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국제복음과공공신학연구소 황경철 박사
황경철 박사.

본 연구는 리처드 백스터의 공공신학적 면모와 현대에 주는 시사점을 제시한다. 연구의 목적은 첫째, “공공신학”이라는 용어는 최근에 등장했지만, 그 내용과 가르침은 종교개혁자와 청교도에게 이미 존재했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둘째, 백스터의 저작에 나타난 공공신학적 논의를 확인함으로써 이 주장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셋째, 백스터의 논의가 공적 신뢰를 잃어가는 한국교회에 주는 시사점을 얻는 것이다. 백스터 당시 영국 내전과 비국교도 목사 2천 명에 대한 추방령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감소와 정치·사회적 격동과 닮아있다. 하나님이 교회사 가운데 남겨 두신 충성된 일꾼과 교회를 통해 세상에 빛과 소망을 주신 것은 위기에 놓인 한국교회에 위로와 함께 책임을 던져준다. 「참 목자상」으로 알려진 백스터는 설교와 교리교육과 심방에 전념하면서도 교회의 공적 책임과 ‘공공선’을 강조하였다. 백스터의 공공신학 연구는 신학적 노선에 따라 다양한 공공신학 개념이 혼재하는 한국교회에 유의미한 안내자가 될 것이다. 청교도 보수주의자로서 교회의 하나됨과 정치적 갈등의 중재에 힘썼던 백스터의 역할은 이념, 세대, 계층, 지역 등으로 양극화된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제어: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 공공신학, 교회의 공적 책임, 공공선, 공동선]

Ⅰ. 들어가며

이 소논문의 목적은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백스터의 공공신학적 면모를 분석하고 현대에 주는 시사점을 추출하는 것이다. 그 예비적 고찰로 공공신학의 정의와 특성을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이유는 최근 한국교회 내 공공신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나 그 정의는 학자마다 다양하며, 신학적 노선에 따라 강조점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추려질 수 있는데, 하나는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이 1974년으로 비교적 최근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짧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논의가 하나의 신학적 개념으로 통일적으로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International Journal of Public Theology는 “공공신학이란 기독교 신앙과 가치를 가지고 사회의 공공선, 복지, 평등, 정의, 인간존엄성, 공적 대화와 정치 시스템 등을 발전시키고 향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한 신학”으로 설명한다. 공공신학은 기독교 신앙과 가치를 교회 내부는 물론 교회 바깥의 공간인 공적 광장(public square)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에 몇 가지 특징을 띤다. 즉,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을 세상의 언어로 번역하는 이중 언어, 간학문적(間學問的, Interdisciplinary) 연구, 사회에 방향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속성 등이다. 이에 대한 접근 방식과 핵심 가치에서도 입장이 엇갈린다. 데이빗 트레이시를 주축으로 한 시카고학파는 텍스트보다 컨텍스트를 강조하며, 컨텍스트를 위해 텍스트를 수정할 수 있다는 수정주의(Revisionist) 입장이다. 트레이시의 공헌은 신학적 담론이 신학의 주체가 아닌 보편적 인간 청중에게 열려야 하고, 그 방식도 지적이고 합리적인 공적 논증으로 신학의 공공성 확보를 제시한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조지 린드백과 로널드 띠먼을 위시한 예일학파는 그러한 방식이 진리의 절대성과 기독교의 고유성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수정주의에 문제를 제기한다. 린드백은 텍스트가 제공하는 세상 이외에 “실제 세계”(real world)는 없다고 못 박고, 텍스트 자체의 내러티브 구조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연구자는 한국교회에서 공공신학 강의를 최근 3년간 수십 차례 진행하며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공공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냐는 우려 섞인 질문을 받곤 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공공신학에 대한 한국교회의 낯선 이해와 함께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공공신학 개념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다양한 신학 노선에 따라 “공공신학”이라는 용어는 동일하게 사용되나 그 신학적 전제와 내용과 방식은 천양지차의 스펙트럼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염두하고 본고는 종교개혁자와 그 후예인 청교도의 공공신학 논의의 궤적을 살피고자 한다. 이를 통해 본 고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세 가지이다. 첫째, “공공신학”이란 용어는 비록 최근에 등장했지만, 그 개념과 가르침은 종교개혁자와 청교도에게 이미 존재했음을 논증하는 것이다(Ⅱ장).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표방한 개혁자들이 성경이 말하는 공공신학적 가르침을 강조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안상혁은 국내 학자들의 청교도에 대한 연구를 초기(1950-79), 중기(1980-99), 현재(2000-) 세 시기로 구분하면서 1차 자료의 번역 및 2차 문헌의 주제와 특성을 분류하였다. 이 자료에 따르면 ‘청교도와 공공신학’을 주제로 한 연구는 미진한 실정이라 본 연구가 기여할 부분이 있다고 사료된다. 둘째, 리처드 백스터의 저작에 나타난 공공신학적 논의를 구체적으로 확인함으로써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셋째, 백스터의 공공신학적 논의를 통하여 공적 신뢰를 잃어가는 한국교회에 대한 시사점을 얻는 것이다(Ⅲ장). 수많은 청교도 중에 백스터를 지목한 까닭은 키더민스터에서 헌신적 목회와 「참 목자상」 또는 「참된 목자」로 한국교회에 알려진 백스터의 사역과 설교에 공공신학이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확인하여 오늘날 목회자가 신학적, 목회적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연구의 파생적인 유익으로써 공공신학에 대한 폭넓은 스펙트럼과 상호 엇갈린 주장들을 존중하면서도 어떤 입장이 역사적 개혁주의에 근접한 것인지 판단하는 지침을 느슨하게나마 확보하는 것이다.

