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인간이 산다고 할 때 자기 자신을 말 할 수 있는, 즉 가장 자신있게 자신을 말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 도덕적, 또는 철학적 가치 하나는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한 예로, 정직이라든가, 정의, 협동, 단결, 또는 책임 같은 것이다. 그런 가치 하나 가지지 못하고 사는 것은 참으로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것이 된다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무의미한 삶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교훈, 각 반의 급훈 같은 것을 정해 놓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공부해 왔다. 그렇다면, 21세기 지금 우리는 어떤 도덕적 덕목을 가지고 살아야 되겠는가?

 

구약의 솔로몬은 지혜를 강조했다. 잠언서를 보면 계속 나오는 단어가 지혜다. “지혜를 가져라, 지혜롭게 살아라”를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무엇을 줄까 하셨을 때 솔로몬은 지혜를 달라고 했다. 결국, 그는 지혜자가 되어 지혜로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고대, 주전 4-3세기 그리스 철학자들도 인간들이 지녀야 할, 즉 존재에 도움이 되는 정신적 가치들에 대해 말했다. 주전 3세기의 플라톤이나, 1세기의 키케로(Cicero)도 몇 가지 덕목 중에 지혜를 최고 위에 두었다. 아마도 구약사상, 즉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혜 다음으로, 플라톤은 용기, 절제, 정의를, 그리고 키케로는 정의, 용기, 절제 순으로 가치들의 중요성을 나열하였다. 당시 근동일대 사람들은 이러한 도덕, 철학적 가치를 가지고 삶의 의미와 생활의 질서를 세워 살아 갔다.

그런 가운데, 한편으론 오늘날 “용기”가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주전 400년 경, 아테네의 니키아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하고 있을 때, 양자를 중재하여 평화협정을 맺은 인물인데, 그는 용기를 당시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그는 용기에 대하여 말하기를 용기란 “무엇이 두려움이고 무엇이 두려움 없이 행동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라 했다. 악을 악이라 규정하는 것, 해야 할 일을 두려움 없이 하는 것이 용기있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사실, 주전 4-3세기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일대는 늘 전쟁이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야 할 병사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전쟁에 나가면 죽거나 다치거나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삶에 대한 허무감이 들어 모두가 허무주의(Nihilism)에 빠져 살았다. 세계역사에서 그때 자살이 제일 많았다 할 정도였다. 허무주의가 팽배하면 패배할 수밖에 없기에 이를 극복하고 전쟁에 나가 본인, 가족, 국가를 지키기 위한 용기가 필요했었다. 당시 용기는 그렇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이었던 것이다.

용기에 대하여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정말 용기있는 인물들이 많았다. 용기하면, 전쟁이나 싸움에 주저없이 나가 상대방을 죽이고 이기는 그런 것을 생각한다. 일종의 물리력에 의지하는 용기인데, 그것 만이 용기라면, 코끼리나 하마, 사자같은 동물들의 약육강식 도출현상이 최고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닌 윤리 도덕을 바탕으로 한 정신적 강한 신념의 발현이 용기이기에 그런 부분에 대한 인식론적, 그리고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할 수 있다. 그런 예는 수없이 많다.

우선, 성경에서 다윗왕 시절 나단은 다윗왕의 비리를 정면에서 비난하는 용기있는 인물이었다. 또, 고대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지도자들이 왕궁에서 활개치고 있을 때 이를 지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우상숭배 지도자 850명을 단신 홀로 싸웠던 엘리야, 그리고 신약시대 헤롯의 부정을 말한 세례요한도 참으로 용기있는 인물이었다 할 수 있다.

마틴 루터는 어떤가. 그는 막강한 종교권력 집단이었던 카톨릭 교황청을 상대로 “오로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윗덴베르그 성당 대문에 방을 못으로 박았던 용기있는 행동을 한 사제였던 것 잘 알 것이다. 순교하기를 각오하고 행동한 그 용기는 카톨릭 포함 기독교 역사의 최고 분수령으로 기록되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에 반대하여 활동했던, 그러다 1945년에 사형당한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조선시대 알지도 못하는 미개한 나라 조선에 선교하겠다 하여 풍랑이는 험란한 바다를 건너온 선교사들의 용기, 조선인 순교자들 모두 용기를 가진 인물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 니키아스처럼, 해야 할 일을 두려움 없이 하는 것을 용기라 했는데,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1892-1971) 역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목회자, 그리고 학자로서 용기에 대한 간구의 기도를 했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신앙인들의 용기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21세기 들어 오면서 지금의 인간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하나님은 시대에 따라, 그 시대에 하나님 자신이 “무엇이 필요하는가”에 대해 의지를 나타내시고 스스로 답하신다. 지금은 지식이나 물질에서 부족함이 없는 시대다. 정의에 대한 학문연구도 수천년 동안 해온 결과 바른 정신이나 인격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학문적 논리 역시 인간 기능으로서의 한계점에 이른 만큼, 이제는 다른 가치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말한 용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목회자나 신학자들은 개인자신이나 사회가 개선해야 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일에 대해 비평하거나 지적하는 데에 대한 말을 하지 않는다. 왕궁에서 활동하는 우상숭배, 주술사들에 대해 강도높은 회개를 촉구한 엘리야 같은 정의의 예언자적 기질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 유신진화론 같은 이단사설이 횡행하는데도, 동성애자들이 거리를 활보해도 힘을 합하여 싸우지 않는다. 또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나 이단적 요소가 있는 학설을 주장하는 자들도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니버의 기도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양편 다 용기가 없어 못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21세기 인간, 인류의 영혼을 책임지는 크리스챤들이라 말 할 수 있겠는가?

바울 사도는 네로 황제의 박해 속에 순교하며 로마교회를, 루터와 칼빈은 카톨릭 교황의 교권에 굴하지 않았기에 오늘의 장로교회를, 존웨슬리는 영국성공회가 강도권을 박탈할 때 “세계는 나의교구”라 외치며 성결운동에 앞장서는 용기로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순복음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청교도들의 용기로 미국을 건국했는데 프로테스탄트 당신의 용기지수는 얼마나 되십니까?

“다윗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사무엘상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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