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웨협 대표회장 양기성 박사

정체성이란, 주로 인간에게 적용되는 말로서 자신 자체에 대한 본질이나 확실성을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체계가 정체성이다. 예를 들어, 성경 출애굽기 3장 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가 정체성을 말하는데 있어서서 가장 적절한 예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는 실체를 말한다. 또한, 정체성이란, 유전적 또는 생물학적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고, 그에 대한 소신과 확실성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일종의 상태에 대한 반응의 척도라 할 수 있다.

때로 인간들은 자신의 성격, 특성, 또는 판단의 능력에 대해 애매모호한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존재의 불확실성을 뜻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신앙이나, 이념, 또는 사고(생각)를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인의 존재를 확실하게 밝히는 것이어서 더욱 그 개념은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결국, 정체성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체계나 의미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 들어 사회현상의 특성은 경계선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도시와 시골의 차이가 없어지게 되었고, 인종사이도 벽이 허물어져 사람들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있고, 생활이나 문화적으로도 다문화 사회가 이루어져 그런 현상들을 존중하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에는 동양과 서양이 지리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상과 문화 사이에 분명하게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경제발전이나 문화공유로 말미암아 동양이 서양이고, 서양이 동양 모습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굳이 인종이나, 신분, 또는 문화의 구분을 하지 않는 추세다. 이는 자신 고유의 정체성의 변화나, 또는 모호한 입장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데, 사실 이러한 현상은 정체성 보다 생존본능이 먼저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에 관한 것이다. 종교적 신앙이야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해 주는 분야다.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교회 출석은 하면서도 신앙인인지 아닌지가 분명하지 않은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성도로서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게 하는 일이다.

신학적인 면에서도 성경을 진리라고 믿는지, 아니면 일종의 종교서적이나, 도덕 교훈집 같은 것으로 믿고 있는지 불확실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신학자들도 많다. 성경의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면서 진화론을 옹호하거나, 진화론이 너무 극단적으로 성경의 창조론과 배치돼 중간노선으로 타협한 유신진화론 같은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이름있는 보수교단의 신학교들 마저 신론, 성령론을 무시하고, 현대 철학주의적 신학관념을 주로 강조하는 강의를 하는 것 같다. 신학자인지, 철학자인지, 아니면 문화사회 학자인지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라 할 수 있다.

바르트는 그의 변증론에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는 존재라 하여 경계선이 있음을 말하였는데, 지금은 하늘과 땅 사이의 어느 지점이나 영역에 신도 있고 인간도 존재하는 그런 관계 속에 있는 것 같다. 복음주의 신학은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라 말하는데 반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는 “신이 인간이고 인간이 신이다”라 하므로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선을 없애버리는 주장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 신격적 정체성과 인간의 인격적 정체성을 하나로 몰아 그 의미를 퇴색시켜 버리는 것이다. 죄인지 의인지 분명하게 판단하고 구분해야 한다.

이와 같은 신앙적 불확신성에 대해 구약의 선지자는 강한 어조로 그 불분명을 지적한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인으로서 야훼사상을 가진 민족을 향해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 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 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 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하지 아니하는 지라”(왕상 18:21). 그들 역시 신앙에 있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로부터 질타를 받은 것이다.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교훈은 신약에서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다. 초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됨과 부활의 확신이 있어서, 그 믿음에 충만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지조를 지키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회는 항상 죽음과 대치되는 국면 가운데서 부흥하고 발전하였다. 1세기 로마의 박해, 화형이나, 사자굴에 던져진 예들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말은 성도들 모두가 각자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하였을 때 기독교 교회는 부흥하고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1세기, 교부들은 기독교의 정체성 정립에 자신들의 영과 혼을 쏟아부었다. 그들의 작업은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라는 것과,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로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의 격의 위치에 존재해 있다는 삼위일체 교리도 확실하게 세워놓았다. 이 신앙적 교리(doctrine)를 부정하거나, 왜곡하거나, 모호하게 믿거나 주장하면 가차없이 이단, 적 그리스도로 규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체성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교리나 고백에서 비성경적인 노선을 취하면, 이는 기독교가 아닌, 일종의 종교적 형태의 믿음일 뿐이라 말할 수 있고, 기독교 발전에 전혀 공헌하는 일이 못 된다 할 수 있다. 자신의 신앙노선이나 신학적 교리가 분명하지 않으면, 성경의 말씀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고, 나아가 이단자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두에서 말 한 바와 같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특히 “나는 크리스천인가” 또는 “나는 신학자인가”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경계선을 분명히 하고 살 필요가 있다.

you know that yourself!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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