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마을에 의좋은 3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장성하자 함께 도시로 나가 살기로 의기투합하고 길을 나섰다. 한참 가다가 3거리를 만났다. 3형제는 서로 어느 길로 갈까 망설이다가 각각 한 길씩 따로 가고 몇 해 후에 한 도시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여러 해가 지났다. 어느 도시에서 큰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한 부잣집에 강도가 들었고, 그 강도가 얼마 후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법정에서 판사 앞에 강도와 강도 만난 집 주인이 함께 섰다. 그런데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 세 사람은 오래 전 각각 다른 길로 가면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던 바로 그 3형제였다. 하나는 판사가 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부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강도가 되어 있었다.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의 민화, ‘세 길’이란 단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살면서 만나는 다양한 길. 어느 길을 가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어떤 길은 판사의 길이고, 어떤 길은 부잣집 주인의 길이고, 또 어떤 길은 강도의 길이다. 전혀 다른 길을 갔지만 언젠가는 한 길에서 다시 만난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만날 길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방향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빨리빨리’가 국민용어이며 새치기, 날치기, 끼어들기가 마치 용인된 꾀처럼 여겨지는 속도 경쟁의 시대를 살지만 ‘시계보다는 나침반’을 보며 살아야 한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중요한 것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라고 했다. 축구선수가 드디어 첫 골을 넣었는데 그게 하필 자살골이라면 얼마나 실망일까? 윳놀이에는 백도가 있지만 인생에는 백도도 없다. 세상의 사람들은 삶의 자세와 속도를 보지만 하나님은 가는 길의 방향을 보신다.
예수님이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날 것처럼 말씀하시자 시몬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36절) 여쭈었다. 이는 우리가 여쭈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베드로의 인생 질문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질문은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해봤을 법한 질문, 반드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인데 질문자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 베드로’로 등장한다. 풀 네임이 아니다. 원래 이름은 히브리식으로는 ‘시므온’이고, 헬라식으로는 ‘시몬’이다. ‘시므온’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다, 주님이 개명하여 주신 이름은 아람어로는 ‘케파스(Κηφας), 게바((כיפא)’, 헬라어로는 ‘베드로’(πέτρος), 고전 그리스어 사전인 Liddell&Scott은 ‘베드로’(πέτρος)는 ‘반석,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πέτρα)와는 구별되어야 할 ‘돌멩이’ 정도라 했다. 당시 베드로라는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시몬 베드로’ 또는 ‘바 요나 시몬’이라 불렀다.
베드로가 어디로 가시는지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고,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신다. 자신감이 충만한 베드로,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지만 또 “주여” 그러면서 지금은 왜 따를 수 없냐고 묻는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우리가 알듯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던 베드로의 장담은 뻥이 되고 말았다. 정반대, 그는 예수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베드로가 큰소리쳐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확신에 찬 의지를 의심하신다. 물론 정원에서 칼을 휘두른 것을 보면 용감한 측면도 있었다. 그저 실수하고 큰소리만 뻥뻥 친 게 아니다. 진실도 있다. 문제는 용기와 헌신이 아직은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3번 부인을 예언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절), ‘진실로 진실로’로 시작된 엄숙한 선언, 사태의 심각성을 부각시킨 말씀이다. 충격받은 베드로는 그 후 말이 없다. 다락방에서 다른 제자들이 자유롭게 대화를 해도 조용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8장 10절까지 베드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래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는 베드로의 인생 질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이 베드로의 인생 질문이 된 것을 이 본문보다는 오히려 라틴어,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쿼바디스’라는 영화에 나오는 상황에서 했던 질문으로 기억한다. 그때 질문을 진짜 베드로의 인생 질문으로 아는 것이다.
1951년에 머빈 르로이 감독이 만든 ‘쿼바디스’, 로마 대화재 사건과 초대교회에 임한 박해를 소재로 한 영화다. 네로는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돌리고 기독교인을 무자비하게 핍박했다. 겁에 질린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나와 정신없이 피신을 하는데 새벽에 칸파니아로 향해 아피아 가도(Via Apia)를 걷고 있을 때 먼동이 터오는 희미한 빛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그 순간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했던 질문이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였다. 주님은 베드로의 물음에 “네가 버린 내 양들을 위해 내가 저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 한다”고 대답하시자 충격받은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 거기서 십자가형으로 순교한다. 그것도 예수님처럼 죽을 수 없다고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부터 이 질문이 베드로의 인생 질문이 된 것이다.
물론 영화 내용이지 성경에 나오는 얘기는 아니다. 실제 일어났던 일인지도 분명치 않다. 이 영화는 폴란드 소설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1895년 작품을 원작으로 탄생했다. 시엔키에비치는 『쿼바디스』란 불후의 명작으로 1905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엔키에비치는 로마의 아피아 가도에 있는 쿼바디스 성당을 방문한 후 영감을 받고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쿼바디스 도미네 성당, 그리스도인들의 지하 무덤 카타콤베(Catacombe) 곁에 있는 작은 성당이다. 성당 입구에 소설 『쿼바디스』를 쓴 시엔키에비치의 흉상이 있고, 성당 안에 들어서면 바로 뒤쪽 가운데에 발자국 두 개가 새겨진 작은 바윗돌이 있다. 베드로를 만났을 때 남겨진 예수님의 발자국이라 한다. 전설이다.
