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 교계단체가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기자들이 한국교회의 부정적 현상에 대해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한국교회가 뼈아프게 들어야 할 대목이다. 응답자의 90%가 한국교회 분열의 가장 큰 이유를 지도자들의 명예와 욕심, 공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시도 때문이라 지적한 것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기자들은 한국교회의 연합이 잘 안 되는 이유에 대해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의 부재’ 때문이라 지적했고, 한국교회 연합의 가장 큰 걸림돌을 교권과 명예에 대한 ‘지도자들의 욕심’이라 답해 한국교회 지도자의 문제가 심각함을 엿보게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분열되고, 갈등을 겪는 가장 큰 이유가 지도자들의 문제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도자들 때문에 교회가 갈라지고, 지도자들 때문에 개신교가 하나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한국교회는 이미 노화되고 고령화되어 6.13지방선거에서 보듯 그와 마찬가지로 어느 특정정당과 같은 이미지로 한국교회의 가장 큰 고민은 젊은 다음세대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고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올드보이》(Old Boy)는 박찬욱 감독이 2003년에 찍은 영화다. 이유도 모른 채 15년을 갇혀 지낸 남자가 자신이 감금된 이유를 알아내는 과정을 그렸다. 이처럼 기존세대에서 10년 이상 차이가 나며 소통이 되지않고 단절되는 세대를 가리켜 일명 ‘올드보이’라고 부른다.
한국교회의 문제중에 일부를 제외하고 후유증도 따지고 보면 일선 교회나 목회자, 교인들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결국 연합기관의 사분오열 사태도 ‘지도자들의 문제’라 말할 수 밖에 없다.
교계에서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만들어지면 역할의 성격과 상관없이 정치적 수완이나 전직 경력이 화려한 정치꾼들과 노인들이 제일 앞줄의 감투를 차지한다. 나이와 교단 순에 의해 위계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은퇴한 70대 노인이 지시하고 50, 60대는 애 취급받으며 움직이는 시스템이 된다.
몇 년 동안 그렇게 회의하고 밥먹고 모여서 한 일이 생산적이고 영향력 있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나 감투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고 패거리를 늘리는 일이었다. 이렇게 지도자들이 문제를 만들었고, 지도자들이 문제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교계 기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의 부재가 오늘의 사태를 초래했다는 말이다.
지도자는 연예인이 아니고, 지도력은 장식물이 아니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 자체가 목적이지만, 지도자는 현실을 타개하고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지도력을 사용한다. 이런 지도력은 평상시에 단련돼 실전(實戰)에서 빛나고 결과로 평가받는다.
러시아 월드컵에서 보듯 지도력이 장식물이 되면, 평상시 의전(儀典)에는 강해도 실전에서는 오합지졸 약한 군대가 되기 십상이다. 실전에 강한 군대의 의전은 소박하다. 겉치레가 아무리 화려해도 지도자로서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하는 지도력은 허상(虛像)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마음은 ‘연합기관’을 떠나 있는 듯하다. 분열과 갈등, 허송세월 10년이다. 이쯤되면 부부싸움에 집나간 자식 돌아오게 하듯 지도자들이 ‘연합’에 진정성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연합하지 못하면 연합기관 간판내리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한목협의 성명처럼 ‘더 이상은 안된다’는 절박한 외침이 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애써 외면할 것이 아니라 이른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겸허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머리를 맞대고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살길이 있다.
‘교단 연합기관’들의 통합논의가 몇 년째 매주 기사화 된다. 교계 연합기관들을 언론에서는 관심을 가지고 비중 있게 보도해 준다. 지리멸렬한 연합기관이 한국교회의 구심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분열의 연장이었다.
이런 관심밖의 잊혀진 연합기관의 행사를 보면 마음이 짠할 때가 많다. 살아온 경험에서 비롯된 이들의 교회와 시대를 향한 고민과 걱정이 왜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는다. 왜 이들은 자신들끼리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를까?
'한국교회를 대표하겠다'는 이런 여러 연합기관들을 보면 20명 가까운 공동회장들이 60대 중반에서 70대다. 총회장을 역임하고 물러났거나 아니면 은퇴한 분들이 모여 이런 역할을 하기에는 이미 올드하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이런 인적 구성의 기구는 '연합운동은 늙은 정치꾼 올드보이들의 전유물인가'라는 인상을 또 한 번 주게 된다. 이런 기구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얼마나 할지 모르나 이미 굳어버린 이런 경로당 이미지와 사고로 인해 그 폭(幅)을 좁히는 손실이 더 크다.
차라리 저분들이 나서서 아끼는 후배나 제자들을 설득해 이런 기구를 운영하게 한다면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걸어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기업이나 어떤 조직도 젊은 세대를 공급받지 못하거나 길러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지난 시절 어떤 기관의 대표회장은 소위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해 열심이었다. 교단을 만들기도 하고 10년 이상을 총회장과 대표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 자리가 '벼슬'처럼 되고 ‘총회장’이 직업이 되었다. 그 단체 구성원들도 그와 함께 덩달아 늙었고 수는 줄어들었다. 이렇게 되면 한국교회가 세상 흐름과 감각을 따라잡는 게 어려워진다.
아무리 명분이 뛰어나고 인품, 신망이 뛰어나도 조직이 망하면 그는 최악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이런 이치를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조금 젊다고 하는 60대도 마찬가지이다. 호랑이 사라진 골목에 토끼가 왕노릇한다고 막상 본인들이 60대에 들어서면 매스컴에 소개되는 조직을 만들어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에 주력한다. 정책이나 경륜과 상관없이 인물위주의 이벤트라는 이미 선배 ‘올드보이’들이 했던 그 코스를 그대로 답습한다. 그래서 또 다시 ‘올드보이’의 시대를 만든다.
늙은 교회는 젊은이들을 품지 못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 밖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일에 충분하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는 언제까지 장기적 정책 대안은 없이 1년직 자리나 인물중심의 ‘올드보이들’의 전성시대인가?
그래서인지 혼돈의 시대에 한국교회의 역할은 더욱 요구되지만, 현실에서 교회는 더욱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교회, 변화할 것인가? 변신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진정 걱정을 한다면 정책 아젠다를 개발하고 후배들을 키우고 그들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한다. 50대 대표, 40대 총무와 사무총장이라는 인적쇄신은 불가능한 것인가? 교단이든 기관이든 같은 자리를 세 번이상 역임했으면 그는 이미 원로다. 자신은 뒤에서 경제적·정신적으로 지원하고 조직은 또 다른 세상의 변화와 함께 가야 성공할 수 있다. 아마 이런 글을 읽으면서 감정이 상하고 화가 나며 열을 많이 받으신다면 정말 죄송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사고(思考)의 올드보이’이다. 한국교회를 아우르는 유연성도, 사회변화를 읽고 받아 드리는 수용성도 떨어지니 그것이 그 수준이자 한국교회의 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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