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어떤 새가 있었다. 발밑에 먹을 것이 많아 그저 땅만 뒤적거렸다. 그렇게 살다보니 날 필요가 없어져 날개가 점점 퇴화 되었다. 가까운 것만 보면서 시력도 약해져 멀리 있는 것은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새는 닭이 되었다. 또 한 마리의 새가 있었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높은 가지 위에 올라앉았다. 발밑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먹이까지 보였다. 창공을 가르며 먹이를 낚아챘고 날개는 점점 힘이 생기고 눈도 더 좋아졌다. 그 새는 독수리가 되었다.

어떻게 살고 있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적당히 적응하며 살아가는 닭보다는 하늘을 비상하는 독수리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늘 소망을 품고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독수리가 아니라 닭이 될 것만 같다. 실족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6:1), 근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14장에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절)고 하셨는데 그 후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하시고, “‘변호사’ ‘대언자’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그러면 시공에 얽히는 한계가 없을 것이니 근심할 이유가 없다”고 하시고, “내 안에 거하면 된다”고, “우린 영원한 친구 사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절망이라는 생각 때문에 여전히 근심하고 있다.

이제 주님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신다”(7절). 예수님과의 이별을 제자들은 낭패라고 여기지만 예수님은 유익이라 하신다. 그리고 그 유익은 당신이 떠나면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라 하셨다.

진리의 영이 오실 것이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 예수님은 보혜사를 ‘진리의 성령’이라 하신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성령의 이름, 요한이 4장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절)라고 표현했던 바로 그 ‘진리의 영’이다.

묻는다. 오병이어 때 사용된 빵이나 주의 만찬 때 사용되는 빵은 일반 빵과 뭐가 다를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성령의 임재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 그런데 그 성령의 임재가 단순히 배 불리는 빵이 아니라 살리는 빵이 되게 한다. 성령의 임재가 없으면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공갈빵일 뿐이겠지만 성령이 임재하시면 거짓이 아니다. 허상도 아니다. 성령은 진정한 생명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시다.

또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아들인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이듯 자신과 제자들이 하나라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이렇게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 그래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라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오신 영이시다. 14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기도응답으로 오신다고 했고(16절), 14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다고 했는데(26절) 15장에서는 ‘내가 보낸다’고 하셨다(26절). 그리고 15장에서는 주된 사역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라 했다(26절). 그래서 성령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진리의 영이시라는 말이다.

사도행전을 보라. 성령은 철저히 예수님을 증거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성령 사역을 기적이나 병 고침 그리고 은사라기보다 주된 사역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한 마디로 ‘성령 행전’, 자세히 읽어보면 기적이나 병 고침 등의 능력은 죄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다. 성령이 하신 일로 기록되지 않았다.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도 ‘성령의 능력으로’라고 하지 않았다. 누가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었고, 베드로의 그림자나 바울이 지닌 수건을 통해 또 사도들의 능력을 통해 병 고침이나 귀신이 쫓김을 받았다고 했다. 성령과 무관한 일인가? 아니다. 그런데도 성령이 하셨다고 하지 않는다. 성령이 철저히 예수 증거하는 일에만 집중하셨다는 뜻이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도 마찬가지다. 그날 성령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주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 방언을 주셨다. 왜? 예수님을 알고 믿게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성령과 방언이 임하여 유대교의 경계선을 돌파하고, 이방인의 경계를 돌파하고, 에베소의 침례(세례) 요한의 침례(세례)만 알던 소수 종파의 한계를 돌파하고 예수님을 만민의 구주로 선포한 것이다.

성령은 사도들과 스데반, 그리고 바울을 충만하게 하여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다. 빌립에게는 어디로 가라 지시하고, 베드로를 각성시키고,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세우셨다.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것, 성령은 오직 예수를 증언하는 진리의 영이시다.

그리고 그 증언은 교회 안에만 국한된 증언이 아니다. 온 우주를 다 포함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8:6),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3) 만물을 만드신 분,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 그리스도를 그런 분이시라고 증언하시는 성령, 그래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근심이 기쁨 되리니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듣고 있는 제자들이 얼굴이 확 펴져야 하는데 아니다. 점점 더 어두워진다.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16:6). 그리고 20절 이하를 보면 ‘근심’이란 단어가 연달아 나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16:20), 요한복음에 24번 나오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근심이 기쁨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16:21),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16:22)

여기서 근심은 고통이나 슬픔(pain, sorrow), 제자들은 근심하는 정도가 아니라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들의 이 근심, 이 슬픔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까? 그보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신세 한탄 내지는 장래에 대한 걱정 때문은 아닐까? 오히려 그런 것 같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예수님은 인간의 이런 이기적인 마음도 다 품어주신다. 그래서 고별설교에서 예수님은 섭섭하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이유가 있으니 계속 근심하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고 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6:1), ‘실족’의 헬라어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 ‘걸려넘어진다’는 뜻이다. 연상되는 단어는 ‘스캔들’(Scandal), ‘추문’이나 ‘충격적인 사건’을 뜻하는데 이 단어는 십자가와 관련해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여기서 ‘거리끼는 것’이 바로 ‘스캔들’이다.

