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인과 남편의 대화다. “여보 당신은 내 인생에 로또야” “정말, 그렇게 내가 좋아?” “그게 아니라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잖아?” 이 부부에게 배신감은 그래도 애교 수준이지만 대중들의 인기가 높았던 시저의 권력이 계속 커가는 것을 시기한 원로원은 시저의 심복이었던 브루투스를 보내 그를 살해했다. 그때 믿었던 신복에게 찔린 시저는 죽어가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장 신뢰했던 신복으로부터 배신당한 자의 절규, 이 말은 믿었던 상대에게 배신당했을 때 흔하게 사용되는 대표적인 인용문이 되었다.
본문에 다시 한 번 유다로 인해 빚어지는 비극이 고개를 든다. 11절에도 언급하고 18절에서 또 언급한 것을 보면 그에게 엄청 충격이었던 것 같다. 예언이 점점 더 구체화 된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절)라고 하셨다. 요한복음의 독특한 강조 어구인 ‘진실로 진실로’를 쓰며 유다의 배신에 대한 언급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배신자가 누군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마지막으로 식사하시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이라는 명작이다. 한때 상당수 신앙인들의 집 벽을 장식한 그림, 어떤 성도는 평화롭게 보여서 벽에 걸었다고 했다. 사실은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충격받은 모습,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는 주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놀란 방면이다. 누가 어디에 앉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베드로는 예수님 우편 영광의 자리로 추정된다. 머릿짓으로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것으로 보아 요한과 눈이 잘 마주칠 수 있는 자리였을 것 같고, 손에 칼을 잡은 사람 같다.
배신자 유다는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Leon Lamb Morris)가 “마태복음 26장의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25절)는 대화를 다른 동료들은 듣지 못하는 둘만의 대화였다며 회계 담당인 가룟유다가 예수님 우편 영광의 자리에 앉았을 것”으로 해석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배신자에게 마지막 만찬에서 특별히 곁에 앉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마 사색을 한 유다가 바로 오른쪽 사람인 것 같다. 다빈치는 그의 손에 돈주머니를 그렸다. 그리고 그 앞에 소금통이 넘어져 있는데 소금은 쌍방 간에 맺은 계약이 영원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다빈치는 유다 앞의 소금을 뒤엎었다.
그리고 요한의 얼굴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일까? 마치 여성 같다. 예수님 바로 오른쪽에 있지만 반대편으로 약간 기울인 편안한 모습이지만 다른 제자들은 당황한 모습이다. 마치 손으로 자기 가슴이나 하늘을 가리키며 “저는 아닌데요” 그러는 것 같다. 평화롭기는커녕 배신과 놀람, 그리고 무지로 가득 찬 만찬장, 이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만찬장 분위기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만찬장 분위기는 그림이 좀 다르다. 요한복음의 만찬장에서 두드러지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유다와 ‘사랑받는 제자’라는 익명의 사람, 익명으로 다룬 사람은 사도 요한이 거듭 그를 ‘사랑받는 제자’라고 표현한다. 학자들은 그를 별 이견없이 사도 요한으로 해석하는데 요한은 그 제자가 베드로보다 예수님과 더 친밀한 관계임을 강조한다. 말씀으로 추정해볼 때 유다와 요한은 둘 다 예수님 가까이에 앉았던 것 같다. 어쩌면 다빈치의 그림과 달리 예수님 좌우편에 하나씩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다빈치의 그림은 마치 1자 테이블 위에서 식사를 한 것처럼 표현했지만 실제 유대나 로마식 식사 때 테이블 세팅은 원형이나 반원형이었고, 공간이 좁을 경우에는 서로 포개어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했다. 그래서 예수님 오른쪽에 있던 사랑받은 제자는 마치 예수님 품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26절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라 하시며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라는 말씀도 당사자들만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유다의 자리를 예수님과 가까웠을 것으로 추측한 것이다.
떡 조각을 나누는 식사, 가족적이고 친밀한 분위기처럼 보이지만 주고받는 대화는 심각하다. 예수님은 같이 떡을 먹는 자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는 엄청난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는 범인을 색출하려고 사랑받는 제자에게 누군지 알아내라고 사인을 보낸다. 결국 사랑받은 제자가 묻는다. “주여 누구니이까”(25절), 좀 은밀하긴 하지만 예수님도 이제는 직접 누군지 밝히신다. 지금까지 암시만 하시던 것과는 다르다. 떡 조각을 주면서 “내가 이 떡 조각 주는 사람이 그”라고 하신다. 아마 다른 제자들은 잘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 같다. 아니 들었어도 무슨 소린지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공관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주여, 내니이까?” 그러고 있다.
한편 유다는 들통났다고 생각하고, 떡 조각을 받자마자 밖으로 나간다. 요한도 제자들도 유다가 다른 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유다는 행동을 결행할 타이밍으로 생각한다.
배신 결행, 열두 명을 택하여 함께 동고동락하며 가장 신뢰했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신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18절), 시편 41편을 인용한 말씀이다. 다윗의 시편인데 여기서 생략된 말씀이 그 상황을 더 뼈 아프게 한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41:9), 함께 떡을 먹던 친구가 배신했다는 말씀이다. 그가 바로 늘 곁에 두고 중요한 결정에 자문을 구했던 최고의 책사 아히도벨이다. 다윗은 친아들 압살롬에게도 배신당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발꿈치를 들었다고 표현했다. 발로 마치 자기 얼굴을 밟듯 모욕적 행위를 행했다는 말이다. 축구장에서도 엘로 카드감, 심하면 레드 카드까지 받을 수 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를 밝힌 시편에 보면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시55:4-5)라고 했다. 상처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 배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다만 배신자인가? 유다는 하나의 상징, 구원의 방주라는 교회공동체에도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 성경은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고 표현했다. 끊임없는 신앙 검증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 유다와 같은 배신과 탐욕과 야망의 욕구가 섬김과 하나됨과 사랑의 마음과 공존하기 때문이다. 같은 자리에서 떡과 말씀을 먹고 있지만 유다가 있고 사랑받는 제자가 있다.
