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배신자 개념은 어떤 일에 뜻을 같이하다 그 정신에서 돌연 거부하고 떠나는 사람을 말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처음부터 반대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은 양심이나 도덕적으로, 사회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뜻을 함께 같이 하다 그 뜻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면, 그것을 배신, 또는 배반이라 하며, 그 행위자를 배신자, 또는 배반자라 한다. 이런 배신자 행각은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았고, 이 시대에도, 시간적으로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배신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결과를 낳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크리스챤이라 해도 인간이기 때문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유혹에 빠져 조금만 믿음을 잃으면 그 역시 배신자로서 낙인찍혀 살아가게 된다. 믿음, 또는 말씀을 배신하여 이런 변질된 삶을 살아갔던 예는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담이 그 첫 예가 된다. 하나님은 최초 인류를 창조, 즉 아담을 만드시고, 이브를 배필로 주셔서 그 둘은 에덴동산에서 낙원생활을 즐겼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다. 즉, 하나님, 그리고 그 말씀을 배반한 것이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행복이라는 축복의 영역에서 쫒겨나게 되었고, 수고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신자들이 받은 결과였다. 그 후 그의 불순종을 통해서, 축복이 무엇이며, 감사가 무엇이며, 행복이 무엇인지, 나아가 악은, 죄는, 죄값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인간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극복 할 수 없는 그런 형벌을 받게 되기도 했다. 배신하면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솔로몬은 엄청난 복을 받은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지 않고, 인간 편에 서서 통치하다 국가가 분단 되게 되리라는 죄값을 받게 되었다. 그 죄값은 고스란히 그의 아들에서 받아, 결국 나라가 두 조각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 잘 안다. 그렇게 분단되어 있던 북조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그리고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6년에 신 바벨론에 의해 종말을 고하게 되고 말았다. 북조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대의 멸망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파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아 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을 어김없이 지키시는 분인데, 인간은 배신하여 그 약속을 지키지 않다가 국가가 망하는 그런 결과를 맞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최대 배반, 배신의 역사는 1세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가리욧 유다에서 볼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때, 많은 무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다 하나 둘씩 떠나 갔던 일이 있었다.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들도 가려느냐?” 이때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한복음 6:68). 그렇게 말하던 베드로도 예수님의 최후 순간 스승을 배반하여 부인하기도 했다.

아담의 배신으로 인류에 죽음이 들어 왔듯이, 가리욧 유다의 스승 배반으로 인해 그는 목 매달아 스스로 죽고 말았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신하면 이러한 무서운 결과가 운명적으로 나타나게 됨을 배우게 된다.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그것도 더욱이 소위 믿는 성도들 가운데서 말이다. 그런 배신은 주로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교묘한 방법으로 배신의 역사를 써 가는 인간들이 많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을 포함하여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진화론 같은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창조의 능력을 부정하므로 배신하는 행태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연을 포함하여 인간을 창조했다 하는데, 이를 완전히 뒤집어 진화를 통해 오늘의 인간이 되었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는 기색이 이 진화론 안에는 전혀 없다.

그뿐이겠는가? 유신진화론을 들고 나온 자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자들이다. 성경은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는데,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오히려 진화론자들의 논리를 더 믿어 하나님은 진화를 통해서 인간을 창조했고, 지금도 진화를 통해 창조하고 계신다는 “ing”형 창조진화 논리를 무슨 만고불변의 진리인양 외쳐대고 있다. 자신들 스스로 경험을 강조하면서도 경험도 못하고, 과학을 내세우면서도 과학적 증명도 못하고 있으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배신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배반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배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배신행위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아담의 죄의 유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느 순간 의심하고, 어느 순간 부정하고, 어느 순간 불신하는 생각들이나 행위들을 곧 잘 하게 된다. 그 때부터는 인간 자신이 주인이 되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그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비판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현상은 탁상에서 논리 관계에만 신경쓰는 학자들, 특히 신학자들에게서 나타난다.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에게는 그런 비성경적 관념을 가질 환경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 물론, 기본적으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목회하지 않는 신학자들이 주로 관념론적 행태에 빠져 흔히 비성경적 주장을 한다. 신학자는 신학자 다워야지 성경을 가지고 이리 저리 뜯어 짜맞추기하여 비성경적 해석을 하거나 말씀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바로 전달해야지 왜곡, 또는 인간 뜻대로 해석하는 유신진화론자들은 궤변 철학자이거나 이단이지, 그게 신학자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러므로 목회자 포함, 소위 신학자들, 그 중에 평신도만도 못한 신학자들, 좀 겸손해야 한다. 학위 가졌다고, 교수라고 우쭐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한없이 넓어 똑똑한 사람들이 널려있음을 두 눈으로 보고 살아야 한다. 골짜기 신앙가지고 외눈박이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성탄절 앞에서는 좀 자신의 생각, 사상, 능력, 양심을 좀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배신하는 자들의 사고방식, 지식을 말씀의 능력으로 뜯어 고쳐 되돌이키기 위하여 고통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 나라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오신 것을 좀 묵상하는 순간을 가져 보자. 아래는 배신자들이 하는 일에 대해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진화론자와 유신진화론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배신한 이단자들이다.

“화 있을 것이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태복음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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