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다. 누구나 나름대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스스로 답변한 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현재의 삶은 자신이 과거에 찾은 삶의 방식의 결과물이다. 자신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가게 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에 머물다가 나오시면서 배가 고프셔서 무화과나무 쪽으로 향하셨다. 열매를 찾을 수 없자 다시는 이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며칠 후 같은 장소를 지날 때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린 것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이때 예수께서는 우리의 삶을 운영하는 아주 중요한 방식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막 1:24)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다가올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찾은 방식대로 그것을 지향하면 그대로 실현된다.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 앞에서 찾는 것이다.
이대주 – 선한 사마리아인 수업
흥미롭게도, 요나서에서는 요나를 단 한 번도 예언자로 언급하지 않는다. 요나는 전통적인 예언자들과는 구별되어, 전혀 다른 모습의 예언자 이미지로 제시된다. 요나가 전통적인 예언자였다면, 그는 불순종으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마치 다윗이 죽을죄를 범하고 죽음을 면하듯이, 심판 그리고 심판을 당연히 받아야 할 대상자의 용서는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신앙 차원 그리고 그분을 경외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사실, 이것은 불가해한 영역이다. 왜 요나만을 예외적으로 대하셨는지, 왜 니느웨를 심판하시지 않고 예언자를 보내 회개하도록 하셨는지는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다. 이처럼 요나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는 것에 관한 선입관과 상식을 파괴하고, 오직 하나님 안에 신앙의 전부가 있으며 그분으로 신앙이 가능하고, 신앙이란 그분 자체를 바라보는 믿음과 시선임을 잘 보여준다.
엄태항 – 성경이 고인 연못, 요나서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어른들이 십대, 특히 중기 사춘기 청소년의 내면의 삶을 거의 알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중기 사춘기 청소년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인생 경험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 결과, 나는 어른들이 사회에서 양육의 책임을 위임받은 아이들에 대해 배우는 현명한 학생이 되어야 함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한다. 청소년에게는 그들을 돌봐줄 어른이 절실히 필요하다. 일부 청소년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신뢰를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존중과 공감으로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가장 완고한 청소년도 사실은 진심으로 관심을 보여줄 누군가를 찾아 절규하고 있음을 증언할 것이다. 모든 어른은 보호와 돌봄과 따뜻한 애정의 메시지를 더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체계적 유기의 악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일관되게 격려하고 지지하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청소년들을 돕는 최고의 방법은 지지와 헌신의 합창을 다 함께 불러주는 것이다.
챕 클라크 - Hurt 2.0 : 십대들의 치열한 내면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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