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의 토양 알렉산드리아
영지주의는 초대교회 이후 교회를 위협해온 이단적 신학이다. 비록 성경에 노골적인 영지주의나 영지주의자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지는 않으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바울은 영지주의를 분명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영지주의의 주장에 대한 초대교회의 원사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교회가 원자료 없이 이레니우스(약 125-약 202), 터툴리안 등이 비판한 영지주의에 대한 내용을 주로 참고해 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알려지고 있는 이레니우스가 약 180-189년 사이에 썼다고 알려져 있는 <이단 논박>의 본래 이름도 <거짓 영지주의에 대한 폭로와 논박>이었다.
그런 가운데 1945년 12월 이집트 중부 룩소르 북쪽으로 80킬로미터 가량 떨어져있는 인구 3만의 도시 나그 함마디(Nag Hammadi)에서 한 아랍 농부에 의해 단지에 밀봉되어 있던 가죽 장정 파피루스 사본 13권이 발견된다. 놀랍게도 이들 사본은 대부분 영지주의 관련 문헌들을 담고 있었다. 이들 문서는 영지주의적 금서를 소유하는 것이 이단으로 공격받던 상황에서 파코미우스 수도원 가까이의 수도사에 의해 숨겨진 문서들로 여겨진다.
문서의 내용은 콥트어로 쓰여 있었다. 하지만 모든 문헌은 본래 헬라어로 작성된 문헌을 번역한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 유명한 영지주의 문헌은 <도마 복음서>였다. 이것은 나그함마디 파피루스에 담긴 문헌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필사본이었다. 이외에도 <빌립 복음>, <베드로 복음>, <베드로 묵시록>, <요한 외경> 등과 창세기 초반부에 대해 성경과는 전혀 다른 뱀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진리의 복음> 등이 있었다. 이들 문헌들은 1952년 대부분(12권)은 카이로의 콥틱박물관에 소장되고 나머지(13번째 사본)는 취리히 금고로 보내졌다.
나그 함마디 문서를 통해 초대교회의 중심도시들(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로마) 가운데 알렉산드리아가 영지주의의 핵심 도시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리겐의 고향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저명한 영지주의 이단자 발렌티누스(Valentinus)의 고향이기도 했다.
영지주의에 대한 오리겐의 비판
성경에 대해 필로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택한 발렌티누스의 영지주의는 여러 분파를 만들어내면서 기독교에 다양하게 침투하기 시작했다.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지성적 위협을 가하던 시기에 오리겐은 영지주의에 대해 철저한 반대 입장을 취한다. 당시 필로의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에 우호적이었던 오리겐이 같은 우화적 해석을 택한 영지주의를 배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지주의와 성경적 기독교는 여러 면에서 신학적 충돌을 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창조론과 기독론과 구원론이었다. 먼저 영지주의는 성경적 창조론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오리겐은 이단자들(영지주의자들을 말함)이 믿는 창조주 데미우르게(demiurge, 조물주)는 불완전하고 선한 존재가 아니라 말한다. 당연히 그들에게는 더 완전한 하나님이 존재해야만 했다. 발렌티누스에 의하면 다양한 조물주가 있다. 플레로마(Pleroma)의 세계에는 30개의 아이온(aeon)이 있으며 소피아는 가장 낮은 아이온이다. 그렇다면 악이 만연하는 세상은 수준 낮은 아이온이 만든 세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세상을 만든 조물주가 바로 데미우르게인 것이다. 유대교 카발라에서 말하는 아인 호프는 아마 최고 수준의 창조주가 될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단숨에 악의 문제를 극복한다. 즉 이 같은 신비로운 지식을 바로 아는 것이 곧 영지요 구원인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의 “칭의론”과 전혀 다른 영지주의의 구원론을 볼 수 있다.
영지주의는 성경적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는 거부하는 반면 그리스도는 표면적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창조와 악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처럼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다른 방법으로 해석한다. 신령한 지식으로 구원 받는 영지주의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교리가 바로 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영지주의는 십자가 중심의 성경적 기독론과도 전혀 다른 길을 주장하였다. 영지주의가 얼마나 기독교 교리와 대립하는 주장을 펴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오리겐은 이 같은 조물주 데미우르게를 내세우는 영지주의자들을 향해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을 저버린 망상가들이라고 말한다. 육체는 더러운 것이 아니다. 오리겐은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도 인간의 더러운 육체가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육체를 창조하신 분이 육체를 변형시켜 부활시킨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오리겐이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육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육체는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듯 더러운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흙이 된 인간을 부활시키고자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육체를 취하여 내려오셨다.
오리겐은 영지주의자들이 이 같은 오류에 빠지게 된 이유는 성경을 영적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성경은 인간의 작품이 아닌 만물의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 진 책이다. 따라서 그에 맞는 해석법이 있어야 한다. 이 신비한 구원 경륜(oikonomia)은 현명하고 겸손한 사람들도 알기가 쉽지 않다. 바울에게 주어진 은총과 같은 특별한 것이 필요한 것이다. 비록 오리겐이 성경으로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성경해석 방법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나 그가 알레고리적 해석 방식으로 나아가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과가 어떻든 헬라 철학에 능한 오리겐이 영지주의를 반대했다는 것은 그가 당시 신앙의 편에 굳건히 서 있었음을 보여준다.
미숙한 성경 해석(신학 개척) 시대의 신학자 오리겐의 한계와 공과
본격적인 신학의 연구 전통이 없던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분명 제한적이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초대교회 영지주의가 기독교를 위협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그렇다고 이단 사상을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바울이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단 사상을 경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도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누군가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으나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열정적인 오리겐도 당연히 미숙한 인간이었다. 그의 신학이 그의 열정과 달리 성경을 이탈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창조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시대를 앞서 교리를 정립하고 신학의 첫 길을 닦는 작업을 선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오리겐은 정말 실패한 신학자였던 것일까? 하나님은 말씀을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한 것처럼 하나님의 신학자들도 큰 오류 없이 성경 해석의 길을 닦도록 왜 인도하시지 않은 것일까? 오리겐은 단순히 시대를 앞선 신학적 저서를 집필한 부족한 면이 많은 신학적 진술에 그친 미숙한 신학자인가? 왜 하나님은 더 나은 신학자를 초대교회부터 보내주시지 않은 것일까? 우리가 그 이유를 공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물을 수는 있으나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여전히 미숙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리겐은 본문 주해와 주석을 쓴 최초 기독교 성경학자요 교의학의 최초 작품을 쓴 학자요 <켈수스 반박>을 통해 초기 기독교 변증을 이끌었고 창조 신앙에 있어서도 성경적 교리를 구축하려고 노력한 학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54년 경 순교한 이후 약 300년 후인 제 5차 종교회의(553)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몰수되어 버렸다. 이 때 오리겐의 모든 저작들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의 작품들이 몰수되었기에 오늘날 그가 썼다고 알려진 책들이 정말 그가 쓴 원본과 다름이 없는 지도 불분명하다. 사람들은 오리겐의 작품이 분명한지 아니면 후세 인물들이 얼마나 가감했는지 검증 없이 그를 정죄한 편견을 가지고 그를 다루고 있다. 필자 또한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또한 그가 만일 순교 당하지 않고 신학적 연구에 매진하였다면 어떤 학문적 발전과 수정을 이루었을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아쉽다. 하지만 그가 초기 기독교 학자로서 기독교를 강력히 위협하던 영지주의 사상을 부인하는데 앞장서고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 pastripassianism), 양태론(樣態論), 아리우스주의와 같은 이단적 사상에 빠지지 않도록 신학적 통로를 제공한 것은 분명한 공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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