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2018년 10월 27일자 경향신문은 탈북민 1호 통일학 박사 주성현 씨를 소개하며 그에게서 들은 현재진행형인 분단이야기를 소개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한국인 다수가 ‘분단’에 내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제는 북한이 미사일을 수없이 쏴고 전투기를 백 수십대를 띄워도, 대북제재 때문에 북한 주민이 굶어죽는다는 뉴스를 봐도, 내 일로 느끼지 않는다는 거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 시절 배고픔을 못 이겨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 자유와 기회를 열망하고 내려온 사람들, 이런저런 이유로 내려온 탈북민 3만여 명은 분단을 몸과 마음으로 깊이 느끼며 산다. 비록 남한에서 ‘비국민’ 취급을 받으며 살지만 남과 북을 모두 겪으며 생이 달라지는 경험을 한 탈북민들은 ‘먼저 온 통일’이자 ‘생생한 분단의 증인’이다.

23살 때 심리전 방송요원으로 근무하다 2000년초 촘촘히 박힌 지뢰와 고압전선을 피해 경계를 넘어 남으로 내려온 주성현 씨는 전단지 알바, 호프집 종업원, 건설현장 일용직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공부해 한국에 온 지 10년 만에 박사모를 썼고, 38세가 된 2018년에 『조난자들』이란 책을 썼다. 지금은 인천대 동북아국제통상학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인데 우리 사회가 그의 생각을 프리즘 삼아 남북관계로 인해 한반도가 맞은 위기를 풀어나갔으면 좋겠다.

『조난자들』에는 ‘조난’ 끝에 끝내 세상에서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북한 일류대 김책공업대학을 졸업한 한 탈북민은 한국에 와서 경영학을 전공했으나 취업에 번번이 실패했고, 배우자마저 그를 떠나자 임대아파트 화장실에서 목을 맸다. 북한에서 의사였던 한 탈북민은 아내의 치료를 위해 한국에 와 공사장 일용직 등을 전전하며 치료비와 생활비를 벌었는데2016년 빌딩 유리창을 닦다가 13m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그가 숨진 후 발견된 일기장엔 “편법이 용납되는 결과주의와 일등주의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 왔던 많은 탈북민들이 “배고픔보다 더 고통스러운 천대”에 외국으로 떠나가기도 한다고 했다. 차별에 대해 얘기하면 ‘북으로 돌아가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직장에선 ‘김정은에게 그렇게 배웠냐’는 이상한 조롱도 견뎌야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먼저 온 통일’이라고 부른다. 주 박사는 ‘이런 통일이 우리의 미래이기를 바라느냐’고 물었다.

그는 탈북민들이 북한 인권유린의 실상을 말하면 보수진영만 귀를 기울이고, 남한사회에서 섞이지 못하는 소수자로서의 삶을 얘기하면 진보진영만 주목한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진영논리에 따라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취사선택한다는 거다. 북한의 인권 문제가 진보 보수간의 정치적 도구, 정쟁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게 가슴 아프다는 것, 정치인들의 착시가 그들을 극우보수 취급하는 통념까지 만들었다. 섬나라와 다를 바 없는 한국, 이제는 ‘분열은 죄’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게 위기 극복의 길이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는 먼저 자신을 위한 기도였고, 그 다음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며, 또 그 다음은 믿는 자들, 즉 교회를 위한 기도였다. 기도의 내용은 “하나 되게 하소서”, 그런데 마지막 기도 부분은 ‘하나 되게 하소서’에 보다 더 집중하신 대목이랄까? 하나 됨이 더 강조되고 있다(21, 23절). 예수님의 기도가 ‘하나 되게 하소서’로 요약된다면 우리는 하나 되기에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 믿는 것에 하나 되기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0-21절), 여기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안에’와 ‘하나’라는 단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들도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 되게’. 같은 단어, 같은 구절이 반복된다. 여기에 ‘사랑’이라는 단어도 나오고, ‘알게 한다’ ‘모른다’는 등의 지식과 관련된 단어도 등장하는데 이 모든 것이 지향하는 것이 ‘하나 되는 것’, ‘연합’하는 것이다.

이건 우리가 절실하게 기도해야 할 제목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쓴 이규태 씨는 한국인들이 연합하지 못하는 원인을 산업화 과정에서 생긴 과잉 경쟁구조 때문이라 했다. 그는 오늘날의 한국인을 ‘독 속의 게’에 비유했다. 독 속의 게는 개별로 보면 독 밖으로 나올 역량이 충분한데도 밖으로 기어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한 마리가 기어 나오려 하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라는 거다. 한 마디로 “너 죽고 나 죽자”는 한국인의 심성, 이제는 좀 달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날로 더 심해지고 있다.

1849년, 미국 뉴잉글랜드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세관 감정관으로 일하던 한 남자는 너무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해고된다. 그런데 그때 그의 아내가 뜻밖의 말을 한다. “여보, 차라리 잘된 일 아닌가요? 이제야말로 당신의 꿈을 이루실 때가 된 것 같네요. 소원대로 글을 쓰세요” 아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교회 친구 몇 명에게 부탁해서 그날 밤 그의 집으로 와 그에게 창작활동을 권하게 한다. 절망과 희망이 원래는 한 몸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불과 반년도 못 되어 한 권의 소설이 완성된다. 그 소설이 바로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명작 『주홍 글씨』다. 아내 덕에 청교도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 그가 실직하던 밤부터 꾸준히 그를 찾아준 친구 중 한 사람이 유명한 시인 롱펠로우였다. 만일 아내의 격려가 없었다면, 또 친구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가 만일 책을 쓰지 않았다면 인류는 『주홍 글씨』라는 위대한 유산을 갖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나됨, 연합이 불후의 명작을 남긴 셈이다.

