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여태까지 역사적 예수는 주로 전통교회와 신학에서 대속자, 구속주의 관점에서 다루어졌다. 이는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 하나님의 말씀인 나사렛 예수의 역사와 인류와 우주를 향한 핵심적인 역할을 강조해왔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전통교회는 구세주와 대속자이신 예수의 초자연적 모습을 강조에 치중함으로써 그가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섬기는 모습에 대하여는 크게 부각하지 아니한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본 연구에서 복음서를 중심으로 나타난 나사렛 예수의 섬기는 자로서의 모습을 그려내려고 한다. 그리스도 교회가 대속자요 구세주인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그 분이 세상과 이웃을 위한 진정한 섬기는 자로는 사실은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하여 소금이요 빛이요 섬기는 자로서만 그 진정한 사명을 다할 수 있다는 신학적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나사렛 예수의 이러한 섬기는 자로서의 모습은 진정한 지도자란 오늘날 지도자의 리더십에 관심이 고조되는 때에 진정한 지도자란 자신을 내세우는 자가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함을 우리들에게 교훈해주는 것이다.
I. 하나님 나라 도래의 지평으로 예수의 섬김: 하나님 나라 전파
이웃과 세상 섬김은 나사렛 예수의 사역의 핵심이다. 예수의 삶 자체가 모두 섬김으로 특징화 된다. 예수는 그의 전 삶을 통하여 섬김의 모범을 부여주셨다. 그는 이 세상을 향하여 일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섬김의 사역을 실천하셨다. 예수의 섬김은 설교와 가르침과 치유 사역으로 나타났다. 설교와 가르침과 치유사역은 예수의 3대 섬김의 사역이었다. 예수의 섬김사역은 영, 마음과 신체를 보존하고 함양하고 그 질병을 치유하는 전인적 섬김사역(the wholistic serving ministry)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사역이 끝나자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자기 사역을 시작하신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예수는 그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단지 복음의 선포로서 알렸을 뿐만 아니라 가르치심과 더불어 섬기는 그의 메시아적 사역을 통하여 증언하셨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섬김의 삶이었다.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의 말씀을 펴 읽어시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자신의 섬기는 사역의 의미를 말씀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의 섬기는 사역은 그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지평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 아들의 오심이란 수직적 차원의 성자의 겸허한 자기 비움에서 도래했으나 이것은 수평적 차원으로는 사회적으로 소외자들에 대한 섬김이라는 가시적인 모습이란 표징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가난한 자를 위한 섬김이요, 포로된 자의 자유, 눈먼 자의 보게함, 눌린 자의 해방이라는 섬김이다.
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메시아가 당신이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하나님 나라 도래를 위한 그의 섬기는 사역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구현하는 메시아의 사역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자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치유함을 받으며, 청각장애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는 것인데 이러한 사역을 하는 섬기는 자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것이다. 예수의 섬기는 사역은 질병의 치유와 복음의 전파만이 아니라 초자연적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냄으로 나타났다. 그의 귀신 추방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도래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예수는 그의 귀신 쫓아냄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 나라 도래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자연적으로 어느 미래 시점에 우주진화적 과정으로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섬김 사역 가운데서 이미 그 징표로서 현재한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미래에서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사렛 예수의 권능의 섬김, 병자,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절망에 빠진자, 각종 질병에 의하여 고통받고 있는 자들, 귀신들려 정신이 이상하게 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권능적 치유의 섬김 속에서 이미 도래하여 현재하고 있다. 예수의 섬김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능적 도래가 현재하고 있는 점에서 그의 섬김은 단지 구약적 예언자의 섬김과는 달리 예언자들이 증언한 하나님이 보내실 그 사람, 메시아의 섬김이다.
II. 하나님 나라 비밀에 대한 가르침의 섬김
예수는 갈릴리 호수 인근의 산에서 설교하시고 가르치셨다. 이 산은 팔복산이라고 하고 이 산에서 한 설교를 산상설교(Sermo Montanus, Sermon on the Mount, Bergpredigt, 마 5장-7장; 눅 6: 17-49)라고 한다. 산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임재하시는 장소로서, 호렙산에서는 모세에게 그 이름을 계시하시고 시내산에서는 그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는 장소이다. 마태는 산상에서 설교하시고 가르치시는 예수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 5:1). 예수께서 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이들에게 설교하시고 가르치기에 적합한 곳에 올라가셔서 앉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설교하시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주로 회당에서 그리고 들판이나 산에서 설교하시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마 13장)로 설교하신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가라지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밭에 감추어진 보물과 값진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 등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마 5장-7장)를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밤새 기도하시고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신다"(요 8:2). 예수는 자신이 세상의 빛(요 8:12-20)이라는 것, 높임 받으심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길(요 8:21-28), 진정한 자유(요 8:30-36), 아브라함과 마귀의 자녀(요 8:17-47), 자신과 아브라함(요 8:48-59)에 관해 가르치신다.
