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사장 김황식)이 25일 오후 서울 중구 크레스트72 글라스홀에서 ‘이승만 대통령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기념행사는 개회식, 1부 학술회의 ‘대한 근대와 청년 이승만’, 2부 청년세대 원탁회의 ‘대한민국 청년, 이승만을 다시 만나다’, 3부 미래세대 원탁회의 ‘대한민국 미래세대, 이승만을 다시 배우다’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축사에서 김황식 기념재단 이사장(전 국무총리)은 “우남의 정신과 그가 남긴 업적은 우리의 귀중한 역사적 자산이 됐다.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이 확립한 자유, 민주, 공화의 빛나는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며 “불굴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창업가인 이승만 대통령을 기념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뿌리를 되찾고 국가정체성을 굳건히 확립하는 길”이라고 했다.
강석호 자유총연맹 총재는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서 자유민주주의체제 수호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농지 개혁, 의무교육 실시 등 민생안정과 사회발전에 기여,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이룩하는 초석을 다지셨다”며 “반국가세력들이 미래세대의 가치관을 훼손시키는 시도를 막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와 전통을 지켜내야 한다”고 했다.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는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대통령’ ‘경제대통령’ ‘호국대통령’ ‘교육대통령’ ‘과학대통령’으로 평가할 수 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 농지개혁을 통한 경제성장의 토대, 한국전쟁 당시 평화선 선포, 2만 명의 반공포로 석방,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등 나라를 공산화로부터 지켜냈다”고 했다.

이어진 1부 학술대회에서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교수)은 “조선왕조는 17세기 이래 쇠퇴했었고 19세기에 이르러 그 쇠퇴는 급박하게 진행됐다”며 “이승만이 1904년 한성감옥 안에서 쓴 『독립정신』에서도 당시 조선사회의 야만상태가 드러났다”고 했다.
이승만은 『독립정신』에서 “제 집과 토지와 재산이 있으나 제 것인지도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제 처자와 가속도 제 것인지 알 수 없어, 제 목숨이 과연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이것은 홉스(T. Hobbes)가 그의 『리바이어던』에서 묘사한 국가 이전의 야만상태로 구한말 우리의 실태였다는 게 이 교장의 주장이다.
이 교수는 “이승만은 이를 ‘천 년에 걸친 전제정치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 전제정치란 첫째 양반과 상놈의 등분, 둘째 제 뜻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병폐, 셋째 벼슬아치에 노예처럼 복종함”이라며 “넷째 의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함, 다섯째 사사로운 생각이 가득함, 여섯째 구습에 찌들어 있음, 일곱째는 거짓말을 하는 악습, 여덟째 인간이 조물주의 창조하심을 입어 만물을 다스릴 권리가 없음”이라고 했다. 이영훈 교장은 조선은 관리 3,800여 명이 도적떼가 돼서 국민들을 뜯어먹던 국가적 상황에 처해있었다고 했다.
이어 “17세기 후반까지 전체 인구의 3-4할은 노예적 노비 신분이었다. 이것이 점점 줄어 19세기까지 전 인구의 1할이 노비였다. 나머지 9할이 자유민이라고 할 수 없던 이유는 19세기 당시 토지조사에 따르면, 충남·충북의 경우 농촌 주민의 33%는 협호였다. 이는 주호에 대해 경제적이나 사회적으로 종속 상태인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의 왕실은 중국의 황제를 중국 황제를 어버이로 섬기는 효의 윤리에 정성을 다했다. 조선왕조는 중국을 중심으로 위계로 짜인 예의 국제질서를 국가체제의 기본 원리로 했고, 그 결과 서서히 쇠퇴한 체제였다”고 했다.
아울러 “이승만은 배재학당 시절 ‘나는 그곳에서 영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배웠는데, 그것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사상’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시민들을 억압하는 조선사회가 아닌 시민들이 법적으로 보호받는 기독교 국가를 꿈꿨다”고 했다.