유다는 마귀다
본문에 좀 난해한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27절), 이 말씀은 마치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는 방관의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된 말씀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교회사에 아예 가롯 유다를 옹호하는 이단이 있었다. 2-3세기 기독교 최대 이단으로 찍혔던 영지주의자들이 만든 위경 중 하나인 ‘유다복음서’에 보면 유다가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나머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비밀한 계시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영적인 비밀을 안 유다는 빈껍데기에 불과한 예수님의 육신을 푼돈에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육적인 것을 붙잡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안 유다가 억울하게 정죄를 당했다는 것이다.
공감이 가나? 이 유다에 대한 옹호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는,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 을 간과하는 오류다. 예수님의 대속 사역만 강조했다고 할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속죄론의 핵심이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인데 결과론적으로 보면 유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 성취에 공헌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논리가 로마서에서도 나온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롬3:5), 이스라엘의 불의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고, 이방인이 구원받게 된다면 이스라엘의 불의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것인데 아니다. 현실은 배신일 뿐이다. 하나님이 악을 선한 결과로 바꾸셨을 뿐인 것, 그래서 유다에 대한 옹호는 변명에 불과하다.
요셉이 결과적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해서 동생을 핍박하고 팔아넘긴 그의 형제들이 공로자 되나? 아니다. 형제들은 심판받을 짓 했다. 그들의 악을 바꾸어 요셉을 높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악인들의 변명에 동조할 필요 없다. 결과가 선하다고 악행을 용서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오류는 영웅화의 오류다. 인간에게는 악마를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실제 역사나 현실을 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알렉산더나 칭기스칸이나 나폴레옹을 영웅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얼마나 광대한 땅을 빼앗았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지만 현실은 피의 역사다. 수많은 젊은이들과 대중이 그들의 칼날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수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가족이 붕괴 되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이 러시아에서 지지도가 더 높아졌다고 영웅이 될 수 없듯이 유다는 영웅이 아니라 배신자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인데 성경은 유다를 가차 없이 마귀라고 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27절), ‘사탄’이란 이름이 요한복음에서는 여기에만 나오는데 사탄이 유다의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이전에 예수님은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70절)라고 예수님은 유다를 마귀라고 하셨다. 사탄이 유다의 행동을 주장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기억하라. 마귀 짓하면 마귀이다. 마귀가 어떤 존재이고, 인간에게서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가에 예수님은 관심이 없다. 다만 그 행동에 관심이 있고, 행동이 악하면 마귀이고 어둠의 자식이다. 그래서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절) ‘밤’은 단순한 시간만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에게 밤은 빛과 어두움의 싸움에서 어두움으로 넘어가는 때, 캄캄한 암흑이고, 또 유다의 영혼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유다가 지금 마귀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말씀의 핵심은 유다의 배신을 예수께서 미리 아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셨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시편 말씀의 성취라고 하신다. 그래서 유다에게 “속히 그 일을 하라”고까지 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미리 다 아셨다면 가룟 유다를 12제자 중 한 명으로 선택하신 것부터가 잘못이었고, 예수님의 안목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너무 단순한 의문이고 불신이다. 예수님은 이것은 말씀의 성취라고 하셨다.
요한이 단순히 예수님의 예지력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보다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악은 통제되고 있다. 댐에 갇힌 물처럼 통제된 악은 위험하지 않다. 악이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우연이나 우발적이 아니라 모든 것은 계획 아래 진행된다. 그렇다면 배신, 실패에도 좌절할 필요 없다. 예측되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것, 모르기 때문에, 신뢰가 없기 때문에 불안할 뿐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신뢰하기에 예수님은 충실히 오늘을 사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유다에게도 똑같았다. 유다의 발도 씻어주셨다. 떡 조각을 찍어 주기도 하셨다. 떡 조각을 받았던 유다가 그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다는 그걸 버림의 사인으로 해석한 것 같다. 결국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배신이 아니라 회개였어야 한다. 그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도 놓쳤다. 마귀의 손을 붙잡힌 것, 전적으로 유다의 선택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이 유다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자극하셨지만 유다가 끝내 듣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안타깝게 이 말씀을 하시면서도 끝까지 유다를 사랑하신 예수님, 결국 제자들 모두에게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실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19절), ‘일이 일어나기 전에’라고 하셨는데 이 일이 바로 유다의 배신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귀결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다. 곧 이 일련의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자들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끝까지 믿게 하기 위해 미리 예고하실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심령이 괴로워”(21절), ‘타랏’이란 단어인데 나사로 죽음 앞에서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울 때 지으셨던 표정, 십자가를 앞두고 그 길로 인해 고통스러우셨을 때 지으셨던 표정을 표현할 때 사용한 단어다. 그 괴로움은 배신할 자를 제자로 삼고 다 알면서도 그와 3년간 삶을 나누셔야 했던 고뇌, 나머지 제자들도 다 주님을 부인하거나 버리고 흩어질 일에 대한 연민의 정, 무엇보다도 곧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말미암는 두려움, 이런 것을 종합한 표현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져야 할 죄와 괴로움의 짐을 대신 지셨기에 겪으신 괴로움, 그래서 우리가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끝없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충성해야 한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