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본문은 예수님의 기도로 시작되는데(27-28절) 어떤 기도를 하며 사느냐가 중요하다. 기도와 삶은 하나이며 함께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한다. 그래서 기도 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이다. 묻는다. 기도가 사랑의 소통인가? 아니면 일방적 요구인가? 어떤 사람은 기도만 하면 운다.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지만 상갓집 아르바이트형 기도라면 곤란하지 않을까? 또 어떤 사람은 혼절형이랄까? 기도만 하면 잔다. 그리고 공갈 협박형도 있다. 앞으로 40일 드리겠다는 식, 할 소리 못 할 소리 다 한다.

본문의 기도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심령이 좀 어지럽게 보일 수 있다. NEB(New English Bible)는 “내 영혼이 심히 소용돌이 속에 있다”고 번역했다. 이 기도의 원문에는 두 개의 물음표가 등장한다. 첫째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할까요?”이고, 둘째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여기에 물음표가 있다. 이건 강한 부정으로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할까요?”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니다. 나는 이때를 위하여 왔다”라는 의미이다.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첫 번째 질문을 “무엇을 선택하리요?”라고 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하셨다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이 질문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까 말까의 결의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하게, 지나가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다만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걸 물으며 “이 어려운 때를 잘 통과하게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28절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좀 더 정확히 보면 “아버지께서 친히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십자가를 염두에 둔 기도다.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의 성호가 영광 받으실 것이라고 기도한 것, 이 기도에 하나님이 즉각 응답하신다.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절).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말씀이다.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며 우리의 기도가 달라지기를 바란다.

기도, 겟세마네의 기도와 다르다

요한복음서는 읽으면 읽을수록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묶어서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ls)라 하고 요한복음은 별도로 분류한다. 주로 ‘짧은 비유’를 다룬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긴 설교’ 형식이고, 공관복음의 중심 가르침이 ‘하나님의 나라’(KOG)라면 요한복음은 ‘영생’(Eternal Life)이다. 또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의 소위 “I am…” sayings가 적을 뿐만 아니라 간접적(間接的)이라면 요한복음에는 직접적(直接的)인 “I am…” sayings가 여러 번 나온다. 또 공관복음의 사역중심지가 주로 갈릴리였다면 요한복음은 유대 땅, 즉 남부 팔레스타인이었다는 것도 다르다. 분위기도 다르고, 어휘도 다르다.

결정적인 차이 중 하나는 요한복음에 겟세마네의 기도가 없다는 것이다.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즉 목요일 밤에 성전 동쪽에 위치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기도이다. 누가는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가셨다고 했다(눅22:39). 그때 드린 기도가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말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였다. 누가에 의하면 얼마나 힘쓰고 애쓰며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졌다고 했다(눅22:44).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에 의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비장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 번 연속 졸았다. 그리고 이 기도 후에 예수님은 바로 대제사장이 보낸 군속들에 의해 체포되셨다.

그런데 이 중요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이 요한복음에는 없다. 27절의 기도를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면 겟세마네의 기도와는 많이 다르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때에 왔다.” 느낌이 전혀 다르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주저하는 듯한 태도나 망설임이 없다. 오히려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여주옵소서”라고 기도했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이 일로 이미 영광 받으실 것을 기도하신다. 겟세마네의 기도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왜 요한복음에 겟세마네의 기도가 없고, 이렇게 기도가 다를까? 요한복음은 역사성보다 신학만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일까? 아니다. 관점의 차이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고통과 희생을 강조하면서 은혜를 부각시켰다면,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영광으로 여기셨다며 십자가를 회피하고자 하는 모습은 조금도 없으셨음을 강조했다. 이게 요한복음에 겟세마네 기도가 없는 이유다.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라는 것, 예수님은 오히려 영광과 기쁨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거나 ‘죽으셨다’는 표현이 없고, “내가 땅에서 들리면…”(32절) ‘들리면’이라 표현한다. 높이 올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골고다가 높고 십자가가 높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지상에서 높이 들리시는 것, 이걸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통로로 부각시킨다. 요한복음서에서 이 ‘들린다’는 단어는 항상 십자가를 뜻한다. 이때가 하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영광의 때라는 말이다.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그 결과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예수님께 이끌림을 받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하신다. 마치 이때를 간절히 기다리셨다는 표현 같다.

관점의 차이, 신앙도 그런 거다. 신앙은 세상의 논리에 갇힌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늘 세계가 열린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거다. 신앙인들에게는 죽음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고난에서 희망을 보고, 밝은 미래를 본다. 그래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 영광이다. 단지 생각이나 정신 승리인가? 아니다. 실제 우리 안에 기쁨이 솟구치면서 희생도 심지어 죽음마저도 능히 이겨낸다.

