하게도 자신을 야훼 하나님의 '응석받이'(the spoilt child - 김이곤 교수 주석)가 되게 하여 주님의 품속으로 내어 던지는 그런 믿음으로 '악인의 번영에 대한 투기'라는 인간 심성의 늪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야훼 하나님의 '응석받이'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모든 불신의 장벽을 허무는 길이라고 시인은 끝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불의한 자들이 잘되고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인내하는 고통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이 말씀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할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합니까? 고통을 인내하고 버텨내서 얻어지는 보상이 눈앞에 펼쳐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을 지켜내야 하는 것인지, 여전히 속 시원한 답을 찾고 싶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 이하는 마태복음 5장38절 이하의 산상설교와 같은 맥락의 평지설교의 중심 내용 중의 한 부분입니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 중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마태복음의 문맥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 부분은 David Bivin이 쓴 [New Light on the Difficult Words of Jesus - 번역본 '유대인의 눈으로 본 예수']의 해석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David Bivin 등은 그들이 발행하는 [예루살렘 퍼스펙티브] 잡지와, 역시 그들의 웹사이트(www.jerusalemperspective.com)를 통해 지속적으로 1세기 유대인 사회의 특징을 연구하고, 그 시대의 일반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의 특징을 꾸준히 연구하여 예수 말씀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예수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 안에서 살고 계셨다고 지적합니다. 그 시대에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 시대에 사용한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에 사용된 히브리어와 다른 새로운 것으로, 중기 히브리어(Middle Hebrew) 또는 미쉬나 히브리어(Mishnaic Hebrew) 일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이런 언어적 특징을 통해 예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같은 셈어 계열로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언어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 가운데 '아바(아버지)', '라가(공허한, 속이 빈)', '고르반(바친)', '랍오니(나의 스승, 나의 주)'와 같은 단어들은 아람어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단어들은 미쉬나 히브리어이기도 하다고 관련 연구자들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사용하신 언어가 미쉬나 히브리어라는 것을 알면 주님의 말씀을 재구성하는 것과, 그 시대의 다른 랍비들이 히브리어로 전한 가르침 중에 비슷한 내용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요약하면, 예수의 유대적인 부분들, 즉 예수가 랍비들의 용어와 관용구를 사용하셨다는 점, 그리고 히브리어로 말씀을 가르치셨을 것이라는 점, 예수의 시대와 가까운 시기의 유대 문서들이 그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 데이빗 비빈 연구팀의 중심 과제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의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사랑에 관한 말씀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과거의 학자들은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친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원수들에게 보복하는 것을 훌륭한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사상은 속담의 형태로 로마제국의 다양한 민족들의 입에 자연스레 오르내렸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그런 속담을 듣고,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의 말씀은 더 큰 문맥으로 보면, 마태복음 5장 21절 이하의 말씀은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부분에서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씀을 여섯 번 사용하셨는데, 그 때마다 토라의 구절들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말씀하셨습니다. 형식적으로는 테제와 반테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로마 시대에 유행하던 속담을 말하신 것이 아니라 전승된 토라의 구절들을 해석한 전통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언급하신 이 전승들의 배경은 유대인들의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사해문서들 가운데 히브리어로 기록된 훈육지침(Manual of Discipline)이 있는데, 이것은 사해의 에세네파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였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 Josephus)는 에세네파에 대해 기술하면서, 그들은 매일 두 번 공동식사를 하기 전에 맹서를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 맹서에는 "불의한 자들을 영원히 미워하고 의인들과 함께 싸우겠다."(전쟁문서 2:139)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훈육지침에 나타난 그들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에세네파는 같은 종파에 속한 자기 동료를 사랑하고, 그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레위기 19:17~18의 말씀을 사랑에 관한 중요한 구절로 보았습니다. 이 구절은 형제에게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며, 동포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웃(히브리어 레아, רע)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더합니다. 이 말씀을 역으로 적용하면, 동포가 아닌 사람, 즉 외부인, 종파 밖의 사람,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괜찮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레아(이웃)'의 범위를 넓혀서 원수까지 포함시킨 것입니다. 예수는 에세네파가 만든 개념, 즉 하나님은 의인들을 위하시고 악인들은 대적하신다는 그 종파의 사상에 반대하십니다. 에세네파가 자기들의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을 미워하라고 한 교리를 부정한 것입니다. 예수는 분파 밖의 사람들도 '레아(이웃)'의 범위 안에 두시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의 비유를 통하여 그 시대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같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들을 '레아(이웃)'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이 말씀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하나님이 물리적인 세계에 행하는 일들을 설명하십니다. 마태복음 5:45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하나님은 악한 자만 따로 어둠에 두시지 않고, 불의한 자에게 비를 적게 내리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의인들과 불의한 자들에게 선하심과 자비와 긍휼을 풍성하게 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방식을 본받아 따르라고 하시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들의 사회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하고, 어떻게 반응하여야 할까요?
4. 맺음 말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도 생각과 가치가 다르고 신념이 다른 사람, 아니 구체적으로 나를 훼방하고 위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현실 속에서 쉽게 가능합니까?
그러나 이 질문이전에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나와 남을 구분하고, 구획 짓는 일상을 탈출하거나 극복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나와 남, 나 남, 글자의 받침 하나 차이인데, 때로는 그렇게 구분하고 갈라놓아야 더 편하고 더 자연스러운 것이 우리의 일상인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붙잡고 따르라 하셨는데, 나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것인가? 내 안에 있는 나와, 남에게 보이고 있는 나는 과연 동일한 나인가? 내가 사랑하는 나는 과연 어떤 나인가? 이런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은 또 다른 고통이고, 형벌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오늘의 성서일과를 읽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끊이지 않는 질문과 의문에도 불구하고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은 성서의 다른 말씀들과 병행하여 우리를 묵상하게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5,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베드로전서 3:9,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을 상속받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로마서 12:14~19,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No pain, No gain! 고통 없이 얻어지는 보상은 없다는 경구를 되새겨 봅니다.
■ 강대인 교수는 미디어시민 모임 이사장(현)으로 방송위원장, 한국방송학회장을 역임했으며 건국대 언론정보대학원장, 계명대 사회과학대 학장 등을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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