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실패한 한 여인이 있었다. 아들 하나 데리고 재혼을 했지만 역시 원만하지 못했다. 구타당하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또 다시 이혼했다. 세 번째 결혼도 비슷했다. 결혼할 때마다 첫 결혼 때 낳은 아들이 문제였는데 아들 입장은 어땠을까? 아버지가 바뀌고 또 바뀌며 사랑받기는커녕 자기를 불편한 존재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모의 부부싸움을 보며 ‘나는 왜 태어났나. 왜 살아야 하나’ 그런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세 남자에게 아픔을 겪은 이 아들의 엄마는 아들에게 “사람 믿지 말아라. 사람 사랑하지 말아라. 세상에 사랑은 없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도 다 가짜다. 아무것도 믿지 마라” 늘 그렇게 가르쳤다. 자연스럽게 이 아들은 공격적 성향을 보이게 되었고, 고등학교 때 사고 쳐 퇴학당하고 군에 입대해서도 사고 쳐 불명예 제대했다. 그리고 어쩌다 결혼은 했지만 아내의 사랑을 받아줄 줄을 모르고 이해할 줄도 모르고 항상 부부싸움을 격하게 하고 절망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직장 건물 옥상에 올라가 누군가를 기다린다.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그 앞을 지나갈 때 그를 향하여 총을 쏜다.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 이 같은 엄청난 비극의 원인이 된 것이다. 유명한 의사 제임스 밥슨은 이 사건을 “가정의 비극이 만든 가장 큰 비극, 어머니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한 아들이 저지른 역사적인 비극”이라 했다. 사랑받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실제로 부모가 아이를 호되게 야단치거나 때리면 사흘 후에 대부분의 아이는 감기에 걸린다. 무섭게 변한 부모의 모습이 충격,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정권의 박해를 피해 카타콤베(catacombe), 지하 묘지에 숨어 살면서도 뜨거운 사랑의 교제로 그 모진 고난들을 다 이겨냈다. 어느 카타콤베의 벽에 새겨진 글을 보면 “우리는 가진 것이 없다. 우리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카타콤베에 숨어 살면서도 불행하지 않았다. 사랑이 행복감을 갖게 한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나눌 때 3장 16절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 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 이 사랑을 느끼고 받아들이면 멸망치 않고 영생 얻고,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이다. 이게 성경의 핵심이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본문에도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데 진짜 사랑, 최고의 사랑 이야기다. 엄청난 사랑, 그 사랑의 속성을 실제 상황에서 드라마틱하게 상징적으로 계시해주는 사건이다. 요한이 쓴 두 번째 책인 ‘수난과 영광’의 책의 시작인 13장에 드라마틱한 두 사건이 등장한다. 이상할 정도로 스쳐 지나가듯 ‘식사’라고만 살짝 언급한 ‘성찬식’과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는데 구체적으로 다룬 ‘세족식’이다. 성찬이 나눔이라면 세족은 섬김이다. 요한은 이 두 사건을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이라고 표현했다(1절). 내일이면 죽을 목숨인데도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다음 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당연히 아셨을 십자가, 십자가가 눈앞에 있다. 그래서 요한은 성찬식이나 세족식을 시간적으로도 끝까지, 능력 면에서도 끝까지, 그리고 속성 면에서도 끝까지, 인간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 끝까지 사랑하신 것으로 묘사한다. 세족식, 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기 바란다.
겉옷을 벗고
요즘은 평범한 것 싫어하고 자기 편한 대로 입는 개성 시대라 튀는 옷을 입는 사람들이 많지만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먹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먹되, 입는 것은 남을 위해 입어라”고 했다. 옷은 내가 입더라도 남을 위해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맞다. 복장은 최소한의 예의다. 성경에는 예복을 갖추지 않은 초청객이 주인의 책망을 듣고 쫓겨나는 비유가 있다. 혼인잔치 비유인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12절), 예복 때문에 책망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망으로 끝이 아니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3절), 아예 저주의 대상, 멸망의 대상이 되었다. 너무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성경에서 예복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믿음, 그래서 잘 입어야 한다. 요즘은 다들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그러지만 아니다. 옷은 남 보기 좋아야 한다.
