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인간은 살면서 생각하며 살게 되는데, 그 생각의 넓이와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자신을 체크 해 볼 필요가 있다. 우주는 넓은데, 자신은 골방 크기의 관념속에 사는 것은 아닌지 한번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다. 골방 넓이만큼 생각하면 그 사람의 삶의 수준은 그 크기 정도밖에 안된다 할 수 있고, 그것은 그 만큼 삶에 대한 의미와 그 가치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격이 됨을 의미한다. 넓은 사고관을 가지고 살라는 것은 생각하고 이해하는 관념, 범주, 또는 영역을 넓히라는 말이다.

 

이러한 것을 재미있게 잘 설명한 인물이 있다. 주전 8세기 즈음, 그리스인 호머(일명 호메로스)는 2편(1편은 일리라스)으로 오딧세이아 서사시를 썼는데, 거기에는 어떤 관점으로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오딧세우스가 트로이를 함락, 정복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즉 바다를 항해하다 어떤 섬의 큰 동굴에 병사들과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굴에는 외눈박이 괴물이 살고 있었다. 보통 눈이 두 개인데 하나만 있으니 괴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괴물에게 있어서 삶의 환경은 동굴이 그의 세계가 되고, 특히 눈이 하나인 고로 동굴 외 어떤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그런 기능이 없었다. 어쨌든, 오디세우스는 부하 병사들과 함께 괴물과 정말 힘겹게 싸워 겨우 동굴 속에서 빠져 나와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호머의 글을 통해서 세상을 외눈박이 눈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눈을 두 개 주셨다.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 생물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눈을 주셨다. 그것은 두 눈으로 생명을 유지하라는 것이며, 또 인간은 외눈으로 보는 것 같은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고, 외눈 같은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거나 평가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친다. 관념을 넓혀 주관적인 것이 아닌 객관적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인간, 자연, 우주,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라는 뜻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평생 이곳 저곳 여행하거나, 해외로 돌아다니지 않았다. 잘못 이해하면 골짜기 생활을 하여 좁은 소견을 가진, 또는 지엽적 사고를 하는 철학자가 아니었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정신 세계를 꿰뚫어 보는 넓은 학문적 시야를 가지고 있어서 이성주의, 자연주의 철학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 지평을 넗혔다. 세계의 무한성에 대한 인식론적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이에 반하는 예도 있다. 약 300년 전, 조선왕실이나 학자들은 세계국가가 전체 20~30개 국 정도만 있는 것으로 믿었다 한다. 지금의 중국, 일본, 몽골, 동북의 몇몇 국가, 인도, 아라비아 몇몇 국가들로 보인다. 그 중에서 조선이 유교, 성리학 같은 문화와 학문이 우수하게 발달한 나라로 자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중국 다음으로 잘사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인데 그만큼 바깥세계가 크고 무한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목회자와 신학자들 세계에서는 웨슬리가 좋은 모범사례가 된다. 웨슬리는 복음을 전하며 동시에 성령운동을 하면서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목회관념 및 사명에 불후의 명언을 남겨, 오늘날 교회들이 그런 구호를 곧장 자신의 목회신념 및 방법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본다. 결국, 웨슬리의 성령운동을 포함한 복음전도는 영국과 유럽 전체를, 그리고 유럽을 넘어 미국으로, 아프리카로, 그것이 또 아시아로 전파되어 전 세계를 크리스챤화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신학에서 선교사들 역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해외, 오지로 선교가는 선교사들을 보면, 그들은 일찍 복음의 세계에 눈을 뜬 신학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미국인 릴리어스 호레이스(후일, 언더우드의 부인)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 당시, 그녀는 시카고에서 의학을 공부한 아가씨였다. 1800년대 중반 미국 시민들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도 알지 못한 조선이라는 나라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지원하여 단신으로 37세 나이에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그의 생각은 시카고 주변 영역에 묶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기업인인 김우중 회장의 사업경영철학도 눈여겨 볼만 하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라는 것인데, 그는 넓은 사고관을 가졌기에 그는 세계적인 기업가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무한성과 무한한 능력, 무한한 은혜를 알아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후 4세기, 성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 커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측량 할 수 없다”라고 고백했다. 신앙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다 결국,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하는 인물이 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넓은 신앙의 눈을 가지니,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에게 자신의 창조의 세계를 인식하게 하여 스스로 영광받으신다.

둘째, 자기존재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세상모르고 인생을 마치는 것처럼 아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의 아름답고 좋은 것을 주셨는데,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사는 것은 존재자로서의 불행이라 할 수 있다. 목사들은 자신의 처소에서 열심히 목회하고 있어 존경심이 간다. 하지만, 세계관이 너무 좁다. 자기교회 자기 성도만 알고, 본인교회의 성장에만 관심 쓰고, 그 안에서 행복해 하는 그런 면모가 확연히 보인다. 더하여, 성전을 건축하거나, 성도가 제법 많으면 본인이 왕인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목회자들은 자신의 목회하는 교회가 세계 전부인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안타깝게도 진화론자나, 유신진화론자들은 오로지 진화이론만 주장하고 있어서 창조론과 연관된 무수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섭리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치 동굴 속의 외눈박이 괴물이나, 전 세계에 국가가 20~30여 개만 있는 것으로 본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같다 할 수 있다.

셋째, 세계관이 없으면, 무식하다는 무시를 당한다. 모르니까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용서할 줄도 모르고, 관용을 베풀 줄도 모르고, 이해할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고, 잘못한 것에 대한 책망할 줄도 모르고, 돌이킬 줄도 모르는 것은 마음이 좁다는 것이며, 그것은 그만큼 속좁은 인생을 산다는 말이 된다. 예수가 괜히 그리스도인가? 이러한 세계관적 요소의 본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구원할 자가 되는 것이다.

생각의 범주, 마음, 정신의 영역을 넓혀야겠다. 그러면, 자신이 존재하는 존재의 의미와 교훈, 목회란, 또는 목사란 무엇인가와 같은 것을 보게 되고 알 수 있게 된다. 자연과 우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세계관은 무엇인지 연구하여 그것을 배우는 자들이 되어야 겠다.

“세계는 나의교구다! I look upon the world as my Parish!” 나는 외눈박이 지도자인가 두눈박이 지도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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