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 교황은 성경적으로 무오한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성경적 교회는 교황의 직제 자체가 없을 뿐 아니라 교황은 성경적으로 무오하지 않다. 그렇다면 교황 무오 교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로마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교황은 신자들을 위한 공적인 믿음과 도덕에 대해 언급할 때 무오하다. 바로 교황의 무오성(infallibility of the Pope)이라 알려진 교리다. 이 주장은 언제 등장한 것인가? 이 교리가 선포된 것은 1870년 제 1회 바티칸 공의회였다. 이 교황의 무오성 교리는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주요 논쟁점으로 남아있다.

교황 무오성에 대해

로마 카톨릭 당국자들은 교황 무오성에 대한 언급(The Statement of The Doctrine of Infallibility)하면서 무오성을 '잘못으로부터의 면제(immunity from error)' 즉 수동적 혹은 능동적 속임에 대항하여 보호 받는 것이라 정의한다. 제 1회 바티칸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될 것들로 “로마 카톨릭 교회와 로마 교황(the Roman Pontiff)은 온 세계의 최고 권위를 주관하며 로마 교황은 은총 받은 베드로의 계승자요 사도의 대표요 그리스도의 진실한 대리자(vicar)요 모든 교회와 믿음의 머리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교사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은총 받은 베드로를 계승한 자요 모든 우주적 교회를 양육하고 질서를 지키고 지도하는 온전한 능력을 가진 자로서 여기에는 공의회와 거룩한 성경의 기록을 포함한다”고 선포했다.

교황은 그의 지고(至高)한 사도적 권위로 모든 그리스도인을 목양하고 치료하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서 말할 때는 신적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향하여 믿음과 도덕에 관계된 교리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무오성을 소유하게 된 축복을 받은 베드로에게 부여하고 약속한 신적(神的) 지원에 의해 온 세계 교회가 지켜야할 신앙과 도덕에 관계된 교리를 분명하게 언급할 수 있다.

“따라서 교황 자신이 언급한 이런 정의들을 카톨릭은 변경 시키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 공적으로 교황 무오를 반대하면 하나님께서 금하여 주실 것이며 반대하는 자들은 교회 밖으로 추방할 것을 천명한다”는 것이 교황 무오설의 근간이다.,

교황 무오성에 대한 효력(Qualifications)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교황이 가르친 모든 부분이 무오하지는 않고 오직 교황이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믿음과 도덕에 대한 공적 해석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가지고 말할 때만 무오하다고 말한다. 카톨릭 교리 권위자 Avery Dulles는 사도적 권위를 말할 때는 (1)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회자와 교사로서 공적 역할을 만족시켜야 하며 (2) 베드로의 계승자로서의 최고 사도의 권위에 일치하여야 하고 (3) 믿음과 도덕 교리 즉 신적인 것과 관련된 교리적 표현에 한정하고 (4) 모두에 의해 명확히 인정되는 교리에 부과한다고 했다.

둘째로 교황은 믿음과 도덕에 대한 문제가 아닌 것들을 언급할 때에는 무오하지 않다. 그런 문제들에 있어서는 교황도 다른 사람처럼 유오(有誤)하다.

셋째로 교황은 무오 하더라도 절대적이진 않다. Dulles는 “절대적 무오(Absolute infallibility)는 하나님께만 적합하며 그 외의 모든 것은 2차적이고 제한적”이라고 했다.

넷째로 무오는 변경할 수 없음(irrevocability)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교황은 교회가 이전에 무오하다고 선포한 것을 거부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바티칸 제 1공의회와 대조하여 많은 카톨릭 신학자들은 교황이 주교와 독립적으로 무오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Dulles는 무오는 “주교단과 공의회와 교황에게 속한다”고 했다. 그러나 카톨릭 보수주의자들은 제 1회 바티칸 공의회가 이런 견해를 비난(condemned)하였다고 주장한다.

교황 무오성에 대한 방어

오트(Ludwig Ott)는 교황 무오성 논쟁에 대해 성경과 전통의 증거를 가지고 논증한다.

1) 성경적 주장

오트는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그의 교회 설립자로 만들었다(마 16, 18)고 했다. 오트는 또한 요한복음 21장 15-17절(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을 가지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최고의 목자 즉 그의 후계자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밀 까부르듯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해서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 했지 않은가. 교황 무오 교리를 방어하기 위한 더 확고한 지지 구절이 있는데 바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 도다”(요 11:49-52)이다.

2) 교회 전통으로부터의 무오성 주장

로마 카톨릭은 자신들의 교황 무오 교리가 초대 교부들의 믿음에 기초한다고 본다. 초대 교부들이 카톨릭 교회와 교황의 가르침의 교리적 권위를 명백하게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교황 무오성에 대한 범 기독교계의 입장

프로테스탄트들뿐 아니라 성공회와 동방정교회 그 외 모든 기독교계가 교황의 무오성 교리를 거부한다. 그레고리 1세(590-604, 실질적 로마 교황, 로마 교회 58대 감독)는 보편적(우주적) 적그리스도(Anti-christ)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프로테스탄트는 성경의 무오는 받아들이며 인간이나 사람이 만든 규정이 성경의 무오한 해석자가 된다는 것은 부정한다. 교황 무오에 관한 고전적인 거부는 살몬(George Salmon)이 쓴 교회의 무오성(The Infallibility of the Church, 1914)이 있다. 교회는 이 내용에 대해 답하지 않았다.

