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피해와 어려운 가정형편 등
하나님 떠난 삶, 일탈·자기비하로 연결
"예배, 멜로디·가사에 국한되지 않아"
삶의 예배로의 초청에 감사를 고백
한성교회 찬양인도자로 알려진 김윤진 전도사가 2024 다니엘기도회에서 자신의 성장배경을 나누며 삶의 변곡점마다 만난 하나님을 간증했다. 김 전도사는 올해부터 미국 달라스 세미한교회에서 예배인도자로 사역을 하고 있다.
모태신앙인 김 전도사는 자신의 모교회인 한성교회에서 10여년 간 찬양인도자로 활동했다. 찬양사역자 정용환 전도사와 결혼해 슬하에 두 자녀가 있다. 김 전도사는 세 자매의 막내이자 늦둥이로 태어나, 사실 세상에 나지 못할 뻔한 일화와 더불어 방황하던 청소년기를 공개했다.
당시 산아제한정책으로 낙태수술이 횡행했고, 어려운 가정형편에 셋째가 부담이었던 김 전도사의 어머니는 여러 번 낙태를 시도하려 했으나 매번 결정적인 계기로 회유됐다. 그렇게 태어난 김 전도사는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를 듬뿍 받아 왔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너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나님께서 너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셨다"고 말하며 늘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찬양을 좋아하시고 잘 부르셨다고 한다.
그러나 김 전도사의 청소년기는 다사다난했다. 김 전도사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시절 내내 학교에서 극심한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하며 자란 충격적인 학창시절을 고백했다. 심지어 중학생 때는 수백 명의 동급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실에서 심한 폭행과 갈취를 당하는 일을 겪고, 이후로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피해 숨죽여 사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IMF 등으로 가정형편은 더욱 어려워졌고, 아버지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오겠다'며 집을 나가셔서 오랫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의지할 곳은 오직 교회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해 주신 목사님, 전도사님,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꾸역꾸역 그 삶을 버텼다.
그러다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배정되어 자신을 아무도 모르는 환경이 되자 그녀에게도 드디어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을 너무나 사랑하게 됐다. 그녀는 우정을 선택하며 교회와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가사도우미 일을 해오던 어머니가 어려워진 가정형편으로 숙식을 제공하는 곳으로 고용되면서 김 전도사도 함께 그 집에서 지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강도 높은 노동과 어머니를 향한 고용인의 비인격적인 태도를 보며 분노가 터지기 시작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과거에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과 아무것도 못한 자신에 대해서도 분노했다.
그렇게 교회에 발길을 끊은 그녀는 일탈을 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몇 번 나가지 않아 퇴학위기인 상황에 술을 싸들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자살 기도가 몇차례 이어졌다. 김 전도사는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렸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나를 채우시고 붙드실 때는 견딜만 했다"면서, "그런데 아무리 즐거운 일을 해도 잠깐이었다. 친구도 있고,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데도 말이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데 너무 멀리왔고, 나는 왕따와 폭력에 시달렸던 패배자고 내게 미래가 없다 여겼다. 살고 싶지 않았다. 누가 나를 사랑할까. 나는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자살 기도하던 날, 김 전도사는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 바늘로 콕 찍은 빛처럼, 폭풍 속에 촛불 하나처럼, 내가 귀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했을 음성이 들려왔다. '윤진아,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나는 어떡하니.'라고. 그러면서 그녀는 성경구절을 인용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18),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4,38,39)"
김 전도사는 그 마음의 음성이 들리고 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그리고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는데,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내가 살아봐야겠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을 위해 죽지 말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그녀는 교회에 나갔고 당시 담당 전도사로부터 "윤진아, 죄는 크고 작음이 없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나아가면 그 크신 사랑에 덮지 못할 죄가 없단다. 그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이야"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 모든 죄와 죄책감에 대한 사슬이 끊어지는 해방감을 느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새 삶을 시작했다.
스무살 때부터 꿈꿔왔던 CCM 사역팀을 맡아 매년 해외에도 몇차례 나가 해외 지체들과 함께 예배 드리며 꿈을 이뤘다. 12년 만에 아버지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 2016년 10월 경, 목에 이상이 생겨 별생각 없이 방문한 병원에서 연축성 발성 장애를 진단 받았다. 담당 의사는 그녀에게 노래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했다. 완치를 장담할 수 없지만, 치료를 시작했다. 1년이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노력했으나, 완치가 불가하고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일주일에 딱 한번씩만 찬양하고 나머지 시간은 휴식하며, 목소리가 나빠지는 속도가 지연되도록 하고 있다.
김 전도사는 "언제는 막 울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하나님은 '너에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영원히 노래할 수 있단다. 왜냐하면 네 삶의 무대에서 나를 노래하고 있잖아' 라고 하셨다. 찬양,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을 인식하며 지내는 삶의 모든 선택과 순간이다. 찬양이 멜로디와 가사에 국한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래, 나 계속 노래할 수 있구나. 감사하다. 그러면서 삶의 예배로 초청해 주시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김 전도사는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예배 중에 이러한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는데 내게 무엇이 아까우실까. 선하신 주님이 내 목자 되시고 내 삶이 그 분안에 있으니 이 또한 선하겠구나.' 이제 '감사'를 고백하게 된 것이다.
끝으로 그녀는 "우리에게 고난은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계절처럼 날씨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그 고난의 이유를 끝까지 알 수 없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시고, 우리는 그 분의 양이다"고 했다.
또한 "살아온 갈피와 은혜마다, 사진첩에 오려붙이며 '그래, 이런 추억이, 이런 은혜가 있었지' 고백하며 손때가 가득 묻은 하나님과 나만의 사진첩 같은 삶이 되길 원한다. 우리는 그 '사진첩'을 통해, 걸어온 길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고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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