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의 분단상황은 북한과 남한사회에 ‘군사독재’라는 철의 통치를 선물해주었다. 이후 산업화를 겪으며 남북한 민중들의 삶 속에 투영된 군사문화는 북한에서는 주체사상, 남한에서는 권위주의와 냉전적 자유주의로 나타나게 된다. 후기 분단체제란 2010년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추진된 이명박 보수정부의 등장과 김정은 3대 세습정권의 출범을 배경으로 나타난 후기의 분단상황과 이를 기초로 나타난 환경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전보다 구체적이고 유형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먼저 북한에서는 2012년 4월 김정은의 3대 세습 이후 2012년 4월 헌법의 개정으로 ‘핵보유국’을 명시한데 이어 2013년 3월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의 채택으로 주체사상의 완결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북핵을 저지하려는 한반도 주변국들과 국제사회의 관심을 무력화시켰고, 미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라는 대북한 무관심 전략을 지속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2013년 11월 북한 내에서도 13개 지방급 경제특구를 발표하는 등 남북교류 없는 자생적 분단 경제체제를 만들어가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후기 분단체제의 일상화는 남한 내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오랜 군사문화와 권위주의가 낳은 냉전적 자유주의는 전쟁에 대한 위협과 공포를 일상화시키며 2014년 10월 ‘전작권 환수 재연기’와 2015년 6월 ‘사드(THAAD)배치 고려’라는 군사팽창 노선으로 나타나게 된다.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파주, 철원 일대의 비무장지대는 어느덧 외국인들의 문화관광지로 전락하였고 국민들의 관심부족과 미온적 태도로 2014년 1월 현 정부가 내세웠던 ‘통일대박론’은 용두사미가 되어버렸다. 2014년 우리 청소년들의 통일의식 또한 점차 약화되어 중학생 시기를 거치면서 통일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50%에 이르지 못한다. 통일부에 신고된 이산가족 13만명 중 생존자는 이제 6만명만이 남아 2015년을 기점으로 어느덧 사망자수가 생존자수를 추월하게 되었다.
하루하루 자기계발과 무한경쟁 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이 시대, ‘북한과 통일’이라는 단어는 어느덧 골칫거리로 치부되었고 이러한 통일담론 조차 역사와 당위의 측면이 아닌 실용성과 합리성에 주목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세계화와 함께 등장한 다문화의 흐름은 국내 탈북민들 또한 이러한 다문화의 일부로 매도해버린다. 이쯤 되면 ‘통일’이라는 단어는 애뜻한 염원이 아닌 오히려 폭력에 가깝게 느껴진다. 특히 최근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정교과서와 건국절 논란은 남한 정부수립에 대한 정통성을 명분으로 후기 분단체제를 완성하려는 ‘분단의 문명화’ 작업인 것이다. 어느덧 우리의 인식 속에 분단이라는 사건은 역사를 넘어 정통성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후기 분단체제의 일상화는 우리 스스로를 더욱 고립시키고 소외시킴으로써 통일에 대한 집단적 환희의 기억들을 퇴색시키고 있다. 더욱이 통일 이후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있는 2천 3백만 북한 동포들과 어떻게 통일국가를 이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은 많은 부분에서 회의론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향후 진행될 통일운동은 더욱 치열하고 험준한 길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과제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그 해법은 ‘반도문명의 재구성’ 전략에 있다. 이는 후기 분단체제로 공고해진 분단의 문명화를 다시 이전처럼 복원시키는 작업이다. 우리 한반도의 문명은 대륙과 해양의 기질들이 모두 축적됨으로써 풍부한 문명의 홍수를 이룬다. 북한의 주체사상도 근대화와 더불어 시작된 제국주의적 기독문명에 대항하기 위한 저항과 반기독교적 모순의 중간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 주체사상은 한반도 내 전쟁과 수난, 고통의 질곡 가운데 민중들의 공포감이 자아낸 패러독스인 것이며 체제지속을 위한 선전수단에 불과하다.
결국 통일 이후 반도문명 재구성 전략의 핵심은 주체사상의 회복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출발점은 남한 내 다수가 믿고 있는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만남은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 구약 창세기에서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났을 때의 감격(창33:10)을 우리는 기억한다. 마찬가지로 기독인들은 언젠가 북한의 주체사상과 조우해야만 할 것이다. 북한선교, 북한의 복음화는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끊임없는 대면을 통해 내면의 두려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벧4:8) 능력이 있고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용서하게 된다. 이를 통해 비로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나니(요일4:18)”에서처럼 우리 안에 존재하는 모든 두려움을 이김으로써 종국적 사랑의 승리와 완성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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