교황 무오 교리는 현대 카톨릭 교회 안에서도 반대자들을 가지고 있다.
한스 킹은 그의 책 『무오? 그에 대한 탐구』(『Infallible? An Inquiry』)에서 교황 무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비난 받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옹호 아래 가르치는 것을 금지 당한 이유였다.

교황은 정말 무오한가?

이제 교황 무오성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살펴보자. 첫째 교황 무오성에 대해 성경적 논증으로 대응할 수 있다.

교황의 무오성을 방어하는 카톨릭의 몇 가지 텍스트가 있다, 이에 대해 개신교는 다음과 같이 대응 한다. 로마 카톨릭은 교황의 무오성을 지지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 16:18)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결코 교황 무오성을 지지하지 않는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이 반석”이라고 말했을 때에 그것이 베드로를 지칭한다고 보지 않는다.

(1) 마태복음(16:18)에서 베드로가 언급될 때마다 베드로는 늘 2인칭이다. 그러나 이 반석은 3인칭이다.
(2) 베드로(“Petros”)는 남성 단수 명사(a masculine singular term)이다. 반면에 반석(rock, Petra)은 여성 단수 명사(feminine singular)다.
(3) 더욱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준 권위(마 16:18)는 후에 모든 사도(마 18:18)들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4) 어떤 카톨릭 주석가도 오직 한사람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막 8:33)라고 꾸짖으셨다고 베드로를 악(惡)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최고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으로 보지않는다.
(5)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354-430)은 ‘내가 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여기서 반석(the Rock, Petra)은 그리스도이다. 베드로는 그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했다.

둘째, 설령 베드로가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이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에 의해 언급된 반석이라 할지라도 많은 초기 교부들이 지적한 것처럼 베드로가 교회의 유일한 반석은 아니다. 요한 칼빈은 “천국은 복음의 교리로 우리에게 열려있으므로 ”열쇠“라는 단어는 은유라고 하였다.

셋째, 신약 성경에 있어서 베드로의 역할은 그가 사도 가운데 특별한 권위를 받았다는 카톨릭의 권위와 거리가 멀다.

① 비록 오순절날 주도적 설교를 하였으나 베드로는 가장 뛰어난 사도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고후 21:11).
② 바울은(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 보다 자기가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후 12:11)고 주장한다.
③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바울은 게바를 면책하였다(갈 2:11-14). 베드로가 최고 권위를 가진 무오한 교황이라면 감히 사도 바울이 이런 책망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④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미션에서 베드로는 여기서 요한보다 더 우월한 사도로 인정되지 않았다(행 8:4-13).
⑤ 베드로가 만일 하나님이 인정한 가장 탁월한 사도였다면 사도행전이 베드로보다 오히려 사도 바울의 사역에 더 주목하는 것이 이상하다. 베드로는 오직 사도행전 1-12장에 나타난 반면 바울은 사도행전 13-28장에 걸쳐 나타난다.
⑥ 예루살렘 첫 공의회의 경우, 베드로보다 야고보가 더 예루살렘 교회 최고 지도자로 나타난다(행 15장)
⑦ 베드로는 자신을 “무오한 권위를 부여받은 교황”이라 소개하지 않고 스스로 ‘나도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 소개할 뿐이다(벧전 5:1-2).

넷째, 초기 교회는 베드로의 역할을 이해했으나 베드로가 무오성을 가졌다는 어떤 결정적인 언급이 없다. “무오”라는 단어는 결코 신약에 나타나지도 않는다(요 10:35,마 5:18절 참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소유했던 사도적 능력이 무엇이든 명백히 그것들은 그들의 사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참조 행 1:22, 고전 9:1, 15:5-8). 따라서 교황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사도적 승계는 진실이 아니다. 사도적 능력과 교황 교리는 연결 고리가 없다.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라는 증거도 없다. 오히려 성경이 감독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볼 때 보편 교회는 교황이 아닌 바울 사도를 이은 리너스(Linus, 67-79), 클레멘트 1세(91-100, 3대) 등을 따라 감독들의 시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감독이 아닌 실질적 교황다운 교황이 나타난 것은 58대 로마 교회 감독 그레고리 1세(590-604)때 였고 104대 교황 니콜라 1세(858-867)는 드디어 오늘날 우리가 교황에게서 보는 왕관을 쓴다. 초대 교회 베드로는 당연히 그런 왕관을 썼을 리가 없다. 니콜라는 교황답지 않게 문서 위조에 아주 능한 자였다. 이때부터 교회는 라틴어도 모르는 자들이 교황이 되는 가하면 돈으로 성직을 사며 음란함과 살인 등이 이어진 믿음 보다 음산한 정치 소굴의 냄새를 풍기게 된다. 물론 우리 정치인들 모두가 그렇지는 않듯 모든 교황이 그런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말 것. 그렇더라도 어두운 교회의 모습은 인간이 견디기에는 그리 짧지 않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1천년 가까이 지속된다.