또한 “이승만이 자유 이념의 혁명가로 일생을 살기로 결심했던 시기는 대략 배재학당 졸업 이후인 1897년이었다. 그는 당시 제중원의 원장 에비슨(Oliver R. Avison)에게 찾아가 조선의 정부형태를 바꾸겠다고 했다. 에비슨은 그러한 시도는 피로 얼룩진 혁명을 통과해야 함을 말했고, 이승만은 어떤 고통이든 감수하겠다고 했다”고 했다.
그는 “미국 유학,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 역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청원 등 이승만의 활동 이후 그는 1948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이끌었다”며 “이승만은 쇠퇴한 나머지 허물어진 전통 문명 조선을 새로운 원리로 대체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했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하고자 조선은 청나라를 끌어들였고, 일본도 개입하면서 청과 일의 패권 다툼이 벌어졌으며 이것이 청일전쟁으로 확대됐다”며 “1895년 시모노세키에서 청일전쟁 평화협상이 체결됐고, 이는 평화조약 제1조의 ‘조선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이라는 선언을 이끌었다”고 했다.
이어 “그 결과 과거제의 폐지로 청년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했다”며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배웠고 독립협회 등에서 활동하다 투옥된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개신교도가 됐다. 거기서 개신교를 통해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독립사상을 발전시켰다”고 했다.
그는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저술한 『청일전기』에서 ‘청일전쟁 결과 조선은 독립했지만 스스로의 힘이 아닌, 일본에 의해 얻은 수치스러운 독립’으로 인식했다”며 “그는 친일 개화독립파 인사들과 달리 백성의 마음이 모여지면 언젠가 주권국가를 설립할 수 있다고 봤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승만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갈라디아서 5장 1절)고 강조했는데, 이는 청나라, 러시아, 일본을 의지한 조선의 노예 상태를 의미한 것”이라며 “1948년 주권국가 수립은 북한까지 아우른 자유민주주의 통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헌헌법에서 명시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은 이승만이 꿈꾸던 통일한국이었다”고 했다.
한편, 1부 순서 논찬자로 김영림 박사(일본 츄오대), 주대환 부회장(죽산조봉암선생개념사업회), 복거일 소설가가 나섰다.

2부 순서는 조평세(1776연구소 대표), 손영광(울산대 교수), 김민아(빌드업코리아 대표), 책읽는사자(사자그라운드 대표)가 ‘21세기 대한민국 청년들이 생각하는 19세기 청년 이승만’을 주제로 논찬했다.
조평세 박사는 “이승만의 저작 『독립정신』 마지막 문단은 ‘천국에서 만나자’로 마무리된다. 개개인의 교화가 나라 개혁의 전제라고 강조했다”고 했다.
손영광 교수는 “청년 이승만이 지금 만민공동회가 열린다면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는 히틀러와 같은 거대야당의 입법독재를 규탄했을 것”이라며 “청년들의 탄핵 반대 운동은 제2의 이승만들의 건국운동”이라고 했다.
김민아 대표는 “미국 독립선언문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을 시민에게 줬고, 국가가 이를 박탈하려는 정책을 펼친다면 시민은 그 국가에 저항하고 폐지 운동을 벌일 수 있다”고 했다.
책읽는사자는 “청년 이승만이 꿈꿨던 나라는 성경 위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사회였다”며 “국민저항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천부인권으로 헌법 위에 있고, 만일 사법 입법의 결탁으로 행정부 마비 사태가 일어난다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국민저항권은 허용된다. 지금 탄핵정국은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국민저항권을 알리는 국민계몽이 이뤄지고 있다”라고 했다.
3부 순서는 박상윤 교사, 이현후 연세대 대학원생, 김형균·박애린 고등학생이 ‘미래세대 교육에 있어 청년 이승만 교육의 현황 분석과 향후 방향 모색’을 주제로 논찬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