산상설교에 나타나는 사랑과 정의가 균형잡힌 예수의 사상은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타당하다. 오늘날 21세기 인류를 위협하고 있으며, 인류를 파멸의 위험으로 몰아가고 있는 핵무기 증강과 이슬람 극단주의 IS의 전쟁과 살상(殺傷) 등 폭력적 방법이 아닌 가난한 마음, 온유, 인간애 등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법 집행과 처벌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가 천국의 질서인 것처럼 오늘날 시대에도 산상설교의 온유와 자기 비움과 사랑과 정의의 정신은 그대로 통용될 수 있다.
III. 섬김의 모범자로서의 예수
1. 원봉사자 예수
나사렛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인간을 섬기고 구속하기 위하여 오셨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교만, 권력의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므로 범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 원죄란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자 하며 자기 권력의지의 종이 되어 하나님에 대항하고 타인과 세계를 지배하고자 함에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어거스틴이 말한 바 같이 겸허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겸허는 삼위일체의 이위(二位)이신 성자의 지위를 버리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신분으로서 종이 되어 죄인을 구원하시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에 있다. 예수는 병든 자를 고치시며, 소외된 자를 받아들이며, 죄인과 세리의 친구이시고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섬김의 삶을 사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디아코노스(Diakonos)로서 그의 삶 자체가 봉사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봉사자"(Urdiakon)이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거처에 계실 때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에 대한 서열(序列)다툼을 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는 섬김의 정신을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예수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막 9:36) 제자들에게 이르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여기서 예수는 이웃을 다스리는 권력의지가 아니라 섬기는 자의 태도를 가르치고 계신다.
예수의 제자 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직도 옛 삶과 목표에 사로 잡혀 자기들의 보상(報償)을 이 땅 위에서 받기를 기대하는 대신에 하늘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예수에게 요청한다(막 8:37-38; 막 13:26):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이 요구에 대하여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고난의 용광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 의식을 섬김의 종, 고난의 종으로 이해하신 것을 우리는 여기서 파악할 수 있다. 예수는 죄에 빠진 인간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몸소 마시려고 하신다(참조, 시 75:8; 렘 25:15-16; 합 2:10). 그리고 예수는 인간들의 죄에 대한 벌로 받아야 할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자 하신다.
다른 열 제자가 이를 듣고 분히 여긴다. 제자들 중에 서로 크다고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을 마가는 다음같이 전해준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 마태도 거의 비슷한 예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 26-27). 누가도 이와 비숫한 뜻의 예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준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5-27).
예수는 자신을 임금이나 집권자나 고관과 같이 생각하시지 아니하셨다. 예수는 이들처럼 사람들 가운데서 권세를 부리지 아니하셨다. 예수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세속적 가치(價値)의 전도(顚倒)를 가르치신다. 예수는 섬기는 자가 진정하게 다스릴 수 있으며, 낮아지는 자가 진정하게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자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는 가르치신대로 낮아지셨고, 종이 되셨고, 섬겼고, 대속물이 되셔서 자신의 생명까지 속량물로 주셨다. 이러한 예수의 생애는 섬김의 생애였다. 섬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 하나님을 반역하는 인간에 대한 섬김의 생애였다.
2. 섬김의 명령을 주신 나사렛 예수
예수는 유월절 전에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제자들에게 다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신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요 13:4-5).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를 본받아 섬기는 삶을 살아라고 교훈하신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 13-16).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오늘날 우리는 그분을 본받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권세 있는 자 또는 부유한 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는 최후의 심판 때 우리의 섬기는 행실을 따지실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주님은 나그네를 영접하고 벗은 자를 입히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목마를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자를 심방하며, 옥에 갇힌 자를 심방하라고 가르치신다(마 25:35-39). 진정한 섬김이란 대가가 주어지는 권세 있고 부유하고 큰 자를 섬김이 아니라 대가보다는 희생이 있어야 하는 지극히 작은 소자를 섬김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자신을 지극히 작은 소자와 동일시 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b).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 45b).
3. 전인(全人)적 치유로서의 섬김
1) 영혼, 마음, 신체의 치유로서의 섬김
예수의 복음사역은 죄지은 자와 마귀에게 짓눌린 자를 해방하는 영적 사역만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어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섬김이었다. 예수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했으며 그리고 신체에 질병을 가진 자들을 치유하고 소외된 자들을 공동체에 복귀시키고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소망을 주었다. 예수의 복음사역은 전인적인 구원의 사역이었다. 봉사란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실천하신 영혼, 마음, 신체 모두를 포괄하는 전인적 구원 활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 봉사는 전인적 섬김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한다.
