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칼럼] 이제 날씨가 좀 쌀쌀해 졌다. 다문화 센터 앞에는 중학교가 있고 학교 울타리 곁에 울창한 은행나무가 줄을 서 있다.
마침 길을 나서다가 청소하는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수고 하십니다.” 간단한 인사를 하자 그 분에게 전해 오는 말 가을이 오는 것이 “끔찍합니다.” 지금도 이런데 앞으로가 더 끔찍하다는 것이다.
잠시 주고받은 말에서 잎이 나무 가지에 붙어 있을 때는 한참동안 나무를 바라보아도 싫지가 않았는데 이렇게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낙엽을 치우는 일은 고역이란다. 잠시 가을 낙엽에 대한 상념에 젖어 본다.
가을이 점점 깊어 가면서 나무들은 여름내 입고 있었던 녹색의 잎을 바꾸어 떨어질 준비를 하면서 새로운 옷으로 채색을 하게 된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하는 단풍은 녹색 잎의 변심이며 또한 변화이다. 필자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며 “하늘나라는 변화 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또한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다.
아무리 잎이 무성해도 우거짐은 잠시 뿐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단풍은 화려함으로 나무 가지에 결사적으로 매 달려 있으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체념에 젖은 듯 자신이 거름으로 희생 되는 것, 바로 이 희생으로 나무를 튼실하게 부추겨 주고 튼튼하게 키워주고 열매를 맺히게 하는데 일조를 한다. 열매를 맺게 하고 몇 겹의 성을 쌓아서 열매를 보호 한다.
바로 이것이다. 단풍의 아름다움으로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아름다움이 절정으로 변화 되어 지는 순간에 그 모두를 내려놓고 홀연히 떠나는 것, 가을 나뭇잎의 지혜이다.
이시야 선지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영광은 들에 피는 꽃과 같다.” 인생무상을 말하는 것일까. 전도서의 기록을 보자. “천하 모든 일에 때가 있으니”라고 설파했다.
유양업님의 시구를 읊어 본다.
물들여 채색 입 아릿따운 풍경화
가을 맞게 갈아입고 반짝 이네 빨강 분홍 입에 물고
둥지 지켜 노닌 새들 갈 바람 타고 살랑 살랑
춤추며 노래하네 하늘이 솔 솔 그려준
황홀한 색깔 덧입혀 마을 마다 산야다
불이 타네
‘나는 햇빛을 잠시 등 돌리다가 이렇게 땅에 떨어지는 낙엽이 되지만 나는 거름이 되어 다시 태어나리라’라는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하다.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본다 .
마침 집에 도착하니 가족들이 반겨 준다. 손주가 버릇없이 종횡 무진이다. 몇 마디 싫은 말을 건네니 아내의 말 ‘이제 다 접어 두라’고 한다. 논어의 ‘위정’편에는 공자의 간단명료한 이력서가 기록 되어 있다.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목표를 세웠고, 40세에 유혹에 빠지지 않았으며 50세에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었으며, 60세에 듣는 대로 깨달았으며 70세가 되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사람은 늙어 갈수록 완숙해 진다는 뜻이요, 동시에 사람은 자기완성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리라.
정녕 깨끗하게 늙어 간다는 것은 향기로운 일이다. 그러니 만큼 세상만사에 참견이나 하고 넋두리나 반복하며 사는 추한 노인이 아니라 인생 마무리를 잘 구상해 본다. 낙엽의 인생이 되어 보리라고 다짐해 본다.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자기 소유에 집착한다. 명예나 재물, 심지어 지위나 업적에 대해서 마저 사람은 내려놓기를 망설인다.
그러나 자기 소유에 지치리만치 집착 할 때 사람은 그 마지막을 향기롭게 마치지 못 할 때가 많다. 지금 한국교회 곳곳에서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가을의 변화를 꿈꾸어 본다. 변화의 계절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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