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역사를 돌아보면 참으로 훌륭한 지도자가 많다. 그런 훌륭한 지도자들을 일일이 다 말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지도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있다.

국가 지도자는 정치나 사상면에서 건전하고, 의에 대한 용감성을 가진 사람들이며, 시민의 권리나 삶의 가치를 높이고, 통치가 아닌 자신을 희생하여 섬기는 자세를, 그러면서도 지도력을 발휘하여 용기있게 행동하는 일을 한다. 일반인보다 한발 앞서 길을 준비하는 것으로 국민들이 해피하게 생활하도록 정치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중국 고대 철학자 노자는 정치 지도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의식하지 못할 만큼 국민생활을 편안하게 하는 군주가 훌륭한 지도자라 했다. 시끄러움이나 혼란을 야기하는 군주는 훌륭한 지도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나쁜 국가 지도자는 항상 국민들을 위해 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권력행사에 치우쳐 독재자 노릇하며, 돈이나 명예를 누리기 위해 탐욕스런 행동을 한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며, 이를 위해 국민이나 시민들을 힘들게 하며, 전쟁을 일으켜 생명은 말 할 것도 없고, 재산을 잃게 만든다. 또, 그런 지도자를 지지, 동조, 방조하는 것 역시 나쁜 지도자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훌륭한 교회 지도자는 성도들을 바르게 성경말씀에로 이끌어 영혼을 풍성하게 하고, 도덕적으로 바른 사회생활을 하게 한다. 교회 지도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본받아 자신보다 타인, 특히 성도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자세로 섬김의 역할을 다 하는 사람이다. 자신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을 잘 전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훌륭한 교회 지도자의 예를 들기 위해서 최악의 지도자였던 독일의 히틀러를 말하고자 한다. 그는 1차 세계대전 후, 뛰어난 웅변술로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단숨에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업적과 독일 국민의 우수성을 한껏 드높혀 최고의 인기 절정을 이루었다. 그 결과, 독일 국민, 특히 신학생 포함 기독교인들 70%가 나치즘을 지지했고, 극우들은 그를 신격화 하기까지 했다. “그리스도는 히틀러를 통해 오셨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때부터 독재자가 되기 시작했고, 이를 눈감고 동조하는 독일 일반인들과 기독교인을 필두로 안으로는 유대인 학살(Holocaust)을 감행했고, 밖으로는 폴란드 같은 이웃 국가 침공을 시작으로 세계 2차대전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훌륭한 교회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한 인물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신학자 칼 바르트다. 그는 1933년, 독일의 바르멘에서 바르멘 선언(The Declaration of the Barmen)을 했는데, 그 선언은 정통기독교 교리를 중심으로 하고, 전통적 교회관을 유지한다는 선언이다. 이 바르멘 선언으로 바르트는 교수직을 잃기도 했고, 최후 독일 밖으로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유사한 운명을 맞아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로 있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주해 유니온 신학교와 시카고 대학교 신학부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신학자 본 회퍼는 히틀러를 미친 개로 여겨 암살계획에 가담하다 체포되어 결국 1945년 전쟁 끝의 3개월을 앞두고 사형을 당했다. 인간을 신격화하고, 인간주의를 하나님 말씀보다 더 높이고 받들던 극우 기독교 성향과 이를 뒤에서 지지하던 독재자들이 날뛰던 세상에서 바르트나, 틸리히 같은 학자들은 정말 교회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인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교회를 지키고 불의에 대해서는 아니라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거의 1세기 전, 독일의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를 예를 들어 살펴보았지만, 요즈음 우리 사회를 돌아 보면 지지하고 싶은 지도자를 찾아 보기 어렵다. 이는 한국 사회만의 현상을 말하는 것만이 아닌 전 세계를 통틀어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같은 경우, 능력있는 줄로 믿고 어느 정치인을 지지했는데 일하는 것을 보면 영 엉망이다. 눈앞에서 표심 얻으려 별별 공약을 다 내어 놓지만,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다. 국민을 속여 영광을 얻으려 하는 관행들이 지성, 과학과 이성이 발달한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지지자들이 사람 볼 줄 몰랐던 결과다.

교계에서 소위 지도자라 말할 수 있는 인사들 역시 제 할일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불의한 일을 보고도 옳다 그르다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엘리야 시대 왕궁에서 그렇게 우상숭배가 심했어도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왕궁에 초청받아 먹고 마시는 일에 도취되어 우상 숭배에 대한 질타성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은 왕궁에 드나드는 인물이라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종교 지도자로서의 직분과 능력을 망각, 오히려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비위맞추기에 정신을 썼던 것과 같다. 한국 같은 경우, 역대 부당한 정권에 교회 지도자들이 협력하여 사회로부터 비난 받은 일들이 있었다. 교회 사이즈가 크기만 하면 크다는 이유 하나로 어김없이 지도자처럼 등장하여 교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성경적 지도자는 아니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매우 드문 예지만, 어느 원로목사는 불의로 정권잡은 자들이 미국 정부와의 회담으로 가게 되었는데, 동행을 요청하자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잡은 자들과 함께 할 수없다고 거부하였다가 고난을 당한 일도 있다. 이런 분이 훌륭한 교회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성경적 지도자들은 대부분 고난을 당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누가복음을 보면, 그리스도는 권력놀음 하는 자들을 주먹으로 내리 치셨으며, 부자를 공수(빈손)로 보냈다는 말씀이 있다(1: 51-53). 칼 바르트가 독일 자판빌이라는 광산촌에서 광부들, 빈자들 대상으로 이런 성경구절로 설교를 하곤 했는데, 그때 자본가들은 그를 빨갱이 목사로 규정하였다. 지금도 이 말씀을 주제로 설교를 하면, 같은 그리스도인들 임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를 좌파라 하기도 하며 빨갱이라 부르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좌파나 빨갱이로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자들은 정치 이념에 쩌든 자들로서 이념을 복음정신보다 앞세우는 자들이다. 결코 교회 지도자라 말 할 수 없다.

지도자는 국민이나 성도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볼 줄 아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야 하겠다 하면, 그 인물의 성격, 성품, 과거행적, 정신상태, 사상, 판단이나 집행의 능력, 도덕적 자세 같은 것을 면밀히 분석 살펴 보아야 한다. 사실, 이런 부분을 충족시켜 줄만한 인물이 얼마나 되며 몇몇이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 한 지도자를 만드는 그런 노력이 국민들이나 성도들에게 있어야 겠다.

국민들의 수준이 그 나라 지도자의 수준이 아닐까 싶다. 국민에 의한(by) 정치, 국민을 위한(for) 정치, 국민의(of) 정치 지도자를 이 땅에 허락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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