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국에서 개최된 로잔대회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있습니다. 먼저 로잔대회의 성격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잔대회를 지지하는 이들이나 비판하는 이들 모두가 이 대회의 성격과 취지를 전혀 모르고 맹목적인 지지를 하거나, 무조건적인 비판을 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우선 오해가 없기 위해 로잔대회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로잔대회는 복음주의 신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 노선에 있는 이들은 로잔대회의 성격과 취지에 대해서 당연히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들은 로잔이 교리적인 굴레에 갇혀 있다고 악평을 합니다. 반면에 개혁주의 신학 노선에 있는 이들은 이 대회가 하나의 퍼포먼스 정도에 불과하고, 결국에는 WCC와 같이 변질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이들은 한국에서 로잔대회를 주최하는 이들에게 연합보다는 교리적 원칙에 입각한 거룩이 우선될 것을 요청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은 반박할 일고의 가치도 없기 때문에 건너뛰고, 그 밖에 다른 이유로 오해가 있는 이들에게 해명하는 작업이 필요로 합니다.
첫째로 언급할 수 있는 비판하는 이들의 오해로는, ‘로잔대회에서 주장하는 통전적 선교는 전도를 약화시킬 것이다’라는 주장입니다. 로잔언약 6항 ‘교회와 전도’에 대한 부분을 보면, “교회의 희생과 섬김의 사명은 전도가 일차적이다.”(In the Church’s mission of sacrificial service, evangelism is primary)라고 명시합니다. 로잔대회가 말하는 통전적 선교의 가장 우선 순위는 당연히 전도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이 모였을 때 당연히 강조할 만한 핵심 내용은 1)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 2)성경의 무오성, 3)복음전도의 사명입니다. 세계교회에 연합 행사만 했다하면, 무조건 WCC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것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입니다. WCC는 종교다원주의적이고 가시적교회일치라는 비판을 받을 분명한 지점들이 있지만, 로잔대회는 그렇게 몰아갈 만한 명분이 약합니다.
둘째로 로잔대회를 지나치게 옹호하는 이들의 오해입니다. 그들은 ‘종종 로잔대회는 개인 전도의 측면에서만 전도를 주장하지 않고, 사회적 구원의 측면을 두루 강조한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로잔대회를 좋게 보이게끔 선전하려는 의도로, 그 내용을 왜곡시킨 겁니다. 로잔언약은 사회구원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해방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사회적 해방과 구원을 절대로 동일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로잔언약 5항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서 “사회적 행동이 전도가 아니고, 정치적 해방이 구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는 기독교인의 두 가지 의무가 된다. 간단히 말하면 구원받은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책임적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명시합니다. 이는 구원 받은 자의 책임적 삶의 자세를 뜻하는 것이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해방신학자들의 ’사회적 구원‘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주의자 칼 헨리나 존 스토트, 나아가 프란시스 쉐퍼 조차도 성도의 책임적 삶과 구제와 섬김의 전도는 강조했던 내용입니다. 이것을 두고 로잔이 개인 구원보다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고 괜히 오해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또한 로잔을 옹호하는 이들이 괜히 진보적인 이들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서 로잔언약의 내용을 ’사회구원‘이라고 확대해서 홍보하면 괜한 오해만 쌓일 뿐입니다. 그런 잘못된 홍보가 오히려 로잔대회의 취지를 호도하고 망치는 주범이 됩니다.
다음으로는 한국에서 열린 로잔대회의 뜨거운 감자가된 동성애에 대한 항목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선전한 부분도 있고,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공존합니다.
특별히 한국 대표단으로 고생하신 유기성 목사님이나 이재훈 목사님은 복음주의 신앙 노선에서 목회하신 교계 지도자들 이시기에, 그분들이 동성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견해는 매우 분명하고 명확합니다. 그리고 이번 로잔대회가 한국에서 열렸기에 한국교회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려하는 이들의 합리적 비판과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꼭 필요한 절차로 생각됩니다.
먼저 선교 대회의 합의나 선언문은 성경의 본문이나, 교리적 신경과 동일한 권위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구속력이 있는 장정의 항목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주의 교회의 연합 대회인 만큼 교리적 디테일함을 갖추려는 시도와 노력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쉬운 부분은 56절과 69절 70절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69절 부분입니다.
먼저 로잔언약 56절이 들어 있는 구간은 “하나님 형상”에 대한 파트를 보면, 성경적 진술(biblical account)란 표현이 눈에 띕니다. 또 69절에 성경적 주장(biblical insistence)이란 말도 상당히 자주 등장합니다. 성경(Bible)이면 성경(Bible)이지 굳이 이렇게 술어가 길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것이 56절 내에 중간엔 위치한 ’젠더’(Gender)라는 통념을 앞서 ’성경적 주장‘과 동일한 가치관으로 다루는 듯한 오해를 양산하기에 충분한 상황입니다. 즉, 젠더는 성경적 용례가 아니고, 오늘날 현대의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범위 안에서의 성인데, 이것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겁니다. 성경을 근거로 말할 때는, 오직 남성과 여성 개념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적 진술 안에서 생물학적 구분 외의 젠더의 구별법을 끼워 넣은 것은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특히 로잔언약에서, 생물학적 성별(sex)과 젠더 성별(gender)은 구별될 수 있지만, 분리될 수 없다(Although biological sex and gender may be distinguished, they are in-separable.)라는 대목은 칼케돈 신조를 연상하게 해서 굉장히 괴기스럽고 불경한 그림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Sex와 Gender가 무슨 인성과 신성이라도 되는 것마냥 작성된 거 같아 해명이 요구되는 대목입니다.
앞서 성경적 진술에 따라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남성과 여성으로 명료한 사실을 명시하면서, 69절에서 왜 이런 허점을 남겨놓았는지 의문이 듭니다. 로잔의 긍정적 영향력을 고려하더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합리적 비판의 목소리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작금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동성애자를 포용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하는 상태가 아니라, 동성애라는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진리를 선포하고 권징으로 다스리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해야 옳습니다. 이번 로잔에서 그 정도까지 확고한 복음적 선언을 기대한 것은 지나친 욕심일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세계 복음주의 교회와 한국교회 사이에 괴리가 존재했음을 발견하는 지점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에서 개최된 이번 로잔대회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됩니다. 세계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연합되어 한국에 모여 시대적 사명을 선언하고, 전도의 열심을 모았다는 점에서도 큰 업적입니다. 이번 로잔대회에 대한 엇갈린 평가 안에서 오해는 걷어내고, 아쉬운 부분들은 극복하고, 잘된 부분들은 격려하며 복음주의 교회들이 공교회성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조건적인 연합과 일치에 목매긴 보단, 교회의 거룩성과 순결을 지켜내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체의 어떤 행사보다 영혼 구원의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번 로잔대회는 성공적이었지만 여기서 방심하지 말고, 특히 WCC를 반면교사로 삼아 로잔대회가 계속 그 초심과 순수성을 유지하며 발전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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