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열광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메시아, 능력있는 왕으로 연호한다. 아마 예루살렘 주변에서 야영하던 순례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이 대열에 참여한 것 같다.
2장과 6장에 이은 세 번째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의 입장도 무리의 태도도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사건이 절정으로 치닫는 것, 하지만 그날의 입성은 열렬한 환영 속에서의 입성이었다.
무리의 환영을 받은 입성
본문 앞부분인 9절부터 11절까지를 보면 갑자기 무리가 열렬히 환영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9절), 예수님이 마치 인기 스타처럼 입성하시는데 시선을 끄는 것은 요한이 이름 앞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을 강조하며 나사로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은 지 나흘만의 부활, 엄청난 이적을 다시 강조하는 듯하다.
대제사장들은 나사로와 그를 부활시킨 예수님을 함께 살해하려 했다(10절). 그리고 11장 50절에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했었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아니다. 둘을 다 죽이려 한다. 악이 성장한 것, 이게 악의 특성이다.
사두개인들에게 나사로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이중의 낭패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예수께 몰려오게 하고, 나사로의 부활이 사두개 교인들의 중요 교리를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든다. 여지껏 부활을 부정했는데 나사로가 버젓이 살아있다. 요즘 아이들 표현으로 ‘깜놀’, 심각한 사건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람 다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님을 믿음이러라”(11절), ‘믿음이러라’, 요한은 불완전 시상을 쓰고 있는데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무리의 반응이 상당 기간 진행되고 있는, 그 연속성을 표현하려 한 것 같다”고 했다.
졸지에 어둡고 괴로움을 뜻하던 베다니가 이름과 달리 복음의 고장이 되고 기독교 순례자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되고 있다. 이적의 절정을 나타낸 곳, 많은 유대인이 몰려드는 곳이 된 것이다. 물론 반신반의하는 구경꾼도 있고, 호기심으로 따라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와서 나사로가 살아나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는 현장을 보고는 믿을 수밖에 없다.
결국 나사로가 별들의 전쟁 유발자가 된 것이다. 대제사장과 유대 엘리트들이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며 문제의 원인이 된 나사로마저 죽이려 한다. 세상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폭거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른다. 우리나라에서도 보는 현상인데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문화는 죄다 죽음의 문화다. 부활 같은 복음을 얘기하면 비웃는다. 하지만 부활 신앙으로 이런 죽음의 문화와 현실을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모여든 무리처럼 예수님을 환영해야 한다. 예수님은 무리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셨다.
왕으로서의 입성
“명절에 온 큰 무리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 왕이시여 하더라”(12절), 여기서 ‘큰 무리’는 9절의 큰 무리와 다를 바 없다. 9절의 큰 무리가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찾아온 무리라면 12절의 큰 무리는 온 이방지역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상경한 지방 사람들이다. 아마 여기저기서 이미 예수님을 뵌 적 있는 무리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자신들이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르고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 있는 무리일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쓰임 받았지만 자랑할 것은 아니다. “주님이 영광 받으셨지 않나?” 함부로 그런 생각하는 건 위험할 수 있다. 정작 예수님은 그들의 환영에 별 관심이 없으시다.
여하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본질은 왕으로서의 등극이고 행진이다. 무리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쳤다. 예수님이 한 번도 자신을 왕이라고 하신 적 없지만 그들의 외침을 부정하신 적도 없다. 무리가 늘어난 것 같다. 18절의 무리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안에서도 나온 무리이기 때문이다.
“맞으러 나가 외치되”(13절), ‘맞으러’는 헬라어로 ‘아판테시스’(ἀπάντησις), 성을 방문하는 황제나 고위 사절단을 맞을 때 사용하는 공식 용어다. 이 단어와 짝을 이루는 단어가 ‘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인데, 파루시아는 재림으로 번역되지만 ‘나타남’ ‘현현’(顯現))의 뜻이기도 하다. 만일 왕이나 고위 사절단이 방문하면 성 위나 성문에서 맞이하지는 않는다.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같으면 공항에 나가서 영접하는 것인데 환영의 표시로 최소한 동구 밖이나 수십 km까지 나가서 영접한다. 그 사절단 출현을 파루시아라 하고, 그들을 공식 환영하는 행사를 아판테시스라 한다.
사절단을 영접한 성의 책임자가 함께 성문을 통과하며 대로를 행진하면 주변에서 사람들이 꽃을 뿌리거나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한다. 최대한 영광스럽게 대하는 거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런 행진이 여러 번 있었다. 헬라의 알렉산더, 로마의 폼페이우스, 가까이는 빌라도 총독이 이런 환영을 받았다.
무리가 종려 나뭇가지를 흔든 것은 통치와 승리를 상징한다. 예수를 왕으로 맞이하는 거다. 그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고 외쳤다(13절), ‘호산나’(ὡσαννὰ)는 히브리어 ‘호쉬아나(הושיעה־נא)’에서 나온 말,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그리고 ‘찬송하리로다’라고 했는데 영어 번역은 ‘Blessed’, 복 받기를 빌기보다 예수님의 축복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는 예수님을 대망하던 그 메시아로 인정하고 찬송한 것, 무리는 예수님을 ‘이스라엘 왕’이라며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있다.
마치 찬양이 폭발하는 것 같다. 환호성을 지르며 외친 것도 불완전 시상, 줄기차게 소리 질렀다는 의미다. 바클레이(Berkeley)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큰 소리로 외친, 예수님을 향한 한결같은 예찬이었다”고 했다. 주석가들은 전국에서 유월절에 오는 사람을 270만 명이라 한다. 그렇다면 환영인파도 대단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19절), 바리새인들을 절망하게 할 정도였을까? 한 마디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이 이렇게 영광스럽게 입성하셨지만 제자들은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16절). 나중에야 깨달은 제자들, 제자들이 무리보다도 늦었다. 그만큼 센스가 없었던 것, 제자들은 둔했다.