본문에는 예수께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기록한다(4절). 오랜만에 평화롭게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께서 겉옷을 벗으셨다. 쇼가 아니다. 비장하시다. 제자들의 발을 정성스럽게 씻고 수건으로 닦아주신다. 이게 사랑이고, 사역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처지와 자기 기분에 따라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을 버리기도 하는데 예수님은 아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의 구원을 위해 겉옷을 벗으셨다. 긴장감을 느낄 타이밍, 고통스럽고 복잡해지면서 조용히 내일을 준비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치 종강파티 같은 유월절 만찬을 드셨다고 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저녁 먹는 중’이라고만 언급하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세족식은 상세하게 다뤘다.
요한은 이 세족식을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의 준비, 하늘나라로 돌아갈 준비로 소개한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절),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3절), 십자가를 앞둔 바로 그때 예수께서 겉옷을 벗으셨다고 했다. 세족식을 위해 벗었지만 의미 있는 표현이다. 겉옷은 세상에서나 필요한 옷, 하늘로 돌아갈 때는 필요가 없기에 벗으셨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겉옷은 결코 미련 둘 옷이 아니다.
겉옷을 벗은 것은 세족식을 준비한 것, 다시 말하면 섬길 준비, 그리고 죽을 준비한 것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가 “죽음이 먼 장래에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계산 착오”라며 “우리는 이미 죽음의 통제 아래 들어온 지 오래되었다”고 했는데 맞다. 사람이 꼭 늙어야 죽나? 아니다. 죽음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그래서 철학자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는 “누구나 죽음과의 거리는 같다”고 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겉옷 벗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 기억하라. 예수님이 겉옷을 벗으신 것은 끝없는 사랑 때문이었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이어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다’(4절). 마치 종의 모습 같다. 더욱이 스승이 제자들을 위하여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다는 것은 겸손의 극치,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발을 씻겨주시기 위해 수건을 두르셨다.
그 자리에 가룟 유다도 있었다. 예수님을 팔기로 하고 벌써 돈까지 받아 챙기고 기회만 노리는 가룟 유다! 현장에 있었던 요한은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2절)라고 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 그래도 세족식에 유다를 빼지 않으셨다. 독사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걸림돌 유다의 발도 씻겨주신다. 교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예수님이 발을 씻기실 때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기셨다고 했다. 저주가 마땅한 배신자지만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 이게 진짜 사랑이다.
그때 가룟 유다의 마음은 어땠을까? 발달 장애인을 섬기는 라르쉬(L’Arche, 방주) 공동체를 설립하고 그후 템플턴상까지 수상했던 장 바니에(Jean Vanier)의 『봉사의 스캔들』(The Scandal of Service)이란 책이 있다. 스캔들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에 봉사가 가져오는 파장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다. 내용 중에 유다의 발을 씻길 때의 예수님의 마음을 이렇게 상상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해. 나는 너의 마음속에 있는 나약함과 상처와 질투심을 안다. 악마가 너를 사로잡으려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네가 모든 두려움, 특히 악한 영에서 벗어나 사랑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제자들 마음속에도 가룟 유다와 비슷한 마음이 있었다. 그들도 예수님을 배반했다. 베드로마저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쳤다. 그뿐이 아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그들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발을 씻기셔야 했다. 밖에서 지내다 들어온 제자들, 일반적으로 밖에서 들어올 때, 더욱이 잔치에 들어올 때 종이 없으면 서로서로 씻겨야 한다. 그런데 아마 그날은 너무 배가 고파 식사부터 먼저 한 모양이다. 배가 부르자 본색이 드러난 걸까? 누가 큰 자인지 논쟁하며 서로 시기 질투한다. ‘네가 먼저 씻기면 나도 씻길게’ 그런 마음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다. 물론 속 좁은 제자들을 책망하기 위해, 겸손하지 못한 것을 신랄하게 꾸짖기 위함이라기보다 곧 나타나게 될 사건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베드로 차례가 되었다. 베드로는 도저히 발을 내밀 수 없다. 너무 민망하고 황송한 일, 그래서 성격대로 강력하게 거절한다(6, 8절).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영원히 안 된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거부는 당연한 거부, 그래야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 영혼을 찔러 쪼개는 능력의 말씀이 된다. 베드로가 돌변한다. “발뿐만 아니라 내 손도 머리도 다 씻어주소서”(9절), 온몸을 다 맡긴다는 뜻이다. 다혈질답다. 물론 베드로는 여전히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발을 씻어주시는 참뜻을 모르고 있었다.