첫째, 예수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는 잔치 식사를 자주 했는데 이때 제자들과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였다. 잔치 식사는 종종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를 상징한다(마 8:11; 눅 14:16-24; 눅 15:20-24; 사 25:6-8). 여기서 소위 자칭 의인(義人)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특권들의 비난이 일어난다(눅 15:25-32). 이들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의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들은 용서 받은 죄인들과 더불어 나누는 예수의 식탁교제로부터 스스로를 배제하는 위험에 빠진다.
여리고에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눅 19:2)가 있었다. 그가 여리고를 지나가는 예수를 보고자 하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 키가 작아 뽕나무 위에 올라가간다. 예수는 나무 위에 있는 그를 보시고 그를 부르신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삭개오는 예수를 영접한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여리고 지역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그 지역 내 전체 세관에 대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바리새인들은 그러한 부패한 세리장을 인정하고 그 집에 유하고자 한 예수를 비난하였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 19:7).
그러나 예수는 다음 같이 서약하고 회개하는 삭개오의 내면을 보셨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는 비록 비난받는 세리직에 있었으나 서민들의 재산을 속여 착취한 것은 없는 정직한 세리였다.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며,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표명함으로써 이미 그 마음은 가난한 천국의 시민이 되었다. 예수는 그 마음에 이미 메시아를 영접한 삭개오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말하신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그리고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 예수 사역의 일차적인 것은 영혼의 구속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바른 관계의 회복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체의 치유와 이웃과의 바른 관계로서 나타난다. 사도 요한은 다음 같이 증언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된 것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그리고 영혼의 구원은 그 열매로서 이웃에 대한 봉사로 나타난다. 칭의는 삶의 변화와 거룩한 삶이라는 성화의 열매로 나타난다.
둘째, 내면적인 질병과 고뇌를 치유하셨다. 귀신 들림은 내면적인 질환으로 귀신이 인간의 정신을 점령하여 마비시키는 내면적 질환이다. 복음서 저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가버나움 회당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 명하여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의 정신을 온전하게 하신다(막 1:21-39; 눅 4:31-36; 마 8:14-17). 예수는 거라사의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신다. 군대 귀신이란 여러 명의 귀신들이 강한 세력을 이루는 귀신 군단을 말한다. 군대 귀신이 추방되자 거라사인의 정신은 온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예수와 함께 있기를 원하나 예수는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향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시고 그를 집으로 돌려 보내신다(막 5:1-20; 마 8:28-34; 눅 8:26-38). 두로 지경에서 예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로부터 귀신을 추방하신다(막 7:29-30). 그리고 예수는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지는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신다(막 9:14-29).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종교적인 갈등을 가지고 찾아온 니고데모의 내면의 문제에 대하여 중생의 도리를 가르침으로 해결해주신다(요 3:1-21). 그리고 사마리아 수가 성(城)의 여인이 가진 인생의 전정한 가치와 삶의 의미에 관하여 "생수"라는 용어를 가져다 여인에게 비유로 설명하신다. 예수는 내면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을 가르치시고 그녀에게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려주신다(요 4: 1-42). 그리고 예수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체포 시 자신을 부인하고 배반한 수제자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인격적으로 물으시고 그의 신앙을 다시 확인하시고 그를 복권(復權)시키시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신다(요 21:15-23).
세째, 신체적인 질병을 치료하셨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막 1:42),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뚫고 침상채 달아내리운 중풍병자를 고치신다(막 2:12).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마른 자를 고치신다(막 3:5). 그리고 갈릴리, 유대, 예루살렘, 아두매, 요단강 건너편과 두로와 시돈에서 온 많은 병자들이 몰려온다. 예수는 이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추방하신다(막 3:7-12). 예수는 12년 혈루병 여인을 고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된 딸을 죽은 데서 살려내신다(막 5:42). 게네사렛 지방에서 예수는 각종 병자들을 고치신다(막 6:56). 갈릴리 호수 지경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다(막 7:35).
2) 통전적 섬김
영혼 구원과 신체와 지성의 구원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양자는 예수의 전인적 구원사역 안에서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짝을 이룬다. 그것은 신발의 짝이나 안경의 짝 처럼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는 그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구원은 분리된 것, 분열된 것, 파괴된 것을 온전하게 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자기와의 왜곡된 관계, 사회와의 잘못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는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고 그에게 이르신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막 1: 44). 군대귀신 들린 거라사인을 고치시고 그를 집으로 돌려 보내신다. 이는 영혼과 신체에 관련해서 이들이 치유된 것을 알림으로써 이들에게서 있어서 상실된 가족적 사회적 관계가 회복되기를 위한 것이다. 예수는 치유를 통전적으로 이해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 보여주신 섬김이란 영, 마음과 신체를 통합하는 통전적 행위(ganzheitliches Handeln)로서 행해진다. <계속>
글ㅣ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대표/숭실대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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