여기서 어린 나귀 타고 입성하신 것도 해석을 잘해야 한다. 예수님이 겸손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셨다기보다 성경의 예언 성취를 위해 나귀 새끼를 타셨다. 스가랴서에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라는 예언이 나오는데 스가랴서에는 ‘겸손하여서’란 단어가 있지만 요한은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뺏다.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5절), 요한은 겸손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입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왕이라면 군마를 타야 맞겠지만 군마는 정복자가 타는 것, 나귀가 평화의 상징이기에 예수님은 마치 돈키호테 같이 나귀를 타고 오셨다.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영원한 왕으로서의 입성
무리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 외치며 환영했는데 요한복음에서의 예수님은 초월적인 신성에 초점이 맞춰진 분, ‘이스라엘 왕’은 인간적인 용어라 오해가 따를 수 있다. 그런데도 한 민족의 왕도 아니고, 정치적인 왕도 아닌 예수님이 이걸 허용하신다.
일찍이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신앙을 고백한 적 있다(1:49). 그때 예수님은 긍정도 부정도 하시지 않았다. 반면에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사람들이 당신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을 아셨을 때는 그 자리를 피하셨다(6:15).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이 논쟁이 따른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18:33) 묻고, 유대인들에게도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19:15)라고 묻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는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붙인다. 유대인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고칠 것을 요구하지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19:22)며 한 마디로 거부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왕’이라는 호칭을 받아들이신다. 예루살렘 입성하면서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이스라엘 왕’으로서 환영할 때 마치 무리의 ‘이스라엘 왕’이라는 환영에 호응하신 듯한 행동을 하신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14절), “맞아 나 왕이야!” 그러신 것 같다.
대제사장들은 물론 무리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왕으로 생각했다. 물론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예수님은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18:36) 그리고 빌라도가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라고 묻자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그런데 왕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의 왕은 아니다. 5년이나 몇 십년짜리도 아니다.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의 왕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요, 풍성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왕, 영원한 왕이시다. 한 민족이나 한 지역, 한 계층의 왕이 아니라 온 인류의 왕이며 우주의 왕이시며, 육신의 왕이 아니라 영혼의 왕이시고, 우리 마음의 왕이시다.
대학 1학년 때 CCC에서 동화형식으로 된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작은 소책자를 읽었다. 큰 감동을 받았다.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가 그리스도께서 자기 마음의 방에 찾아오신 것을 상상하며 쓴 글인데 작지만 힘이 있는 책이라 순원들에게 많이 소개해줬다.
저자는 먼저 예수님께 자기 서재를 보여드린다. 서재는 생각의 방인데 서재 선반에 쓸데없는 책과 보기에 부끄러운 책들이 꽂혀 있었다. 얼굴을 붉힌 채 서 있는 저자에게 주님은 유익하지 않고, 깨끗지 않으며, 참되지 못한 것들은 다 버리고 그 선반 중심에 성경을 꽂으라고 하신다. 그렇게 하자 생각의 방이 정돈되고 중심이 잡힌다. 서재가 경건의 방이 된다.
이어서 주방을 보여드렸다. 식욕과 욕구의 방, 저자는 평소 자기가 먹던 음식들을 내어놓았다. 메뉴는 돈, 학위, 증권 등이었고, 반찬은 명성과 행운에 관한 신문 기사들이었다. 주님은 그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하시며, 우리 영혼의 양식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바꾸라고 하신다. 그 음식들이야말로 참 만족을 주는 음식이다.
세 번째는 거실이다. 친근하고 안락한 곳, 저자는 거기서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로 약속한다. 교제가 너무 좋고, 행복했다. 하지만 맡은 일에 시달리며 이 시간이 짧아지기 시작했고 거르는 날도 생긴다. 어느 날 거실을 지나다 보니 문이 열어 있어서 들여다보니 예수님이 혼자 앉아계신다. 구원자이자 친구신데 혼자 계신 것, 무시 아닌가?
다음은 작업실이다. 작업실은 일터인데 작업대의 작품이 형편없다. 자기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하시며 주인공의 손을 잡고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주님과 함께하며 좋은 작품이 나온다.
다음 방은 오락실이다. 자기만의 놀이터, 보여드리기 싫었던 방이다. 왠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을 마지못해 모셨는데 예상외로 매우 즐겁다. 주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하시며 당신이 오신 목적은 참 행복을 주시기 위함이라 하신다.
그리고 침실을 보여드린다. 주님은 거기서 이성 교제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도와주신다. 마지막으로 보여드렸던 것은 벽장이었다. 비밀을 넣어두는 은밀한 방, 평소에 못 느꼈는데 온갖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로 가득하다. 냄새가 온 집안을 진동한다. 예수님께 열쇠를 드린다. 예수님은 벽장을 깨끗이 청소하고 새롭게 도배까지 해주신다.
저자는 모든 열쇠를 예수님께 넘겨드린다. 아니, 아예 집 소유권을 넘긴다. 스스로 자기라는 집을 관리할 자신이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주님 당신은 손님이었고 제가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제가 하인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저와 이 집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명의 이전까지 한다. 그러자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화가 그의 영혼에 밀려온다.
묻는다. 인생의 주인이 누구신가? 누가 당신의 왕이고 누가 당신을 다스리나? “예수, 우리 왕이여!”, 찬양만 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람도, 어떤 물질도 결코 우리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선언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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