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섭 박사
김규섭 박사. ©기독일보 DB

리쉬마 아카데미(대표 허정문 박사)가 1일 저녁 온라인 줌(Zoom)으로 제2차 유대-기독교 사상 연구회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강연에 앞서 허정문 박사가 개회인사, 대표기도를 드렸으며 모임 취지와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김규섭 박사(아신대 신약학)가 ‘하나님의 성전 혹은 신전 고린도전서에 대한 대체신학적 해석들에 대한 예비적 고찰’이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했다.

김 박사는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여러 차례 ‘성전’을 언급한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성전’의 표현이 예루살렘 성전과 연관된다고 여러 해석자들을 고려했다. 예를 들어 알베르트 호게타르프는 고린도전서 3:16-17에 나타난 성전 언어는 예루살렘 성전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며 리처드 헤이즈는 고린도전서 3:16-17은 교회가 성전을 대체한 것을 나타낸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최근의 학자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3:16-17에서 예루살렘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 성전은 단지 은유적인 차원에서 암시된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는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성전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예루살렘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내주를 언급하는 고린도전서 3:16b의 언급을 볼 때, 바울이 성전을 언급할 때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시는 예루살렘 성전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저는 고린도전서에서 성전의 표현은 여러 경우에서 ‘신전’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고린도전서의 독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익숙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보다는 고린도에 존재했던 아폴로 신전, 황제 신전, 데미테르 신전 그리고 비너스 포르투나 신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교회가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를 대체할 새로운 대안적 ‘성전’이라는 점을 의도했다기보다는 ‘신전’에 익숙했던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신전과 구분된 새로운 공동체와 장소인 교회를 새롭게 이해시키려 했을 수 있다”고 했다.

김 박사는 “고대의 직업 조합은 현대의 조합과 달리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의 직업 조합을 후견하는 신을 섬기고 있었다. 바울의 선교 방식은 고린도의 수공업자 조합의 수호신을 이방 신에서 한 분 하나님으로 바꾸는 방식에 따라 이뤄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자신이 선교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를 그들이 이전에 익숙했던 이방 신전과 관련된 경험과 구분된 방식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고린도전서 9:13에서 바울은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한다. 거의 모든 해석자들은 이 구절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과 관련된 구절로 이해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던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을 예로 드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바울은 사역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의 역할을 대신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신전의 제사장의 역할에 비춰서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고 했다.

김 박사는 “보다 중요한 것은 왜 바룽리 신전 제사장을 언급하는 가이다. 신전 조합의 관습과 구분된 그리스도 제의 조합의 새로운 관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익숙했던 신전 제의 조합 관습을 언급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신전 조합의 관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처럼 바울은 당시 관습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히려 바울은 고전 9:18에서 자신에게 주어질 상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의 조합에서는 자신들과 제의적 관계를 맺는 제사장들에게 영예를 돌리고 그들을 후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바울은 이러한 관습을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기독교 공동체가 기존의 제의 조합과 다르다는 것을 표방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찬가지로 고전 3:!6은 종종 대체신학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 대신 교회를 새로운 성전으로 간주한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바울이 이 말을 할 때 예루살렘 성전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익숙한 것은 오히려 주변의 이방 신전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개념을 바탕으로 은유를 구성할 수 있었을까? 바울이 실제로 겨냥한 대상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일반적인 이방 신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김 박사는 “우리는 바울이 한 편으로서 유대적이지만 한 편으로는 이방 문화에 익숙했다고 여겨야 한다. 바울은 선교적인 측면에서 고린도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익숙한 문화와 공동체 형태를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새로운 ‘신전’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사용하는 ‘성전’ 언어는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하는 공동체 혹은 장소로서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린도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이전의 신전과 관련된 정체성, 관습, 삶의 형태를 구분하는 차원에서 ‘성전’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서로를 바라볼 때 ‘차이의 존엄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바울의 시대에 기독교와 유대교가 아직 완전히 서로를 타종교로 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는 점을 우리는 양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시대에 기독교는 아직 유대교의 우산 아래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유대교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다른 한편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선교할 때 이방인들에게 익숙한 이미지와 문화적 개념을 사용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바울을 이방 문화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끝으로 김 박사는 “물론 바울은 이방 문화와 분명한 거리를 두었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바울이 유대적이고 어느 지점에서 헬라적인지 인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두 세계 사이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을 인식할 때 우리는 대체신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바울의 서신들과 신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심포지엄은 이어 김주헌 박사(아신대 신약학)가 ‘심판 보좌에 앉은 인자: 에녹 전승과 정경 복음서의 연결 탐구’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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