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시외버스 터미널에 허리가 구부정한 한 할머니가 많은 짐을 들고 택시를 기다린다. 그때 한 택시가 할머니를 태우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힘들게 짐을 챙기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 택시 기사가 짐을 들고 할머니를 따라간다. 도착한 곳은 병원 중환자실, 할머니는 입원한 아들 생일이라 미역국이라도 먹이려고 찾아왔다고 하신다. 하지만 중환자실은 외부 음식 반입금지, 더구나 면회 시간도 지났다. 할머니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유리창 너머 먼발치에서 아들의 모습을 슬쩍 보고 눈물만 흘리며 돌아가야 했다.

다시 할머니를 터미널로 모시는 택시 기사는 착잡했다. 미터기에 표시된 왕복 택시비는 25,000원, 택시 기사는 미터기의 '2'자를 손가락으로 슬며시 가리며 “할머니, 택시비가 5,000원 나왔네요.” 5천 원을 받은 택시 기사는 또 할머니의 짐을 들고 버스 매표소까지 함께 갔다. “할머니, 버스비 저에게 주시면 제가 표 끊어 올 테니까 여기서 앉아 기다리세요.” 버스표를 산 택시 기사는 할머니가 준 돈과 버스표를 같이 내밀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할머니, 아침에 구매하신 버스표가 왕복 버스표라네요. 새로 발급받은 이 표 가지고 타고 가세요.”

할머니를 보며 몇 년 전 지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났던 택시 기사,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보며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인터넷에 올려진 ‘행복한 택시 기사’라는 글이다. 행복, 남모르는 기쁨, 예수님도 그런 기쁨을 누리신다. 비록 체포당하기 직전의 기도지만 ‘소망과 즐거움의 무드’, 제자들은 근심으로 충만하지만 예수님은 택시 기사가 누린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으로 충만하시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속에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13절, 새번역). 요한복음서 속에서 하신 말씀만 봐도 예수님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이 누리기를 원하고 또 원하셨다(15:11, 16:22, 16:24).

표적의 책에는 이런 표현이 없다. 그런데 수난과 영광의 책인 후반부에 제자들이 당신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한다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신다. “내 기쁨, 그들 속에 차고 넘치게 하소서” 주님의 중보기도 내용이다.

중보기도의 이유

중보기도는 어떤 문제나 연약함을 해결하도록 대신 기도하는 것, 로마서에 보면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신다고 했다(롬8:34). 기도한다는 것과 안 한다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기쁨을 누리신다. 중보기도자 예수님,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기쁨을 누리신다.

본문의 중보기도는 크게 두 가지다. “저희로 하나 되게 하옵소서”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17장 전반적인 내용으로 볼 때 이 기도는 중보기도라기보다 친교의 선언 또는 사랑과 연합의 고백이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수도 있다. 기도든 선언이든 둘 다 너무 귀한 것, 하나되고 거룩하기를 기도하는 것은 중보기도의 영역이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예수님과 제자들, 제자들과 이후 그들의 선교를 통해 믿게 될 신자들이 나누게 될 사랑의 연합을 기대하고 확신하고 찬양하는 선언이다.

“우리는 하나다. 바울 사도가 고백한 것처럼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문제해결보다 예수님과의 관계, 연합을 더 우선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본문은 시제를 신경써야 한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절), 사실 제자들은 말씀을 믿고 지켰다기보다 근심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 앞에서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다”고 하신다. 부활 이후, 성령이 임한 후의 모습의 모습이다. 어쩌면 사도 요한이 90년대에 복음서를 기록할 때의 모습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말씀, 우리도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고 있나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모습되길 기도하셨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7절) 제자들은 십자가를 앞둔 상황에서 예수님을 알고 믿은 것이 아니다. 아마 여기서 말씀하신 ‘지금’은 한참 지난 후의 요한공동체의 모습일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미래의 모습을 보고 계신다.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10절)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두려워서 곧 흩어지고,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해 부인하기까지 한 제자들, 그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 아니다. 예수님은 미래의 눈으로 보신 거다. 그리고 미리 앞당긴 사랑의 고백을 하고 계신다. 사도행전에 보면 부활절 이후 제자들은 완전 딴사람이 되었다. 180도 달라진다. 진심으로 예수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심지어 목숨을 건 증인 된다.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이 고백 또한 우리를 향한 고백이다. ‘너희는 내 것이다. 내가 너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 너무 멋진 말씀이다.