그렇다. 관점이 달라지면 감정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진다. 표현도 달라지고 문화도 달라진다. 요즘은 분노하는 사람이 참 많은데 ‘분노’도 독일어는 3개의 단어로 표현하고, 중국어는 5개의 단어로 표현하지만 에스키모인(Eskimo)들에게는 분노라는 단어가 아예 없다고 한다. 그런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타히티인(Tahiti)들에게는 슬픔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좋지 않나? 그래서 언어가 중요하다. 언어는 사회적 산물이다. 같은 사람이지만 한국인 감정이 다르고, 아프리카나 서구인의 감정의 결이 다르다.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느낌도 달라지고, 감정도 달라진다. 감정이 달라지면 행동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운명도 달라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60년까지의 가요를 보면 가사가 거의 다 이별이고 괴로움이었다. 가요에 등장하는 명사가 꿈, 밤, 바람, 가슴, 눈물이었고, 형용사는 멀다. 괴롭다. 슬프다. 그립다, 동사는 울다. 헤어지다. 흐르다. 기다리다, 죄다 그런 것이었다. 그만큼 국가적 재난과 민족적 괴로움, 그리고 심리적 불안정의 사회였다는 말이다. 대중가요는 이렇게 시대 정서를 대변하는데 지금은 어떤가? 옛날 노래는 온 국민이 공감하며 눈물 흘렸는데 지금은 같이 눈물 흘리기가 쉽지 않다. 저마다 다른 노래 부르는 시대, 공감대를 형성하던 과거와 달리 아주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다. 일시적이고 얄팍한 감정 표현에 부정과 죽음의 언어가 판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어가 생명의 언어로 달라지고 노래가 밝은 노래로 달라져야 한다.

사도 요한은 지금 우리의 언어가 달라지고 감정이 달라지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십자가를 죽음이 아니라 영광이라고 표현했다. 고난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를 봤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 기쁨이 솟구칠 수 있고, 그래야 죽음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려면 기도를 바꿔야 한다. 날마다 징징거리기보다 영광을 보는 힘찬 기도, 요한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 같은 이런 기도를 하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 세상에 대한 심판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십자가는 분명 예수님의 패배였다. 그것도 참담한 패배, 큰소리치던 예수님이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인다. 마치 사탄의 완벽한 승리, 악의 개선 같다. 하지만 그 순간, 그 패배의 순간에 예수님은 승리를 선언하신다. 놀랍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31절), 오히려 사탄의 패배를 선언하셨다. 사탄은 권력자들을 충동질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세상 권력은 부담스럽고 성가신 사람 제거했다고 기뻐했지만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전혀 다른 선언을 하신다. “내가 이겼다”는 선언이다. 내용을 더 보면,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사탄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에 ‘세상의 임금’이라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임금처럼 보이지만 미래에는 철저히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 사탄은 쫓겨날 것이라 하셨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세상이 감당치 못한 믿음의 선진들이 나온다. 그들은 심한 고문을 받아도 구차하게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기꺼이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받고,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다. 이 세상의 임금은 더 이상 믿음의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그렇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심판인 동시에 구원의 길을 활짝 연 엄청난 사건이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32절), 십자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수많은 열매가 맺혔다. 예수님은 죽음 너머에, 고난 너머에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일하고 계심을 믿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공격당한 것 같았는데 더 큰 사람 되지 않았나? 고통 이면에 자라고 있는 생명의 힘을 믿어야 한다. 신앙은 생명의 풍성함을 바라보는 것,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매인다면 쉽게 좌절하거나, 분노하거나, 동일한 괴물이 되겠지만 우리는 그 너머를 보는 신앙인,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천둥소리, 우리를 깨우는 소리다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천둥이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29절), 사람마다 듣는 소리가 달랐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천둥소리, 소음으로 생각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셨다. 십자가를 영광으로 받아들인다고 기도하고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하겠다고 응답하신다. 밀착된 소통! 하나님은 즉각 응답하셨다. 하나님은 응답하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분에게 아들과 딸이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패키지여행 중 괌에서 심장병으로 급히 병원에 가셔서 한국으로 전화를 했는데 아들은 아버지께 소리만 치고 왜 병원에 빨리 안 갔느냐, 뭐하러 아프면서 거길 갔느냐고 야단을 쳤고, 딸은 울면서 500만원 가지고 괌까지 왔더란다. 그래서 이분이 하는 말이 딸은 직통전화이고, 아들은 교환전화라고 했다. 아들은 뭘 하려면 꼭 며느리를 통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교환전화라는 거다.

하나님은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직통전화다. 우리 신음 소리에 민감하시고, 어디 아픈지, 괴로운 일이 있는지, 슬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지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며 우리의 부르짖음에 즉각 응답하시는 직통전화다.

온통 하나님을 향한 생각으로만 꽉 찬 예수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충만하시다. 그게 전부다. 하나님도 이런 예수님이 너무 사랑스럽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 한마디, 행동 하나에 즉각 반응하신다. 그게 바로 기적으로 나타나고, 천둥소리와 같은 호응으로 나타났다.

사도 요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었다(요일1:1). 그에게 그 소리는 사귐의 소리였다(요일1:3). 하지만 요한에게는 하나님의 생생한 소리가 들리고, 사랑의 사귐으로 들리지만 사람들은 전혀 알아보질 못한다(29절). 그들은 천둥소리로 착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혹시 그저 천둥소리로 들리나? 무심하게 자연의 소리로 듣고 흘려버리는 것은 아닌가? 안 된다. 천둥소리가 들린다면 우리를 깨우는 소리로 들어야 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자기 곁을 때렸던 벼락을 하나님의 천둥소리로 들었다. 그는 자신이 걷던 세상의 길에서 수도원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된 것이다.

만일 천둥소리가 들린다면 그냥 일상적인 일로 취급하지 말고,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소리에 하나님의 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소리에 생명이 있고, 승리가 있고, 영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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