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사실인지 확인할 길 없지만 어느 고등학교 사자성어 테스트에 “다음에 열거된 사자성어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마이동풍(馬耳東風), 풍전등화(風前燈火), 우이독경(牛耳讀經), 우왕좌왕(右往左往​), 유야무야(有耶無耶), 용두사미(龍頭蛇尾), 조령모개(朝令暮改), 일구이언(一口二言), 당동벌이(黨同伐異), 뇌물수수(賂物授受), 안면박대(顔面薄待), 후안무치(厚顔無恥), 책임회피(責任回避), 안하무인(眼下無人), 막무가내(莫無可奈).”

정답은 ‘국회의원’이었다.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이 이만큼 크다는 말이다. 입만 열면 국민, 국익을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들 이권만 챙기는 것이 화가 난다는 뜻일 게다. 사자성어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듣는 것 같다.

그런데 본문에도 할 일은 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벌이는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그 결과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된다. 18장에서 시작된 이 수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19장까지 이어진다. 말씀 가운데 12절을 보면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라고 했다. 그래서 “체포당하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눈다. 제목에 물음표를 붙인 이유는 예수님이 스스로 잡히셨기 때문이다.

스스로 잡히시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 그곳 동산으로 가셨다(1절).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성전 동쪽 편에 있는 골짜기, 깊은 골짜기가 아니라서 겨울 우기 동안만 물이 흐르고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이다. 그 시내 건너편에 겟세마네 동산이 있다. 다른 복음서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피눈물 나는 고뇌의 기도를 드렸다고 보도하는데 요한은 노 코멘트(No comment), 이상할 정도로 이 기도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름도 빼고 ‘동산’이라고만 불렀고, 거기서 예수님이 체포당하셨다고만 한다.

요한은 있는 사실을 전부 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할까? 겟세마네의 기도를 몰라서 빠뜨린 건 아니다. 11절에서 ‘잔’을 언급한 것을 보면 알고도 의도적으로 뺀 것, 그 이유는 고난보다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영광’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어울리지 않는 것, 그래서 부적합한 소재를 뺀 것이다.

그런데 겟세마네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요한이 주는 메시지다. 예수님의 기도는 17장으로 끝났다. 다른 복음서는 이후 긴 수난사를 보도하지만 요한에게 이것은 수난이 아니라 영광의 행진이다. 미리 예정된 것,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고,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표현을 빌리면 “피하지 않고 죽음을 가져올 동산으로 기꺼이, 마치 감옥으로 들어가시듯 그 동산으로 가셨다”. 십자가를 아버지 집으로의 귀환, 영광의 행진으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밤중의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아랫사람들이 긴급 체포를 위해 들이닥친 것도 급습이라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이 그들을 맞으러 가신 것 같다. 요한의 의도가 분명하다. 십자가, 결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예정된 것이고, 반드시 가야 할 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요한도 그날에는 이것을 고난으로 봤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돌이켜보니 아니었다. 오히려 십자가 때문에 부활이 일어났고, 십자가 때문에 천국 문이 열렸다. 또 십자가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했다. 체포당하실 때는 이해를 못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고난을 너무도 당당하게 맞으셨던 예수님의 승리와 기쁨의 미소가 더 뚜렷해졌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을 겟세마네의 고뇌로 그리는 것은 예수님을 오해하게 만든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이 기도를 생략한 것이다.

요한이 볼 때 예수님은 체포당하신 게 아니라 스스로 잡히셨다. 물론 자수는 아니다. 자수는 죄지은 사람이 하는 것 아닌가? 일련의 과정을 보면 모든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언급인데 요한은 예수님이 스스로 가신 이 동산이 제자들과 자주 찾던 곳이라 했다. 그리고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4절), 급습당하신 게 아니라 예수님이 다 알고 그 동산으로 가셨다는 말이다. 대적자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신 예수님, 급습한 자들에게 선제적 행동으로 “내가 예수라”라고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셨다.

제자들 역시 용케 달아난 것이 아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 당신이 겪어야 할 체포, 심판, 죽음 등의 상황에서 당신의 양들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두 번이나 체포 대상이 “나사렛 예수”라는 군인들의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하며 끝까지 제자들을 보호하셨다.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이 고난의 성격을 “아버지께서 주신 잔”(11절)이라 하셨다. 우발적이거나 단지 힘이 없어서 당하는 고난이 아니고, 계획이 있는 고난, 뜻이 있는 고난이라는 말씀, 예수님은 체포당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잡히셨다.

당당히 잡히시다

요한은 예수님이 당당하게 체포당하셨다고 한다(5절). 군병들이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니 예수님은 스스로 “내가 그”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4장에서 수가성 여인과 대화하실 때 하셨던 대답과 똑같다. “I am”(‘에고 에이미’), 신성을 주장하는 답변 형식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는 그 순간에 군병들이 나가떨어지는 의외의 일이 벌어진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6절), 도주가 예상되는 한 시골뜨기를 체포하러 왔던 군병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막상 기습적으로 현장에 와 긴급체포하려고 했는데 너무도 당당한 인격자, 도주는커녕 군병들 앞에 마주 서며 신성을 주장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서시자 앞줄에 섰던 군병들이 무의식중에 뒷걸음질 치다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걸려 함께 넘어진 것 같다”고 했다. 뒷걸음치다 나가떨어진 꼴이다.