하지만 실제는 영광을 받으시기는커녕 기가 막힌 상황, 유다 같은 실패자도 있고, 베드로 같은 실패자도 있고, 죄다 도망쳤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말씀을 지키고 당신을 영화롭게 했다고 기도하신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하신다(12절). 주님은 택한 자들을 지키고 보전하신다. 그래서 망하지 않게 하신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자가 없다고 했다. 이게 주님이 누리신 중보기도자의 기쁨이다. 우리도 이런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기쁨으로 충만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예수님은 기쁨으로 충만하시다. 하나님과의 하나됨 때문이다. 그 하나됨을 표현하는 단어가 ‘주다’라는 동사이다, 이 단어가 몇 절에 계속 반복된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6-10절).

예수님은 원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이 다 주셨다고 하나님을 ‘주시는 분’(Giver)로 소개하신다. 주시는 분, 하나님! 그래서 기쁨으로 충만한 예수님이시다.

우리나라는 법이 부모는 자식에게 10년 간 5천만 원 이상 상속할 수 없고, 자녀도 부모에게 5천만 원 이상 증여할 수 없다. 그 이상을 상속하거나 증여하면 중과세 대상,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세금이 없다. 값으로 계산이 안 되는 엄청난 하나님의 것이 다 당신 것이고, 당신 것은 다 하나님 것이라 하시는 예수님, 이 기도시간이 너무 기쁜 시간이시다.

이제는 모든 피조물의 소유주! 건물주만 되어도 하나님 다음이라 하는데 모든 피조물의 소유주,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이 연합은 견고한 연합,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확고한 연합이다.

“No one left behind”라는 말이 있다. 미국 군인들은 적진에 단 한 명의 전우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미군이 세계 최강인 이유이다. 그런데 지난 정부 시절 있었던 서해 공무원 피살 문제 같은 건 마치 우리나라에는 정부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뒤늦게 당시 국방장관과 해양경찰청장을 구속시켰지만 월북으로 종결하려고 증거를 인멸하기까지 했다는 검찰의 주장에 법원도 그럴 수 있겠다고 인정한 것을 보면 한 국민의 생존을 위해 정부는 전혀 노력하지 않은 것, 기가 막히다. 미국 시민권자라면 시신이라도 반드시 찾아오는 미국과 너무 다르다. 미국 국민들은 나라가 반드시 지켜준다는 확신을 갖고 살지만 우리는 확신보다 불신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께서 우리를 끝까지 지키주신다고 한다.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철저히 우리를 당신 편으로 여기신다. 우리가 잘 나서도 아니고, 쓸모가 있어서도 아니다. 오직 사랑하기 때문이다. 생명 같은 당신 자녀, 당신 친구이기 때문이다. 서해 공무원 형이 “내 동생, 내 동생” 그러고, 그 아들이 “내 아버지, 내 아버지” 그러듯 “내 자식이야!” 그러며 지켜주신다. 누구라도 건들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으신다. 누가 함부로 비판하면 ‘누가 감히 내 자식 건들어!’ 그러며 우리 곁을 지켜주신다. 하나님으로 인해 당신이 누린 기쁨 때문이다.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에게도 차고 넘쳐야 한다.