Ⅱ. 종교개혁자와 청교도의 공공신학적 면모

1. 종교개혁자의 공공신학적 면모

지면의 한계상 종교개혁자들의 공공신학적 가르침을 여기서 망라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다만, 대표적인 종교개혁자들이 공공신학적 특징을 주마간산격(走馬看山)으로 살필 터인데, 그럼으로써 다음 장에서 다룰 리처드 백스터가 16-17세기에 공공신학을 논의한 유일한 종교개혁의 후예가 아니라는 점을 논증하는 것으로만 만족하고자 한다.

종교개혁의 포문을 연 마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맹세를 통해 눈물겹도록 감동하였다고 했지만, 후일에 「수도원 맹세에 관하여」(De Votis Monaticis)라는 글을 통해 수도원적인 삶만이 보다 고상하고 거룩하고 가치 있는 삶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고, 사람이 무슨 일에 종사하든 다 소중한 것임을 설파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새롭게 조망하였다. 루터의 직업 소명론에 따르면 모든 직업은 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이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라고 규정함으로써 성속의 이원론적 구분을 타파하였다.

츠빙글리는 목사로서 취리히의 “구빈 개편안”을 1525년에 작성하였다. 그 내용은 도움을 요청하는 빈민들을 포괄적이고 무차별적으로 도울 것이 아니라, 자립하지 않고 구걸에만 의존하려는 사람들을 바르게 세우고, 사회악을 억제하고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함으로써 도시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다. 병자와 노인들이 구호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별도의 시설에서만 식량을 타도록 하였고, 장신구를 걸치거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 카드놀이를 하는 등 평판이 안 좋은 사람은 구호 받을 자격을 잃었으며, 모든 구걸 행위는 엄하게 금지되었다. 츠빙글리는 노동의 선함과 신성함을 강조하였는데, 노동을 통해 신체를 튼튼하고 강하게 만들며 나태로 인한 질병을 치료해 주는 까닭에 노동자가 신에 가장 가깝다고까지 언급하였다

마틴 부써는 1520년대 스트라스부르 도시개혁을 위해 언제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던 반면에 시의회는 거의 항상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자세였다. 순수한 복음 설교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믿음과 열정이 도시의 모든 정치적, 사회적 장애물을 극복하고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부써는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이기적으로 살 수 없고, 이웃을 위한 삶과 피조세계를 향한 사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고 공공선에 기초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였다.

칼빈은 제네바 목사회의 의장으로서 목사회 전체의 의견을 시의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제네바의 컨시스토리에 깊이 관여했는데, 제네바 정부가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삶을 위한 최소한의 것들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를 향하여 가난한 시민을 위해 무료 진료를 해줄 것과 빵, 와인, 그리고 고기의 가격을 통제할 것과 노동시간 규제와 임금인상 그리고 실직자의 재교육에 관한 조례를 제정할 것을 빈번하게 요청하였다. 또한, 칼빈은 교회법으로 교회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① 성직자들, ② 빈민들, ③ 교회 건물 수리, ④ 타지방과 본 지방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각각 한몫을 마련했다.20) 헨리 토니는 칼빈주의가 개인의 정화(淨化)뿐 아니라 교회와 국가의 재건, 그리고 사적이고 공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종교의 영향을 침투시킴으로써 사회를 쇄신하려고 했다고 평가한다. 토니는 로마 가톨릭이 행위 구원에 기초하여 마지막 날에 개인적 선행과 범죄를 손익 계산하듯 따지는 심판주를 가르치며 의례적 형식을 통해 세속적 삶을 속죄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던 반면에, 칼빈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삶 전체를 ‘주인’을 향해 두렵고 떨림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선명하게 대조시켰다. 비록 칼빈이 ‘공공신학’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공공신학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주장을 들어보자.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도 자기 은사들을 자신에게 가두거나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되며, 동료 구성원들과 공유해야 한다. 또한 하나의 전체로서 공동체의 공동이익에서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익을 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의 형제에게 빚지고 있다.