최종적으로 요한복음 21:15-17(“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이 베드로가 무오의 권위를 받았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그렇지 않다! 심각할 정도로 지나친 주장이다. 이 말씀이 베드로에게 주었든 다른 모든 사도들에게 주었든 이것은 무오한 권위에 대한 구절이 아니다. 만일 베드로가 교황으로 무오하다면 사도 바울의 게바(베드로) 책망은 심각한 잘못이다(갈 2:11). 은혜 시대 하나님의 대리자는 베드로 교황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는 성령 하나님인 것이다.

교황 무오성의 신학적 문제점

1) 이단적 교황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수많은 신학적 이단 성향을 가졌던 교황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표적 인물로 69대 교황 호노리우스(Pope Honorius, 주후 625-638)는 제 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정죄를 받았다. 이에 따라 79대 교황 레오 2세(Leo, 682-683)는 교황 호노리우스를 이단 정죄 파문한다.

교황은 단지 (1)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목자요 교사로서 그가 공적 충만함으로 말할 때 (2)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최고의 사도적 권위에 비추어 말할 때 (3) 믿음과 도덕의 교리에 한정할 때 (4) 모두에 의해 분명히 믿어지는 교리를 이야기 할 때 (5) 그가 분명 진정한 교황일 때(경쟁적 교황과 반대의 의미로) (6) 그의 결정이 공의회에 의해 인준되어 졌을 때라고 볼 때, 교황이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사후 파문한 것이나 그 유명한 천문물리학자 갈릴레오를 파문할 때 호노리우스처럼 이단적 내용을 가르칠 때 무오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교황들이 정말 무오하게 행했다는 주장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교황 무오설의 역사적 문제점

1) 안티 교황들의 문제(The Problem of the Anti-Popes)
교회사적으로 35명의 안티 로마 교황들이 있었다. 서로 무오하고 적대적인 입장을 가진 두 교황들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진정한 교황인가의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예를 들면 우르반 6세(1378-1389)와 클레멘트 7세(1378-1394) 그리고 새로운 교황 알렉산더 5세(1409-1410)으 역사적 갈등을 보라!

2) 카톨릭의 갈릴레오(1564-1642) 파문 사건

카톨릭 역사상 가장 당황스러운 문제 중 하나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파문과 출교는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와 교황 우르반 8세(1623-1644)때 일어났다. 하늘을 관찰하기 위해 망원경을 사용하여 천체를 연구하던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주장에 동조하면서 지구가 아닌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라 주장하면서 태양의 흑점에 대한 글을 발표하면서 촉발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1616년 로마 카톨릭에 의해 이미 정죄된 인물이었다. 갈릴레오 파문과 출교는 단순한 과학적 사실 문제가 아니라 카톨릭 역사상 정치와 과학이 아주 복잡하게 얼켜있던 사안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과학자, 제수이트, 도미니칸 그리고 세 명의 교황(바울 5세, 그레고리 15세, 우르반 3세)이 복잡한 충돌의 배역 인물들이었다. 교황 우르반 8세는 갈릴레이가 플로렌스로 돌아오도록 허락하고 갈릴레이는 거기서 1642년 사망 때까지 머물렀다. 수세기가 지난 후,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학의 교황 아카데미에서 “믿음과 과학과 갈릴레이”라는 언급을 통해 모든 에피소드 재조사를 요구한다.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와 과학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하면서 “갈릴레이는 교회의 분파로부터 고통당하였다”고 주장하게 된다. 교황 바울 5세와 우르반 3세는 모두 반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다. 그들의 선포는 교황의 무오한 권위가 아니었다, 로마 카톨릭은 종교재판에 의한 갈릴레이의 정죄는 교회의 무오성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교황이 교황의 권위로 내린 믿음과 도덕의 문제가 아니므로 무오성 문제와는 관련 없다는 식이다. 결국, 후회스럽고 우둔한 결정이기는 하나 교황에 의한 오류는 없다고 카톨릭 변증가들은 정리하였다.

나가면서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공통적 신조와 교회적 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두 교회 사이에는 심각한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권위의 문제다. 카톨릭이 가르치는 교황 무오의 권위는 계시로서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신앙 기본 원리와 완전 배치된다. 카톨릭과 개신교가 모두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믿는 반면, 개신교는 교회나 교황이 성경을 실수 없이 해석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우리 인생이 무엇인가? 아무리 잘난척 해보아야 흉악한 죄인이요 잠간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하다(약 4:14). 카톨릭은 이제 교황 권위를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조용히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참조: Norman L. Geisler and Ralphe E. MacKenzie/ Roman Catholics and Evangelicals/ Baker Book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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