당시 제자들에게는 근심할 만한 거리끼는 것이 있었다. 출교와 죽임당함이다(16:2). 둘 다 끔찍하다. 핍박으로 인해 흩어지기는 했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주로 도시의 한 곳에 몰려 살았다. 유대인타운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관계, 결혼, 사업, 예배와 축제 등 대부분이 이 유대인 사회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출교는 저주나 다름없었다.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과 대화도 못하고, 일절 상종할 수 없다. 그런데 때가 되면 원수들이 저들을 파문(破門)할 것이고 죽이려 할 것이다. 시험이 닥친다는 말씀인데 복음서를 쓸 당시 요한공동체는 이미 그 상황이었다. 회당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유대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심지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라는 태형이나 극단적인 경우 순교적 상황까지도 감당해야 했다.

그걸 아셨기에 예수님은 고난에 대해 미리 설명하셨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16:4), 고난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것, 우연이나 무기력으로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그리고 이 고난과 어려움을 돕기 위해 성령이 오신다고 하신 거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는 것, 고난도 아픔도 다 하나님의 통제권 안에 있다는 말씀이다. 기억하라. 지금 내가 겪는 우여곡절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일 뿐이고, 이미 주님이 말씀하셨던 대로이며 성령이 힘이 되실 것이다.

세상이 우리 편이 아니기 때문에 고난은 계속 될 것이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세상(16:3), 어린아이의 무지에 대해서 느끼는 어른의 연민과 같은 자세로 대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죽으면서 원수들을 용서했던 그 자세여야 한다. 세상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에, 실상을 알지 못하기에, 무지하기에 맹목적이다. 우리의 선한 의도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악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저들이 무지해서 그러는 것이로 생각하면 용서할 힘이 생길 거다. 하나님도 그래서 용서하신다.

앞으로도 “누가 옳으냐?”라는 정당성의 문제로 시비가 생길 거다. 유대인들은 제자들을 추방하고 심지어 죽이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16:2)고 했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폭력과 살인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할 거란 말씀이다. 마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불공정이나 폭력성을 미화하기 위해 상투적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였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실족하지 않기 위해 정당성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상대방의 허위를 드러내고, 내가 옳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요한공동체는 지금 쫓겨났다. 패배자처럼 보인다. 또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아도 외롭고 힘든데 확신마저 없다. 그러니 실족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기억하라. 믿음은 투쟁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세상의 우상이나 사상이나 이념이나 가치관이 옳지 않다는 선언이고 선전포고이다.

앞으로 세상은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더 흔들어 대겠지만 흔들리면 안 된다. 세상은 교회도 다르지도 않다고, 나은 게 없다고 유죄 선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들에게 심판권을 줬나? 심판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꼭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성공이나 승리가 곧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의 선진들이 세상적으로 성공했나? 오히려 실패자들 아니었나? 세상에서도 위대한 작품이나 사상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거나 박해를 받았던 사례가 무수히 많지 않나? 힘들고 어렵더라도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확신으로 살아야 한다. 어떤 근심이든 주님은 근심이 기쁨 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와서 세상을 책망하리라

이어서 예수님은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16:8)고 하셨다. 성령이 죄와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 세상과 맞서 그리스도를 위해 소송을 담당하신다는 의미, 성령이 약자의 변호사처럼 오신다는 뜻인데 이 8절은 성령이 검사처럼 세상을 기소한다는 뜻이다. 교회를 통하여, 성도들의 입을 통하여, 그것이 예언이든 설교이든, 성령이 죄를 죄라고 규정하고, 의로움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고발하고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이건 교회에 위임된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더 거세게 교회를 적대시 할 것이다. 그런데 진보든, 보수든 우리가 치우치면 안 된다. 보수나 진보 양쪽 모두에게 그 만큼 실망했으면 할 만큼 한 것 아닌가? 명심하라. 야보고서에 보면 “세상과 벗 되지 말라”(4:4)며 그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그리고 오직 성령! 성령의 인도하심에만 민감해야 한다.

한국교회 초기 지도자 중 최권능 목사는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했다. 평양 거리를 걷다가 말 탄 일본 순사가 오자 그에게도 “예수 천당”을 외쳤다. 놀란 말이 펄쩍 뛰어 말에서 떨어진 순사가 곤봉으로 배를 찔러도 찌를 때마다 “예수 천당”을 외치고, 등을 내리쳐도 “예수 천당”을 계속 외쳐 “다른 말은 할 줄 몰라?” 소리치자 “내 안에는 예수로 꽉 차 내 몸을 건드리기만 하면 예수밖에 나올 소리가 없소. 북을 치면 북소리밖에 안 나듯 내 몸을 건드리면 예수밖에 나올 소리가 없소이다"라고 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이 가장 위대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명심하라.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셨다. 진리의 영,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며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실 것이다. 그 성령으로 충만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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