예수님은 의미도 모르는 베드로지만 발을 씻겨주신다.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7절), 언젠가는(some day) 알 것이라며 모르면 모르는 대로 씻기신다. 모른다고 책망하거나 져버리지 않고. 죄 씻음과 연관된 발 씻음, 이 세족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는 영광이자 오직 십자가에 의해서만 받을 수 있는 구속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후에는 알게 될 것, 언젠가는 알게 될 것, 이게 예수님의 생각이시다. 그래서 가롯 유다가 와서 키스를 하든 말든 베드로가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든 말든 그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믿어준 것이 사랑이다. 이해해주고, 기다려 주고, 참아주고, 믿어주고, 덮어주고, 채워주고... 예수님은 베드로는 물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서로 발을 씻기고 섬기라
발, 우리 신체 부위 중 가장 더러운 부위다. 샌달을 신고 먼지가 많은 중동지역을 다니면 더 더욱 더럽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스랍들이 찬양할 때 두 날개로 발을 가린다. 하나님께 찬양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장 더러운 부분을 가린다는 뜻이다. 더러워진, 오염된 발, 씻어야 한다.
그런데 배반하는 가룟 유다, 저주하는 베드로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행하신 세족식, 그 끝없는 사랑은 종의 자세가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종이 누군가? 식사 때 서빙하며 식사 시중을 수행하되 요란하지 않고 손님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아야 한다. 이게 섬김이다. 상대방의 필요에 따라 옆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은 “섬기러 왔다(20:28)”고 하셨는데 ‘사랑으로 종노릇’하신 것, 베드로의 발은 물론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종처럼 씻기신 최고의 섬김이었다.
이게 바로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성경은 말씀의 선포인 ‘케리그마’(κῆρυγμα), 말씀의 외적 작용인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 그리고 말씀의 내적 기운인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를 교회의 본질적 사명으로 강조했는데 섬김은 디아코니아, 신약성서에 34회 나온다. 이렇게 많이 나온 것은 그만큼 섬김이 초대교회의 삶과 선교의 핵심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섬김이 있어야 한다. 섬김이 없는 말씀, 섬김이 없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기며 섬기라고 하셨다(14절).
왜 하필 성찬과 세족이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가르침이었을까? 성찬이 없는 세족은 위선과 가식이고, 세족이 없는 성찬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눔과 섬김은 상호 깊은 관계가 있다. 나눔이 없는 섬김은 없고, 섬김이 없는 나눔도 없다.
초대교회는 아예 교회를 ‘봉사자의 집단’이라 불렀다. 교회가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말이다. 십자가가 대표적인 기독교의 상징물이지만 수건도 기독교의 상징물이었다. 영성가 리처드 포스터(Richard J. Foster)는 “십자가가 복종의 징표라면, 수건은 섬김의 징표”라 했다. 십자가 없는 수건, 수건 없는 십자가는 의미 없다. 섬기는 것, 무릎 꿇는 것, 베푸는 것, 이런 게 기독교의 본질적 사명이다. 혹시 아직도 ‘내가 누군데’, ‘사람 뭘로 보는 거야?’ 그런 생각하나?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섬기는 자여야 한다.
왜 예배와 섬김의 영어가 service로 같을까? 하나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고 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지만 사람을 섬기는 것도 예배다. 그래서 웨슬레(John Wesle)는 “최대의 예배는 인류에의 봉사”라고 했다.
성찬식도 세족식도 다 끝까지 사랑하신 삶의 본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기 사람’(1절), 그렇다면 기억하라. 언제나 사랑이 먼저다. 예수님은 성찬을 베푸신 후에 “너희도 주라”고 하셨고, 세족식을 행하신 후에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고 섬기라”고 하셨다. 끝없이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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