그런데 연합은 진영 간에 잘 뭉치는 것이나 끼리끼리 잘 뭉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 믿는 것으로의 연합이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그 분은 권을 위해 오신 분(3:17), 그리고 그분은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the way)이시다(행4;12).

비록 지금 이 시대가 종교다원주의 시대이지만 절대성을 부인하고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시대정신과 타협할 수는 없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라는 주장을 독선이라며 예수님도 석가나 공자나 마호멧과 같이 구원자 중 하나(a way)로 인정하라고 한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동서남북 여러 방면에 있는 것과 같다는 그들의 주장이 인간적으로는 수긍이 간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유일한 길(the way)를 말한다. 다른 길은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쉽지 않아도 예수님의 기도대로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우리는 끝까지 기독론,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증거해야 한다.

예수 아는 것에 하나 되기

“곧 내가 그들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3절), 21절과 유사한 구절이다. 순서만 좀 바뀌어 “내가 그들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세상으로 알게 하려”고 기도하신 것, 제자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체 관계와 같지는 않더라도 유사점이 있다는 말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요즘 세상은 인터넷 시대라 사람들이 아는 게 많다. 그것도 빨리 안다. 문제는 깊이가 없고, 객관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것을 사실인양 알고 믿는다는 거다. 그리고 막 퍼 나른다. 무책임하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도 다르지 않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알려고도 안 하거나 알 만큼 안다며 함부로 평가하고 함부로 말한다.

하지만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 분은 먼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3:16)이시다. 그리고 스스로 정체성을 밝히셨다(7 “I am…” sayings).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1) “부활, 생명”(11:25) “길, 진리, 생명”(14:6) “포도나무”(15:1.5). 이 선언들은 모두가 다 주어(S)+동사(V)+보어(C) 형태인데 보어가 다 ‘생명’과 관련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고 천명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생명’을 위해 오셨고, ‘생명’을 위해 사셨고, ‘생명’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당신이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드러내셨다. 그러니 예수님은 알고 믿으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절대 필수(absolute necessity), 반드시 알고 믿어야 할 분이시다.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 이 기도에서 하나 됨은 두 가지 방향으로 강조하셨다. 먼저는 수직적 차원,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이다(21절).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것, 하나님과의 연합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는 것,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 밀착하고 결속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23절).

그리고 다음은 수평적 차원, 성도간의 사랑의 연합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셨듯이 제자공동체, 요한공동체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다. 성도 간의 하나 되기가 바로 ‘사랑’, 예수님이 고별설교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신 것이다(13:34, 15:12-13).

지근거리에서 누구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까? 요한은 요1서에서도 사랑에 대해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서로 사랑해야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요일4:20),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거짓말이라 했다.

경험상 아는 것이지만 사랑하면 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알게 된다. 마음도 알고 계획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

영광 보는 것에 하나 되기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로서 나치 독일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순교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당시의 독일교회가 능력과 영향력을 잃어버린 원인 가운데 하나가 ‘값싼 복음’을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값없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가 맞다(엡2:8). 하지만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얻었어도 예수님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기에 값싼 은혜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공관복음서는 ‘고난받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요한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보다 ‘춤추는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십자가를 ‘영광’이라 한다. 공관복음서가 다 비중있게 다룬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며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로 시작된 겟세마네 기도가 요한복음에는 없다. 동산에 가셨다는 기록뿐이고(18:1), 공관복음서에 없는 ‘영광’이라는 표현을 한다.

강원도 태백 산골짜기에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세운 분은 아처 토레이 목사님이시다. 그의 아버지 루벤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는 중국 선교사였다. 그 분이 1945년 중국 내지로 트럭을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팔을 잘라내야 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토레이 목사님은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두 팔을 주셔서 잘 살았는데, 이제 한 팔을 가져가시니 감사합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1952년 한국으로 오셨는데 와서 보니 6.25 전쟁 이후라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팔이 없도록 하신 것이 한국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팔 없는 사람들의 괴로움과 불편함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었다. 토레이 목사님은 의수, 의족 만드는 기술을 익혀서 서울, 청주, 대구에 재활 센터를 세우고 팔다리가 없어진 군인들과 사람들에게 팔(의수)과 다리(의족)를 만들어 주었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 거다.

이 ‘영광’이 예수님의 기도 마지막 부분의 핵심단어(key word)다. 최종 목적지가 영광, 예수님은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절)라고 기도하셨다. 물론 예수님 말씀하시는 영광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은 다르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여러 번 예수님께 진정한 영광이 십자가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미 12장에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영광도 십자가였다. 드디어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가 되자 예수님은 그 때를 하나님으로부터 영광 받는 순간으로 여기신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십자가, 그래서 영광으로 여기신 것, 주님은 우리가 그 주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신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No cross, No crown)는 말이 있다. 바울은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8;18)고 했다. 고난을 작게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난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 언젠가는 반드시 출구가 있다. 더 큰 행복이 기다린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영광에 기웃거리지 말고, 제자들이 ‘그 영광’, ‘예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셨다. 그 영광을 바라보는 하나 된 제자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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