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셔서 계속 말씀과 표적을 통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대인들만 믿을 뿐 상당수의 유대 엘리트들과 출교(excommunication)가 두려운 많은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요한은 이런 현상을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마무리 짓는다. 그런데 미완료태를 쓴 것은 믿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 선민들에게 주어진 엄청난 선물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37절이 표적 신앙에 대한 최종 결론이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나 정치가들은 예수님이 민중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거나 힘이 약했다는 식의 평가를 내리고, 또 어떤 신학자들은 인간이 완악해서 그랬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그런데 요한의 평가는 다르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38절), 많은 유대인들이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이유를 요한은 이사야 53:1절을 인용하며 선지자 이사야가 이미 예언한 일이고, 그 예언대로 성취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믿지 않는 자들이 그들의 불신앙 속에 완악하게 머무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버려두시기 때문이라 한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었더라”(39-40절), 이사야 6:9-10을 인용한 말씀으로 인간이 힘이 없거나 완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다. 마치 출애굽 때 완강히 저항했던 바로와 같다는 평가다. 성경은 바로가 완악해서도 아니고, 강해서도 아니고, 또 하나님이 약해서도 아니라고 한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롬9:17).
하지만 요한은 이제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42절). 여기서 ‘관리’는 산헤드린 즉 유대인 공회의 회원들, 지도자층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다. 문제는 그들이 믿기는 했지만 믿음을 드러내지는 못했다는 것, 요한은 이것도 미완료태로 썼다. 그들이 늘 하던 짓이라는 건데 이유는 바리새파로부터의 출교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했다. 파문당하는 것, 그래서 그들은 숨어서 몰래 믿는 척했다. 그게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었는데 요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3절)라고 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바리새인에게는 저주 같은 혹평이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 영광보다 더 사랑한 것은 불신앙의 첨단, 이는 가장 큰 불행이자 재앙 이다. 어떤 여건 속에서 살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경험한 영광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일찍이 이사야가 주님의 영광을 경험한 것을 언급한다(41절).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풍전등화의 위기를 겪을 때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그가 성전에서 기도하다 성전 지붕이 날아가고 하늘이 열리면서 높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뵙게 되었다는 것이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6:1). 그 순간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라고 고백한다. 감당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이나 사건을 겪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인 ‘누미노제’(numinose)랄까? 그는 경외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영광스런 하나님을 뵈니 자신이 너무 초라했을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한 마디로 “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5절의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다”는 이 말씀을 아람어 탈굼(Targum) 역본에서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의 영광을 보았다”라고 번역한다. ‘영광’이라는 단어를 추가한 거다. 히브리어로는 ‘쉐키나’(שכינה), 원래 현존, 보좌의 의미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을 뵈었다는 말보다는 하나님의 쉐키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 인간은 직접 하나님 본체를 뵐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뵐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한 것 같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영광’이란 단어도 핵심 단어(key word) 중 하나다. 하나님을 지칭하는 ‘영광’, 쉐키나는 곧 예수님이고, 쉐키나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했는데 초대 교부들은 이사야가 이때 성부 하나님을 뵈었다고 해석한다. 물론 여러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지금 요한이 증언하는 예수님이 바로 이 하나님의 쉐키나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서 요한이 서론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라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영광은 ’보는 영광‘이다. 그리고 손으로 만지는 영광이다(요일1:1). 어떻게 생명의 말씀을 만지나? 이건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고 말씀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분이 하나님의 쉐키나, 경험하는 영광이란 말이다. 묻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맛 본 사람, 경험한 사람인가? 그렇다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 마땅할 것이다.
눈이 열렸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이 영광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그 이유를 그들이 ‘사람의 영광’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43절). ‘사람의 영광’이 뭔가? 주로 권력과 힘과 부와 명예 아닐까? 그런데 예수님은 권력도 없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도 부도 명예도 없다. 그저 갈릴리 어부들과 무지렁이 백성들 일부가 따르고 있는 촌사람일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 이게 쉬운 일인가?