2세기 후반에 기록된 『베드로 행전』에 보면 베드로의 마지막을 영화 같이 만들었다. 위경인데 베드로와 예수님이 로마에서 만나는 사건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베드로가 순교 당한 것은 분명하겠지만 바티칸 대성당이 베드로가 순교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 위에 세워졌다는 것도 확실치 않다. 정경에서는 사도 요한만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다(요21:18-19). 다시 말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의 인생 질문은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길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예수님의 이 대답은 현재의 베드로는 약하고 잠시 후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도 훗날에는 성령의 권능으로 순교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33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지금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 순교의 길이다.
여기서 핵심 단어(key word) ‘영광’이 부각된다. 31절과 32절에 2번씩 4번이나 사용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과는 반대의 의미다. 사실 지금 ‘영광’을 말씀하실 때인가? 곧 배신당하고 부인당하고 십자가를 지신다. 그런데 주님은 일관되게 십자가를 영광이라고 말씀하신다. 죽음이 곧 영광이라는 말씀이다(31-32절). 모두가 불명예, 치욕으로 여기는 십자가를 영광이라 하신 거다.
한 장 전체가 주님의 기도인 17장에 보면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절)라고 기도하셨다. 독일의 낭만주의 문학가 노발리스는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나? 항상 집 아닌가?”라고 했는데 예수께 십자가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통로였다. 그래서 영광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이 하늘나라 집에 가시는 길이기에 영광이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기에 영광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실패요, 고난이요, 죽음이지만 예수님은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에서 승리를 보고 영광을 보고 기쁨을 보신다.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길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니 제자들의 실패는 예정된 수순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두 도망쳤다. 그래도 베드로는 용감한 편이었다. 주님이 심판받는 현장 가까이까지 갔다. 그러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절), 베드로는 어린 여자 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제자들의 실패는 십자가의 길을 영광의 길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영광과 주님이 생각하시는 영광이 다르기 때문이다.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님은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그러셨다. 말씀대로 베드로는 물론 제자들은 훗날 예수님처럼 순교의 길을 간다. 십자가의 길을 영광의 길로 깨달은 거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신 삼종지도’(新三從之道)라는 말이 있다. 남자가 평생 따라야 할 세 가지 말이 있는데 장가가기 전에는 어머니 말을 잘 따라야 하고, 장가가서는 마누라 말을 잘 따라야 하고, 운전할 때는 내비게이션에 나오는 여자의 말을 잘 따라야 한단다. 그래야 삶의 방향이 비뚤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말씀을 잘 따라야 한다. 주님처럼 십자가의 길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영광을 봐야 한다. 그래야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길
본문에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핵심 단어는 ‘사랑’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요한복음에만 소개되는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 주님은 어떤 거대한 이념이나 진리나 신앙의 대 선언을 유언으로 주시지 않았다. 요한복음의 유언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35절)하고 하셨다.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만나 요구하셨던 것도 사랑이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묻고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양무리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사랑은 모든 것의 기원이고 출발이다. 삼위일체를 엮는 견고한 끈도 사랑,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령을 사랑하신다. 사랑 때문에 피차 모든 것을 내어주신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만들고 인간을 탄생시킨 이유도 사랑이다. 돌이켜 보면 성육신도 사랑이고, 십자가도 사랑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 끝없는 사랑, 목숨 바친 사랑이다.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 지하교회의 성도들은 목숨 걸고 신앙생활한다. 침례는 꿈도 꾸지 못하고 세례를 주는데 그것도 함부로 주지 않고, 얼굴도 모르고 소개 받아서 하는 결혼도 믿음이 최우선 조건이고, 찬송가 200-300곡은 보통 외워서 부르고, 먹는 것도 신통찮지만 기도하기 위해 들로 산으로 간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왜 이리도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많을까? 어쩌면 남북한의 경제적 차이보다 신앙적인 차이가 더 크지 않을까? 우리는 함량 미달이 정상처럼 되고 있다. 세상 물결에 휩쓸린 결혼식, 세상에서 승진하듯 수여하는 직분식, 반성해야 한다. 요즘 드라마는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기독교와 동성애 반대자를 이상한 집단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성도들이 드라마를 따라 한다. 침례나 결혼식마저 신자답기보다는 세상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묻는다. 범사에 하나님 우선인가?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나? 쿼바디스는 우리가 외쳐야 하지 않을까? 내 뜻과 내 야망을 외치기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
거짓 사랑이 판치고 있다. 진짜 사랑은 끝까지 가는 것, 이념도 돈도 다 배신하지만 사랑은 끝까지 가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까지 함께했던 자는 이념에 투철했던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던 제자 요한이었다.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였다.
우리는 무엇보다 사랑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이 우리가 예수의 제자됨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기억하자. 서로 사랑이 가장 강력한 선교이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가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며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뜨겁게 사랑하라”고 외쳤다. 요한은 훗날 자신이 남긴 서신을 온통 사랑의 말로 채웠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아예 하나님을 ‘사랑’이라 불렀다. 끝없는 사랑, 그 사랑에 제자들은 사랑으로 충만해졌고, 그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사랑을 나누는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날마다 물어야 할 질문, 세상 유혹이 몰려올 때 물어야 할 질문, 핍박이 몰려올 때도 물어야 할 질문, 내가 약해 쓰러질 때 물어야 할 질문, 가던 길 멈추고 주님 따라가기 위해 물어야 할 질문, 이 질문이 바로 이거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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