제자들도 누려야 할 기쁨

깊은 숲속에 사는 코끼리가 어느 날 겨울이 되면 우리나라에도 많이 찾아오는 철새, 개똥지빠귀에게 “어이, 개똥지빠귀! 심심한데 우리 소리 지르기 시합할래? 누구 소리가 더 멀리까지 들리는지 내기하자”, 뭘 걸었는지는 몰라도 대결이 성사되었다. 코끼리가 먼저 아주 의기양양하게 긴 코를 하늘 높이 올리더니 아주 커다란 소리를 질렀다. 그 다음 개똥지빠귀는 나뭇가지 위에 앉아 아주 곱고 부드러운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심판관은 사슴이다. 사슴은 코끼리와 지빠귀 소리 중 누구 소리가 더 멀리 들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숲속으로 갔다. 얼마만큼 가다가 토끼에게 물었다. 토끼는 코끼리 소리도 들었고, 개똥지빠귀 노랫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슴은 숲속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참새에게 물었다. 참새는 개똥지빠귀 노랫소리밖에 못 들었다고 한다. 예상외로 개똥지빠귀가 이겼다.

사슴이 돌아와 확인 결과를 얘기하자 모두가 다 깜짝 놀랐다. 아름답고 조용한 개똥지빠귀의 노랫소리가 그 우렁찬 코끼리 소리보다 더 멀리 나간다는 사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 개똥지빠귀가 말했다. “사실 우리 개똥지빠귀는 소식을 전달하는 책임자가 있지. 그래서 우리 중 하나가 노래 부르면 다른 개똥지빠귀가 그 노래를 듣고 전달해 주고, 그 소리를 들은 또 다른 개똥지빠귀가 또 그 노랫소리를 전달해 주는 거야. 그래서 온 숲속은 삽시간에 노랫소리로 가득 차게 되지”

이게 바로 연합, 하나됨의 힘이다. 성경은 말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전4:9-10),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하나님과의 연합, 하나됨, 이게 예수님의 힘이고, 기쁨이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오합지졸에 불과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됨으로 아말렉 대적과의 싸움에서 이긴다. 하나된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지구상의 모든 나라 중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나라다. 남북이 분열된 지 70년 넘은 것도 창피한데 동서간의 분열, 이념으로 인한 분열, 세대간의 분열로 싸워도 이렇게 치열하게 싸울 수 없다. 과거에는 북한의 도발에 여야가 싸우다가도 멈추고 같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여야가 싸우다가 적당히 타협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갈 데까지 가겠다는 것, 국가의 위신 따윈 고려 대상이 아니다. 오직 자기 살길만 찾는 정치지도자들, 너무 창피하고 한심하다. 전 세계에 이렇게까지 싸우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하나되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 동호회가 참 많다는 거다. 옛날에는 해병전우회, 의사회, 약사회, 호남동호회, 민주산악회 정도였다면 지금은 호박 심는 사람은 호박 심는 사람끼리, 가지 심는 사람은 가지 심는 사람끼리, 오이 심는 사람은 오이 심는 사람끼리, 토마토 심는 사람은 토마토 심는 사람끼리, 화물트럭은 화물트럭대로, 버스는 버스대로, 기차는 기차대로, 비행기는 비행기대로, 파일럿은 파일럿대로, 소나타는 소나타끼리, 카니발은 카니발끼리 뭉친다. 이종격투기동호회, 번지점프동호회, 노래방에 죽고 산다 동호회, 자살동호회, 자동차 튜닝동호회... 문제는 끼리끼리만 모인다는 것, 취미가 다른 사람, 생각이 다른 사람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되기를 기도하신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 하나님과 하나됨, 이게 주님의 큰 기쁨이었다. 주님은 제자들도 그 기쁨으로 차고 넘치길 기도하신다. 루터(M. Luther)는 그 하나됨을 ‘즐거운 교환’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죄와 죽음과 저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리스도는 은혜와 생명과 구원으로 충만하신 분, 신앙이 그 사이에 개입되면 죄와 죽음과 저주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은혜와 생명과 구원은 우리 것이 될 것”이라며 그걸 ‘즐거운 교환’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고, 나의 저주는 예수의 저주가 되는 것, 예수의 은혜와 구원이 나의 것이 되고, 우리의 죄와 죽음은 예수님 것이 되는 이게 즐거운 교환, 하나됨이다.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3절), 차고 넘치는 기쁨, 이런 분위기일 것 같다. 우리도 기쁨으로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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