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 승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신다. 누가 봐도 예수님의 완패, 참패 같은 끔찍한 십자가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내가 이겼으니 담대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담대하라’는 표현은 구약에 9번, 신약에 2번, 11번 나오고, ‘담대하여’가 6번, ‘담대히’가 24번까지 합하면 총 41번 나온다. 가장 먼저 나오는 건 민수기 13장 20절이지만 제일 인상깊은 것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 명령을 꽉 붙들었다는 것이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31:6) 바로 다음 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고 한다.

40년을 서포트 역할만 하던 여호수아를 향한 모세의 명령이 아니라 이건 하나님의 명령이다. 신명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신31:23). 이 명령이 여호수아서에서도 강조된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1:6),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7),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광야 시대의 마인드를 버리고 새로운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말씀인데 말씀을 잘 보면 “담대하라”는 명령은 대체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의 말씀과 짝을 이룬다. “내가 함께하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 성경에 나오는 약속 중 가장 많이 나오는 약속이다. “내가 함께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담대하라” 그러신다.

풍요로운 도시 문화를 이루었던 가나안의 7족속, 철병거로 무장한 거인들, 요즘 말로 하면 핵무기로 무장한 선진국 같은 그들이 광야에서만 40년을 산 이스라엘 백성이 오면 쳐서 멸망시키겠다고 벼르는 상황이다. 그들을 돌파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사 훈련 한 번 받은 적이 없는 오합지졸,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여호수아 1장만 해도 3번이나 “강하고 담대하라”고 한다. “주저앉을 이유 없다,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얼마나 확신했을까? 여호수아도 같은 말을 한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서서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수10:25).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모세가 하고, 모세가 한 말을 여호수아가 똑같이 한다. 이게 바로 ‘제자화 사역’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게 된 비결이다. 우리도 이래야 한다. 모처럼 경마장이 쉬는 날, 말들이 모여 말하는 유형에 따라 말들이 싫어하는 인간상이 무엇인가 여론조사를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동상은 말 바꾸는 인간, 말 머리 돌리는 인간이고, 은상은 이 말 저 말 왔다 갔다 하는 인간, 말허리 자르는 인간이며 금상은 말꼬리 잡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인간이었단다. 말이 씨가 된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말씀을 나누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담대하라”는 명령은 바울에게도 임했다.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미결수로 로마 군영에 갇혀있는데 로마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만 점점 다가온다고 느낄 때, 유대인들이 죽이겠다고 난리칠 때다. 그때 함께 주신 말씀이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였다. 2년 후에 로마로 가지만 할 일이 있다는 것, 사명이 있고 ‘내가 함께하니 담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본문 33절에서도 “담대하라”고 하셨는데 바로 앞 절에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32), 제자들이 흩어져 혼자 있게 되실 때였지만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 제자들의 배신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뜻이다.

혹시 배신당한 적 있나? 당해본 자만 아는 고통이다. 믿은 만큼 배신의 고통은 큰 것, 예수님도 3년 이상 동고동락한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기에 그 고통은 대단했을 것, 그런데 감내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거다. 임마누엘의 확신이 배신의 고통을 이기게 한다. 고통은 잠깐이지만 임마누엘은 영원한 것, 혹시 배신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더라도 그 고통보다 더 큰 임마누엘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임마누엘의 약속은 동행의 약속,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임마누엘의 확신이 이기는 힘이다.

응답하리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절),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받을 것,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하셨다. “구하면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반복하며 예수님은 고별설교에서 기도가 강조하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14:1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16:23-24).

응답받는 이유도 밝히셨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27절), 먼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라고 하셨는데 사랑하면 듣는다는 말씀이다. 경험해서 알지 않나? 사랑하면 들린다. 그리고 사랑하면 응답한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로 믿은 고로’라고 하셨는데, 믿으면 응답있다는 말씀이다. 작은 믿음이라도 괜찮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이면 응답하신다.

예수님은 14장부터 계속 기도를 말씀하면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를 강조하셨다. 이건 신앙생활에서 너무도 중요한 기도의 원리다.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라고 하셨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히4:16)이라고 했다. 성경의 약속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응답과 더불어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하셨다(24절). 여기서 ‘충만하리라’는 ‘플레로오’(πληρόω)의 완료 분사 수동태, 수동태는 기도의 결과로 오는 충만한 기쁨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신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응답받는 기쁨, 충만한 기쁨, 이건 약속이고 축복이다.

언제든지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 응답하길 좋아하시는 분, 그래서 바울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다(빌4:6). 중요한 것은 확신이다. 확신만 분명하면 못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9:23). 어떻게 조지 뮬러는 평생 5만 번 기도 응답받고 ‘기도의 아버지’라고 불렸을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왜 하루 세 시간을 기도했을까? 기도하면 응답받고, 기도해야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담대하라.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닥칠 일들이 엄청나다. 제자의 배신, 체포, 구금, 심문, 폭행, 조롱, 모함, 무고, 흑색선전, 단죄, 그리고 처형, 힘 가진 자들의 대규모 여론몰이와 속전속결식 공세 앞에 한 차례의 저항도 없이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짧은 생을 마감하시기까지 숨 가쁘게 일어날 일들,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지만 담대하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이기셨다는 거다.

십자가를 앞둔 목요일 밤,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한다. 세상은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작전계획을 다 마치고 출동 명령만 기다리고 있을 시간, 이에 맞서 예수님을 보호해야 될 제자들은 근심에 쌓여 있다. 한숨만 쉰다. 불과 몇 시간 후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2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고대로 다 달아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에 못받혀 죽임 당하신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끝이다. 예수는 죽고. 예수의 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이겼다”고 하신다. ‘이겼다’는 헬라어 ‘니카오’(νικάω)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다. 승리의 여신 ‘니케’와 상표 ‘나이키’ 때문이다. 요한일서에서는 여러 번 승리자 되신 예수님을 말한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급기야 요한은 선언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4-5), 예수님이 니케(νίκη), 나이키(nike), 승리자이시다. 예수님이 이긴 세상은 그냥 세상이라 불리거나 흉악한 자, 악한 자라 불린다. ‘이기었느니라’는 시제도 의미가 있다. 헬라어에서 완료형, 과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서술한다. 예수님의 승리는 앞으로 있을 부활 이후가 아니라 이미 일어났다. 그 승리는 성육신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예수님은 이미 승리자이시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밑으로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 십자가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패요 수치요 형벌이지만 이 길이 승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십자가의 길이 부활의 길이요 만왕의 왕이 되는 영광의 길, 그래서 피하지 않으셨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지만 그 어떤 시도도 하시지 않고 군중들과 지도층과 로마정권과 그 군대와 맞서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의 형태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 또한 승리자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승리자, 그렇다면 “피하라, 타협하라, 모른 척하라, 부인하라, 기억나지 않는다 하라, 아부하라, 너도 돈을 뿌리고 뇌물도 쓰라, 사서 고생하지 말라, 도망가라” 등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유혹과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계시록에 보면 요한은 ‘이기는 자’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7),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11),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17),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26), 사데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3:5), 빌라델비라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3:12),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다(계3:21).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향한 성령의 말씀을 쓸 때 한 마디로 ‘이긴 자’에 꽂힌 사람처럼 “이기는 그에게는...”을 강조하며 썼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아프리카의 영양(antelope)은 가장 빠른 사자(lion)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먹혀 죽는다는 것을 잘 안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사자도 가장 느린 영양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가 영양이건 사자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해가 뜨면 그저 달리면 된다.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담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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