송용원은 칼빈이 ‘교회-보편 인류-창조 세계’의 동심원에서 ‘공동선’이 교회만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로 확산되도록 가르쳤다고 한다.24) 김민석은 칼빈의 공공신학적 면모에 대하여 복음이 일반인들의 수준에서 복음을 이해하도록 하나님의 적응(Accommodatio Dei) 개념을 활용하여 세상의 언어로 번역하고자 힘썼고[이중언어], 신학 사상을 전개할 때 타 학문의 지식을 풍부하게 사용했으며[간학문적 연구], 기독교의 독특성과 고유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천착했다고 설명한다[성경적-신학적 울타리].

베자는 1574년 한 설교에서 시의원들이 밀을 매점하는 투기꾼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고 비난했다. 1577년 내내 목사들은 시의회가 행정적으로 나태하다고 질책했고, 마침내 그것이 빵과 포도주 가격 상승의 진정한 주범이라고 규탄했다. 2년 후인 1579년에는 도덕적 규율과 사회 개혁의 새로운 구상을 담은 제안서를 시의회 앞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개혁자들은 상인들의 탐욕을 책망하는 동시에, 나태와 게으름 때문에 구제를 요청한 빈민들에 대해서도 강하게 책망했다. 그들은 신자의 삶의 다양한 관계에서 구성원들의 도덕적 행위에 공동체적 책임을 요구했다. 특히 각별히 교묘한 방식으로 부도덕으로 타락하기를 유혹하는 경제적 거래와 관련해서 그러했다.

외콜람파디우스는 빈민 구제에 관한 소책자 두 편을 냈고, 하인리히 불링거는 수도원의 구호 활동으로 생겨난 걸인의 무리를 보고 통탄하면서, 해체된 수도원의 수입 일부를 학교를 후원하고 빈민을 지원하기 위해 확보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성직자, 치안판사, 그리고 장로 두 명으로 구성된 도덕규율위원회 출범에 앞장섰고, 기독교 윤리를 위배한 자들을 파문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파문의 처벌을 받을 죄상의 목록–여기에는 살인과 절도 외에도 부정(不貞), 위증, 그리고 ‘특히 대부 행위와 사기행위와 관련된 탐욕이 포함되었다-을 작성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자 개인의 성화를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일상과 일터 전 영역에서 거룩해질 것을 촉구하였다. 모진 채권자를 질책하고, 대부업자, 매점자, 독점자를 처벌하며, 고객을 사취하는 상인, 옷감 길이를 약간 짧게 하는 직물업자, 석탄의 양을 줄이는 판매자, 당국이 정한 가격 이상으로 고기를 파는 푸줏간 주인, 낯선 이에게 과도한 가격을 물리는 양복쟁이, 수술하고 지나친 비용을 요구하는 의사 등을 견책하거나 벌금을 부과하여 엄격한 법 집행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압박한 것은 복음의 공공성과 교회의 공적 책임이 무엇인지 단면을 보여준다.

“삶의 거룩함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라.” 이 말은 스위스 개혁가들의 모토로 간주 되었는데, 사회재건을 향한 그들의 구상은 ‘삶의 거룩함’을 사회 모든 영역에 구현하려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였다. 종교개혁자에 따라 구제의 범위와 복지의 기준이 다르고, 토지 중심의 봉건주의에서 상업 중심의 중상주의로 이동하면서 시대적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의 신성함, 직업 소명론, 성속 이원론의 타파, 사회 구조적 악과 경제적 부조리를 향한 관심과 비판, 개인의 성화를 넘어서 사회적 성화, 창조 세계의 공동체적 가치는 개혁자들 안에서 뚜렷하게 공유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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