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무교회주의자로, 조금은 심하게 이단으로 오해 받기도 했던 김교신 선생. 그러나 그는 자신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만 자신을 비워내고 비워 냄으로써 자신이라는 '질그릇' 속에 '보화'를 채우는 것에 전념했던 인물이다. 더불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워 '조선산 기독교'를 토대로 일제강점기 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을 발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도서출판 홍성사가 '김교신 일보' 출판을 기념하면서 19일 저녁 양화진 책방에서 40번째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양현혜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이사)가 "김교신의 일상성 속의 신앙과 예언자적 역사의식"을 주제로 강연을 전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일상성 속의 신앙'
양현혜 교수는 "김교신은 기독교 신앙이란 신과의 살아있는 교제라고 봤다"고 지적하고, "신앙은 신 자신의 생명에 참여해 그가 자신의 정신과 인격을 지배하게 하는 활동 원리였기에, 김교신에게 있어 생활과 신앙은 분리되어서 생각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했다.
또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일상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이해한 김교신 선생이었기에 그는 기독교인이란 중개자 없이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살아있는 관계를 사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때문에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별하는 교회의 계급주의를 반대했다. 더불어 그는 교파주의와 종교적 배타주의, 불관용주의, 율법주의적 성례전주의 등을 반대했다고 한다.
양 교수는 "김교신이 이러한 자신의 신앙을 담아내는 교회 형태로 '무교회'를 선택했다"고 말하고, "성직자와 성례전, 조직이라는 매개없이 성서 강해를 중심으로 한 평신도의 성서 공부라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집회를 운영했다"면서 "그는 기독교인의 생활 그 자체를 부단한 예배 행위로 보고, 모든 활동이 그리스도에 대한 봉헌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김교신과 그의 '성서연구회'에는 예배행위와 일상생활의 구분이 없다. 기독교인들은 모든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 교수는 "김교신은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그리스도와 일치해 그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증거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치열하게 신앙과 생활을 결합시켰던 김교신 선생의 정신적 중심과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양 교수는 "김교신이 그것을 성서 연구에서 구한다"고 설명했다. 무교회주의 운동에서는 성서가 기독교 생활의 중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교신은 성서를 통해 신의 뜻을 이해하고, 신과 대화하는 1:1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봤다. 때문에 그는 신의 살아있는 말씀으로서의 성서 권위를 대단히 중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서 해석은 기본적으로 근본주의나 축자영감설적 성서주의자들과는 달랐다. 그의 성서 연구 방법은 진보적이고, 역사 문헌학적 연구나 래디컬한 학문적 비판의 성과도 받아들였다. 양 교수는 "김교신의 이러한 성서비평에 대한 태도는 '신앙이 신앙으로서 그 권위를 갖는 동안은 성서의 비평, 해부에 의해서 그 기초가 동요할 리 없다'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해 '사실'과 '실존적 진실'을 구별할 것을 주장한 우치무라의 성서해석을 따른 것"이라며 "사실 성서의 경전성은 그 무오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하나님을 증거 하는 성서의 증언 능력에 있는 것"이라 했다.
더불어 김교신 선생에게 성서는 '이해하는 책'이 아니라, '사는 책'이었다. 건전한 마음과 이성을 활용해 과도한 열광주의나 맹신적 축자주의를 배격하며 성서 해석의 객관성을 확보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동시에 성서 말씀에 주체적인 투신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 양 교수는 "김교신에게 기성교회냐 무교회냐는 것은 궁극적으로 신앙과 구원에 있어서 2차적이고 부차적인 문제였다"면서 "그에게는 오직 일상성 속에서 신과 함께 걷는 생활만이 중요할 뿐이었다"고 했다.
김교신의 예언자적 역사의식과 종말론적 희망
양현혜 교수는 "김교신의 '일상성 속의 신앙'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특별히 사회 정치적 영역을 신앙적 책임의 영역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라 설명하고, "그는 기독교인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로서 그러나 세상으로 들어가 세상을 위한 사랑으로 움직이는 신앙을 실천하는 자라고 봤다"고 했다.
때문에 김교신 선생은 정치 사회적인 공적 영역에서 예언자적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양보할 수 없는 신앙적 실천이라 봤으며, 실제로 일제 시대를 '모든 기독교인들의 정의로운 순교가 요구되는 시대'라 보고 자신의 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면서 창시개명 등의 명령은 끝까지 거부했다.
이런 김교신 선생을 일제가 곱게 봤을리가 만무하다. 양 교수에 따르면, 김교신 선생는 일본의 시퍼런 서슬 앞에서 분노와 두려움이 몰려왔을 때, 민족의 앞날에 절망감이 들었을 때, 생활인으로서 곤궁에 처했을 때, 모든 것들을 끈임 없이 절대자 앞에서 비워내며, 종말론적 희망으로 자신을 채우고자 했다고 한다. 김 선생이 정신이 가장 맑고 고요한 시간인 새벽에 기도에 힘쓴 것도 이 때문이었고, 그에게 기도는 성령의 소금으로 자아를 절여 죽이는 일이었다고 한다.
양 교수는 "자신을 비워내고 종말론적 희망을 대신 채움으로써 그는 상황에 관계없이 믿음 안에서 요동하지 않는 안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기독교인의 가장 큰 능력이요 이상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김교신 선생은 대망의 기다림 속에서 오직 '지금 여기'를 살고자 했으며, 양 교수는 "이러한 '일상성 속의 신앙'과 종말론적 희망에 근거한 예언자적 역사의식은 탈세속과 세속으로의 회귀를 가능하게 하는 그의 정치적 실천 철학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양현혜 교수는 "한국 개신교가 사회적 공신력을 잃은 이유는 크게 3가지"라 말하고, ▶거대한 성전 건축과 막대한 신도수를 자랑하며 다대한 프로그램을 돌리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도가 없는 '영적 기업주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앙적 인격도야와 삶에서의 신앙 실천이 없다는 점 ▶신앙을 개인적 삶의 영역에만 한정시키고 공적 사회적 영역에 대한 신앙적 책임을 외면하는 것 등을 꼽았다.
때문에 양 교수는 "시급한 것은 한 사람이라도 기독교인다운 기독교인이 나오게 하고, 하나라도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자기 쇄신 운동"이라 강조하면서, "김교신은 신앙과 삶과 역사가 하나 되는 삼위일체적 신앙을 주장했고 살아낸 사람"이라며 "이러한 때 우리가 김교신을 기억하고 그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이야기 했다.
한편 행사를 주최한 홍성사 측은 김교신에 대해 "기독교가 주는 능력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제대로 누리면서 세상을 살다 갈 수 있는지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뇌하고 증거하다 간 사람"이라 평하고, "당시보다 풍요로워 졌지만 복음은 변질되어 버리고 만 오늘의 한국교회와 한국 기독교인들의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모습에 그는 어떤 처방전을 내릴지 궁금하다"면서 "무교회주의와 성서조선, 일기를 중심으로 김교신의 치열했던 삶과 한국 교회사에 남겨진 그의 자취를 찾아보며, 그가 던진 과제와 물음의 답을 찾아가고자 이번 행사를 열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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