두려움 없는 자세, 침통함을 느낄만한 상황 속에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며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 경외의 순간, 거룩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순간이 되게 하셨음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예수님의 영광의 현현(顯現) 때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에고 에이미, 단순한 “나야 나”가 아니라 스스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예수님. 그 당당하심에 압도된 군병들, 그래서 칼과 무기를 들고 왔지만 그것들은 무용지물(無用之物), 그것으로는 예수님을 제압할 수 없었고, 오히려 자기들이 나가떨어지는 모양 빠지는 꼴이 된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는 그 순간마저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현장으로 그리고 있다. 한밤중에 밝게 비친 환한 빛, 예수님의 강력한 영광의 현현(顯現)에 군병들과 무리들이 눈이 부셔서 도저히 그대로 서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한 것, 지금 변화 산상에서 일어났던 현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나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바다 위를 걸어가실 때 빛이 비쳤다는 게 아니다. 체포당하시는 순간, 인생의 가장 큰 위기의 순간, 고난의 때, 요한은 일찍이 말씀이 육신이 되던 순간에 봤던 그 현상을 지금 보고 있다.

존엄성이 짓밟힐 수도 있는 순간,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느낄 수밖에 없는 긴박한 순간, 그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고 말하고 싶은 요한, 남들은 어떻게 보든 요한은 그날 그 수난의 밤에 독생자의 영광을 본다. 그래서 요한은 훗날 어떤 고난 앞에서도 이겨낼 수 있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의 영광을 본 것처럼 터키의 산 중에 숨어 살면서도, 밧모섬에 유배당해 날마다 힘겨운 고역을 하면서도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이겨냈다.

군대와 무리들이 물러나 땅에 엎드러졌다는 것, 세상이 선 땅이 견고한 곳이 아님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반석이 아니라 모래 위에 집을 지어놓고 멀쩡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흔들리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상황인데도 오히려 교회를 한심하다고 하는 사람들, 저들은 모두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요한은 이 부분에서 유다도 그 자리에 있었음을 거듭 밝힌다.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5절),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때의 유다를 “늑대의 옷을 입은 양”이라 했는데 요한은 이때쯤 있었을 배신자 유다의 키스에 대해서조차 말이 없다. 다른 복음서들은 제자들이 모두 달아났다고 했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노 코멘트, 그의 관심사는 갈등하시는 이미지나 제자들이 도망치는 어수선한 분위기보다 오직 당시 상황을 주도하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 당당하게 수난을 맞이하시는 이미지 부각, 그게 훨신 더 중요했다.

고난,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상책일 것이다.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예수님처럼 당당히 맞서야 한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즐겨야 한다. 이왕 맞을 것, 끌려가거나 원망하며 포기하지 말라. 당당하게 맞거나, 저항하며 맞아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 지금의 고난, 다시 도약할 디딤돌로 삼으라.

그날 잡으러 온 자들은 등과 횃불을 들고 왔다. 예수님이 도주하면 불을 밝혀 잡기 위해 들고 온 것이지만 무용지물,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예수님이 너무 당당하게 체포당해 주셨기 때문이다. 묻는다. 혹시 이런 무용지물을 들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항 없이 잡히시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칼을 빼 잡으러 온 자들과 맞서자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절) 그러신다. 잡으러 온 무리 중에는 군대가 두 번 언급되는데(3절, 12절) 예수님이 무슨 쿠데타 수괴나 적국에서 온 침입자인가? 로마의 군대가 출동했다. 당시 세계 최강의 로마 군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식민통치하던 당사자들, 잔인한 자들, 폭력 행사를 주저하지 않는 국가권력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국가권력에 반기를 들기라도 했나? 그들이 출동했다.

그때 주님의 길을 오해한 베드로는 저항하려고 칼을 뺐다. 그래봐야 단검이었지만 베드로는 그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벴다. 이 장면에 대한 각 복음서의 서술이 흥미롭다. 마태와 마가는 비슷하다. 마태는 “예수와 함께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마26:51)라고 했고, 마가는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막14:47)라고 했으며, 누가는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눅22:50), 그 귀가 오른쪽 귀였다는 새로운 정보를 덧붙였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에 또 더한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10절), 칼로 친 자는 베드로였고, 오른쪽 귀가 맞고, 그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은 말고였다고 부연한 거다. 마치 보도 경쟁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제일 나중에 기록한 요한의 기록이 완결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 디테일보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11절)라는 말씀이다. 격하게 저항하지 말라는 것, 이 말씀으로 체포의 순간은 더 이상의 충돌 없이 싱겁게 끝났다. 초대교회는 이 말씀을 단지 수난과 체포의 현장에 필요한 말씀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크리스천의 국가권력을 상대하는 대응방식으로 적용했다. 그들은 부당한 폭력과 억압이 있어도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물론 맞서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것, 사도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마저 내어주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 믿고 난 후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았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이 말은 한국교회가 들어야 할 말씀이다. 또 우크라이나를 침범한 러시아의 푸틴이나 칼을 뽑아든 북한의 김정은이 들어야 할 말씀이다. 법의 칼을 함부로 휘두르고 있는 국회의원들과 판, 검사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고, 교리의 칼을 마구 휘두르고 있는 교권주의자들이나 분노하며 완력과 폭력으로 복수하려는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다.

예수님은 저항없이 체포당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체포, 심문, 죽음을 아버지의 뜻으로 알았기에 십자가라는 고통의 잔, 슬픔의 잔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체포하러 온 자들이나 체포를 지시한 자들을 향해 정죄하는 칼이나 복수의 칼을 휘두르지 않으셨다. 하나님다우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부당 체포에 순순히 응하신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정의, 생명을 구원하는 길이다.

성경은 정죄도 복수도 허용하지 않는다. 왕관은 거부하고 고난의 잔을 향해 담대하게 걸어가신 예수님, 영광의 자리는 사양하셨지만 십자가의 고난은 자원하여 취하셨다. 과업을 완수하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지로 들어가신 예수님, 고난을 향한 주님의 이 자원적 발걸음을 보며 주님 가신 그 길을 묵묵히 따라 걷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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