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모든 사물과 현상을 평가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특히 단어 같은 경우 개념 파악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어가 포함하고 있는 내용 파악을 먼저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단어에 대해 개념에 근거하지 않은 채 너도 나도 말하는데, 그런 경우, 내용이 각자의 주관대로 이해되어져 말하기 때문에 정확한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잘못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어 개념부터 먼저 확실히 한 후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국어학자, 전체적으로 말하면 언어학자들은 사전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다 그런 이유에서다.

먼저, 사랑에 대해 말한다면, 이 단어를 한국 사람들은 두루뭉술한 입장에서 이해하여 그 뜻을 정확히 나타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사랑”을 주제로 설교 말씀을 듣고 나오면서 어느 청년이 어느 자매에게 “사랑합니다” 하면 그 의미 파악이 매우 애매하다. 설교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그런 사랑을 가지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남녀간에 애정의 감정이 깃든 사랑을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이래저래 오해를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할 수 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와 같은 모호한 개념을 없애고,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세 가지로 나누어 사랑에 대해 말했다.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헌신적, 자비스런 사랑을 말할 때는 아가페(ἀγάπη), 남녀 애정의 사랑을 말할 때는 에로스(ἔρως), 그리고 친구간의 사랑은 필레오(φιλέω)로 구분하여 말했다. 단어의 의미대로 말하니 오해할 일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스에 수사학(Rhetoric), 또는 논리학이 발전하여 수많은 철학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다.

또, 의에 대해 말하면 성경에서는 ‘righteousness’를 말하는데, 이는 신앙, 믿음을 말할 때 ‘righteousness’를 쓴다. 사회적 의를 말할 때는 ‘justice’라 하며 보통 정의라 한다. 사회정의라 할 때, ‘social justice’라 하는 것 잘 알 것이다. 정의는 인간의 도덕생활, 특히 행위에 대해 말할 때 적용되는 단어다. “바름” 또는 “선한 행위에의 곧음”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올바른 도덕적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과 정의에 대해 말할 때는 이와 같은 개념을 분명히 하고 해야 한다.

사랑과 정의는 미국의 윤리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의 신학적 주제다. 그는 사랑을 기독교 윤리적 입장에서 설명하였는데, 사랑을 모든 자연, 우주만물을 이루는 기본적으로 영적, 정신세계의 실체라 말한다. 그래서 그는 사랑은 삶의 기본법(Love is the basic law of life)이라 하였다. 태어남과, 현실적인 삶,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사랑에 의해 형성되고 움직여진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현실의 조건에만 관심을 두어 내면 세계의 영적 정신적 가치는 잘 알려 하지 않는다. 그나마 여기에 눈 뜬 사람들이 크리스챤들이다. 그러한 사랑은 시편 19:3-4의,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끝까지 이르도다”와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봄이 되면 얼었던 대지가 따뜻한 공기로 소리 없이 녹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 사랑이 바로 그런 것으로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 이상의 사랑의 가치를 이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한편, 고대 중국의 철학자 맹자는 의를 강조했다. 공자는 인(仁)을 강조했으나, 그의 제자 맹자는 의를 강조하는 철학을 했다. 스승을 따라, 인의를 가르쳤지만, 특히, 의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에 대한 한 예가 있다. 하루는 맹자가 위나라 양혜왕을 만나게 되었다. 대학자이므로 오라가라 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함께 만났을 때, 양혜왕은 “어떻게 하여야 이 나라가 이[利(益)]를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맹자는 “왕은 어찌하여 이(利)”를 묻습니까? 의를 물어야 합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개인은 물론, 사회나 국가가 의롭게 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도덕적 질서가 우선적으로 확립되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중국의 공자나 맹자는 물질의 세계보다 정신 세계의 도덕 질서가 인간 삶이나 사회 및 국가에 우선함을 가르쳤다.

인간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출발과 종말이 모두 물질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탐욕 때문에 타인의 것을 빼앗는 일들, 물질에 도취되어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일들, 마르크스 같은 이는 아예 물질이 역사와 우주를 이어가는 본질이라 강변하기도 했다. 그의 논리는 무서운 전쟁을 유발했고, 그러한 전쟁은 수천만 명의 인명을 살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투쟁, 갈등 같은 것은 모두 의가 아닌 이를 먼저 앞세우기 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은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

지금 사랑과 의에 대해 말했는데, 그렇다면, 사랑과 정의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니버는 “개인의 문제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해결하면 된다. 그러나 집단이나 그룹은 그룹 에고이즘 때문에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정의로 해결해야 한다. 즉,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라인홀드 니버의 사랑과 정의의 역활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니버는 개인의 죄성의 문제는 사랑으로 변혁시킬 수 있지만, 집단 공동체의 죄성은 그룹 에고이즘때문에 사랑으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고 강제성을 의미하는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정의는 사랑의 근사치라하여 정의 역시 사랑이 가지는 가치를 포함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즉, 사랑이라 하여 무조건적인, 무책임적인, 도덕에 대한 무개념적인 것을 말하지 않는 다는 것을 가르친다. 사랑의 힘은 정의의 힘을 빌려 실현되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보면, 사랑이나 정의가 없는 사건 해결도 많았는데, 이는 대부분 불법 무력에 의해 나타난 결과들이고, 사랑은 하되 정의가 없으면 책임감이 없어 문제가 되플이되는 현상을 초래하기 쉽다. 문제 해결에 있어서 잘못에 대한, 또는 불의에 대한 회개나 반성 같은 돌이킴의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제자리 걸음으로 정당한 효과를 얻을 수 없어 소멸되고 만다.

예수님도 사랑을 하셨는데, 그냥 하지 않으신 것을 볼 수 있다. 회개하고 반성하면 용서하여 주셨다. 사건에 대한 태도를 보시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라든가, “네 믿음이 네 죄를 사했다”라고 하셨다. 회개가 없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신 것이다. 의가 없는 사랑은 사랑의 본질로서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아가페, 즉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자비일지라도 정의가 그 사랑 내면에 존재하지 않으면 온전한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을 말할 때는 항상 정의는 사랑의 근사치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회개나 반성 없이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논리적으로 합당치 않은 일을 하는 자들이 많다. 사랑과 정의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율법은 정의를, 복음은 사랑을 위함이니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다(마5:17).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린도전서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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