하지만 제자들은 그 영광을 보았다고 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그 평범성 속에 담긴 영광, 진흙투성이에서의 영광, 인간이 이해할 수도 없는 것, 그래서 눈이 열린다는 표현을 쓴 것 같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면 볼 수 있는데 성령께서 눈을 열어주신 거다. 쉐키나를 본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잠잠할 수 없었다. 생명 덩어리가 안에서 막 꿈틀대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그들의 감정은 기쁨이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그들은 남모르는 즐거움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세상의 영광은 시시해 보였다. 그래서 권력이나 재물에 그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런 건 사람의 영광일 뿐, 곧 사라질 것,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라면 권력이나 재물에 휘둘리지 않는다. 출교나 세상의 위협도 두렵지 않다. 그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일 뿐이다. 묻는다. 요한복음서의 독자인가? 그렇다면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빛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빛의 자녀가 된다고 한다(36절). ‘빛의 아들’, ‘휘오이 포토스’(υἱοὶ φωτός), ‘휘오스’(υἱός)는 신약에 379회 나오는데 성숙한 아들을 묘사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다. 아기이거나 미숙한 아들은 ‘테크논’(τέκνον)이란 단어를 쓰기 때문에 ‘테크논’으로 태어나 ‘휘오스’가 된 아들이다. 세월이 지나도 계속 ‘테크논’이면 안 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계속 주장하신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베드로가 신앙 고백할 때 표현했던 말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배가 뒤집힐 폭풍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께서 풍랑을 잔잔하게 해주셨을 때 사람들이 표현했던 말도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현장에 있었던 백부장도 같았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단 한 번도 잊은 것이 없다.
요한은 계속 빛이 그리스도라고 증거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세상을 비추는 빛”(1:9),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그리스도는 빛으로 역사하신다. 그래서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고, 혼돈이 정돈되게 하고, 공허한 것을 채워주신다. 무질서, 혼돈, 공허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빛이 비취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리 개인에게도 그렇다. 무질서와 흑암, 그리고 늘 공허했던 우리, 깨닫지 못해 빛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1:5). 빛으로 오신 예수를 믿어야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
기억하라. 우리는 빛의 아들이다. 35절과 36절에 ‘빛’이란 단어가 다섯 번이나 나온다. 여기서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하셨다. 빛은 생명과 관련이 단어, 생명을 살게 한다. 또 우리로 하여금 운동(활동)하게 하고, 안심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 바로 빛이었던 것 같다.
세상이 어둡다고 느끼나? 더 밝은 빛이 되어야 한다. 등대가 빛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등대가 아닌 것, 초가 타지 않으면 빛을 낼 수 없는 것, 타야 한다. 그래야 밝게 할 수 있다. 미국의 지성인 에디스 와튼(Edith Wharton)은 “빛을 발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며 “하나는 촛불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는 것”이라 했다. 촛불 되기 힘드나? 그럼 반사하는 거울이라도 되어야 한다. 빛과 마주하면 가능한 것,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는 삶으로 빛을 반사하며 살아야 한다.
성경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고 경고한다(35절). 빛의 아들이 가는 곳에는 어둠이 사라져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오히려 빛이 어둠에 붙잡힌 형국 아닌가? 명심하라.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음이듯 빛의 아들이 빛을 떠나면 죽음이다.
성경은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라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니라는 말인데, 이 ‘다니라’는 말은 계속 다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품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라는 거다. 우리가 만일 그렇게 살면 마음에 빛이 있는 것, 그러면 우리 안에서 생명이 꿈틀거릴 것이다. 어둠이 물러갈 것이다. 환해질 것이다.
율법에 갇혀있던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만나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귀신 들린 자가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까?”라고 했다. 빛이 들어오면 악한 영은 멸망하는 거다. 죽음도 생명을 얻는 거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고 권세가 있다고 했다. 빛이 들어오면 무지가 물러간다. 율법이나, 무지나, 귀신이나, 죽음이나 이 모든 어둠의 권세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빛의 아들! 꽤 되었지만 아들 자랑하는 것이 코미디인 시대다. 아들이 고등학생만 되면 4촌 되고, 애인 생기면 8촌 되고, 장가가면 사돈의 아들 되고, 공부를 잘하고 일 잘하면 나라의 아들 되고, 돈 잘 벌면 장모의 아들 되고, 백수가 되면 평생 끼고 살아야 한다고들 한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아들이 자식을 낳으면 쉽게 손주들 보기 어려워 해외동포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빛의 아들은 몇 촌일까? 아버지 아들이니 1촌이다. 예수님은 신랑이시니 0촌, 절대로 빛의 아들은 1촌 이상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야 빛의 아들이다. 성경은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아들이니”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확실한 하나님의 자녀다. 어떤 처지에 있든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에서는 주민증에 종교를 표시한다.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그 주민증에 ‘기독교’라고 표시하면 아예 공직 생활은 할 수 없고, 온갖 불이익을 당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도 다낭에 사는 지인은 자랑스럽게 주민증을 보여주며 핍박을 당하고는 있지만 이 표시가 영광이라고 말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주민증에 ‘기독교’라는 사실을 표시하지 않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꽤 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종교 표시가 의무인데 무종교는 감옥에 간다고 한다. 종교를 반대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무종교였기에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감옥에 보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빛의 아들이다. 주민증에 기록하는 것이 의무는 아니지만 우리 얼굴에 빛이 발산되는 것은 의무처럼 알아야 한다. 우리 얼굴은 빛의 통로다. 환한 얼굴로 밝게 살아 세상을 밝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우리는 매 순간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야 한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