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시피, 노벨문학상은 시, 소설, 평론, 학설이론, 등 문학작품을 통해 인간정신 및 사회 발전에 문학적으로 공헌한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여 거금의 상금과 함께 메달을 수여하는 가장 영예스런 권위를 가진 상으로 정평 나 있다. 지금까지의 수상자들을 보면, 그들은 문학을 통해서 정말 인류의 행복을 제공하려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을 볼 수 있다.
1972년 어느날, 노벨문학상 위원회가 스웨덴에서 열렸다. 그 해의 노벨문학상을 수여할 작가와 작품 선정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위원들은 그 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작품을 선정하였는데, 독일의 하인리히 뵐과 그의 작품인 “아담, 너 어디 있었는가”였다. 이 소설은 1952년에 쓰여진 것이었지만, 1972년도에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의 실상을 그린 소설로, 전쟁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고발하는 차원의 의미를 가진 내용으로 되어 있다. 성경 창세기 3: 17-18의 “아담, 너 어디에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아담과 이브에 대한 질문을 제목화하여 쓴 것이다. 인간이 직면해 있는 현실상황에 가장 정곡을 찌르는 교훈이기에 당당히 선정되게 된 것이다. 전쟁하는 악한 마음에서 벗어나, 평화의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교훈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자유한 존재로 살았는데, 단 한 가지 책임적 조건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정언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으로서 인간에게 내려진 숙명의 명령이었는데, 아담과 이브는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계율을 지키는 것을 부정하는 것에 사용함에 따라 죄과를 묻는 질문을 받게 된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 에덴동산을 떠나 어느 곳에 숨어 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담, 너 어디에 있는가”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질문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 찾으시느라 질문한 것이 아닌 것은 잘 알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아담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기에 그 상황과 처지를 물으신 것이다. 에덴 동산, 즉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함의 영광의 이미지가 나타나 있는 곳에 있어야 할 존재가, 그 영역을 벗어나 부패하고, 속된 곳에 있는 것에 대한 책망 겸 책임을 묻는 질문인 것이다.
여기서 아담은 말 할 것도 없이 인간, 우리 자신을 말한다. 하나님의 이상적 세계에 살아야 할 인간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면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상처를 입히는 곳, 파괴와 멸절이 난무하는 죽음의 현장에 있는 것이다. 뵐의 소설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치적으로 따지면, 그는 에덴동산에 있어야만 했는데,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어 지금 세속 부정부패의 땅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더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의 궁극적인 물음은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와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근본적인 형상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화 하여 이 땅에 보내실 계시적 사건을 불러오는 전제라 말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말 할 때, 중요한 것은 육이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영혼이 있는 곳을 말하는 것이냐다. 하나님이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실 때는 영혼이 어디 있느냐가 핵심이다. 구약에서도 영혼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실체로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영육을 2분법으로 확실하게 나뉘어 설명한 이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다. 그는 인간을 영과 육으로 나눈 2원론(Dualism)의 세계를 연 장본인이다.
그에 의하면, 육은 악을 대변 할 수 있는 실체로 보았다. 육은 죄를 짓는 도구이기도 해서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죽으면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그런 것을 악으로 이해했다. 한계적이고, 소멸되어져 가치가 없어져 버리는 것, 그런 것을 악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반대로 영은 선한 것이라 했다. 왜? 불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영원하기 때문에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선을 신으로 규정했다. 신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실체는 육이 아니라, 영이라 했다. 육은 사라 없어져 버리는 물체이기 때문에 그저 영혼을 담고 있는 도구에 불과한 것일 뿐, 인간의 실체는 영이라 한 것이다. 육체는 죽으면 아무 쓸데없는 흙과같은 것이지만, 영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영이 있어야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플라톤의 사상에 대입을 해 보면, 어디 있는가를 말 할 때, 육체가 존재하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닌 영이 어디있느냐를 말하는 것이 된다. 즉, 하나님은 “영혼이 어디 있느냐”에 포인트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몸은 어느 곳에 있다 해도 마음은 딴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하는데,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와 같은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는 드리면서도, 얼굴은 설교자를 향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다른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몸은 교회 안에 있지만, 영은 딴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신학을 하면서 마음은 콩받에 가 있는 사람들도 많다. 헤겔은 목사가 되려고 신학을 공부하다 마음을 철학에 두다보니 극단적 철학자가 되고 말았다.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도, 신학생이었으나 영혼을 딴 곳에 두다 보니 생물학자로서 전대미문의 진화론자가 되고 말았다. 우리 주변에서 목사요 교수도 육은 신학교에 있으면서도 영은 유신진화론에 가 있는 이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물으신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어서 빨리 돌아와라.” “유신진화론자들아, 너 어디 있느냐? 어서 창조론으로 돌아와라” 말씀하신다. “나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적어도 크리스천이라면 이러한 질문에 당당히 대답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하겠다.
“나는 당신이 창조한 거룩한 땅, 에덴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목사와 신학자가 되길 소망한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양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