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의 책 마지막 장인 12장은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유월절, 히브리어로는 ‘페사흐’(פֶסַח), 헬라어로는 ‘파스카’(πάσχα), 출애굽하던 날 밤 하나님의 천사가 애굽의 장자들을 칠 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죽음을 면했기에 ‘죽음이 넘어갔다’라는 의미로 생긴 말이다. 영어로는 패스오버(pass over), 이스라엘의 민족 해방절, 유대 명절 중 가장 큰 명절이다. 예수께서 유월절이 시작되던 날에 돌아가시고 3일째 부활하셨기 때문이 우리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요한복음에서는 2장과 6장에 이어 세 번째로 언급된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소중히 여기셨다. 어린 양의 희생의 피로 온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았다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월절이 예수님의 장례식날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유월절 양으로 묘사한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당신의 죽음을 내다보며 사셨지만 유월절을 앞두고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셨다. 때와 장소를 아셨고, 그때를 준비하셨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런데 요한은 그때 ‘예수를 위한 잔치’가 있었다고 한다(2절).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를 위한 잔치’도 아니고, ‘문둥병자 시몬을 위한 잔치’도 아니다. 같은 사건을 다룬 마태복음(26:7)과 마가복음(14:3)에서는 그저 ‘식사하시는 예수님’으로 표현했는데 요한은 ‘잔치’라 했다. 그냥 식사하는 것과 잔치하는 것이 느낌도 다르고 분위기도 완전히 다르기에 우리는 요한의 견해를 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날마다 하는 QT도 식사 분위기보다는 잔치 분위기가 더 은혜로울 것 같고, 식사는 한 끼 떼우는 것일 수 있지만 잔치는 준비하고 그 시간의 흥겨움도 다르며 여운도 오래 가기 때문이다.
요한은 절기를 들어 시간을 점찍는 방법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다. 6장까지가 유월절이 중심이고, 7-9장까지는 초막절이 배경이 되다가 다시 유월절을 중심으로 기록한다. 그래서일까? 명절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사람답게 ‘잔치’라고 했다. 무엇보다 제자들 중 막내로서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늘 신나고, 행복한 삶을 살았기에, 잔치하는 인생이었기에 잔치하는 모습으로 봤을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사건 기록 방향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 자신보다 예수님을 위해 잔치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생명의 감격이 있는 잔치
다른 두 복음서에서는 베다니 문둥병자 시몬의 집이라고 했지만 요한은 “베다니,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했다. 시몬을 마르다의 남편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요한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나사로를 언급하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아예 관심이 없던 마르다도 등장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태와 마가가 ‘한 여자’라고만 표현한 그 여자가 마리아라고 이름을 밝힌다. 집주인인 문둥병자 시몬의 이름은 아예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3남매의 헌신이 빛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그들의 헌신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 때 1차 베이스캠프는 감람산이었지만 2차 베이스캠프는 언제나 베다니였던 것 같다. 11장 18절에 보면 거리가 오리쯤 된다고 했으니 2㎞ 정도 떨어진 곳, 당시 교통수단으로는 그리 가까운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다니를 사랑하셨다. 왜? 3남매 때문이다. 11장 5절에 보면 본래부터 3남매를 사랑하셨다고 했고, 36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다 알 정도로 사랑하셨다고 했다. 주님과 나의 사이도 이렇게 밀도 높은 사랑의 관계라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 아닐까?
요한은 그때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다”고 했다(2절).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만에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베로 동인 채 살아나온 바로 그 사람이다.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표적을 비롯한 기적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죽은 지 나흘이라 했다. 예수님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대로 생명을 주신 것이다. 더 나아진 정도가 아니다. 지금 이 잔치는 생명을 얻은 감격의 잔치다.
가벼운 교통사고나 작은 수술을 하고 나와도 상당한 회복 기간이 필요하지만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 모든 기능이 올 스톱됐던 나사로에게는 회복 기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후유증도 없고, 부작용도 없다.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았지만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그저 앉아있기만 해도 빛나는 존재,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다. 그래서 베다니의 잔치는 생명 얻은 감격이 있는 잔치였다.
사랑의 헌신이 있는 잔치
11장이 부활 생명으로 감격이 가득하다면 12장은 온통 죽음의 향기로 가득하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절), 하지만 이건 죽음의 향기가 아니다. 이미 부활 생명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라고 했다. 정말 귀한, 정말 값진 기름인데 갑자기 마리아가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 아무도 예기치 못한 행동이다.
계산이 빠른 가룟유다의 표현을 빌리면 가치가 3백 데나리온 정도(5절),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5천만 원쯤 된다. 당시에는 처녀의 결혼지참금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마리아 입장에서는 그럴 만했다. 만일 예수님이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주지 않았다면 구걸하며 살든지 몸을 팔며 살든지, 살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라비를 살려주신 분, 너무 감사하고, 너무 좋다. 그래서 평생 모은 전 재산 같은 기름을 다 드린다. 지참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해도 좋다는 심정이다. 결혼을 하든 못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서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경의 표현으로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쏟아붓고 여인의 영광인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린다.
마태와 마가는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고 했다. 머리에 부은 것은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임명할 때의 방식, 마치 메시아 대관식 같다. 그런데 요한은 발에 부었다고 했다. 사실 비싼 향유를 발에 붓는 경우는 없다. 겸손해서 차마 머리에 붓지 못하고 발에 부었을까? 아니다. 마리아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언적 행동을 한 것,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어쩌면 두 군데 모두에 부어드렸을 수도 있다. 머리에 부은 것은 당시 귀한 손님께 행한 특별한 환대의 의미였으니 “정말 환영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저의 왕이십니다”라는 의미였고, 발에 부은 것은 당시 종들이 물로 발을 닦아주는 풍습이 있었으니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이다. 모든 것을 다 걸만한 분, 사랑으로 인한 자발적 헌신이었다.
가룟 유다는 낭비라고 펄쩍 뛰었다. 언제 가난한 자를 그렇게 생각했다고, 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지 않느냐며 난리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분개했다고 했지만 요한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룟 유다 저 형은 저러면 안 되는데 싶었던지 가룟 유다가 비난하고 있다며 그를 ‘도둑’이라 했다. 요한에게 완전히 찍힌 것, 유다만큼은 그러면 안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건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께 성질낸 거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맞는 말이나 현혹되면 안 된다. 그는 돈을 따라 사는 사람,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기억하라. 사랑에 답이 있다. 사랑은 낭비하는 것, 사랑하며 낭비라고 생각하면 그건 계산적인 사랑일 뿐이다. 열정이 있으면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모습을 보며 헌신은 사랑이어야 하며 비난이 있더라도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가진 것에 인색하다면 그건 사랑이 없는 거다. 지독한 구두쇠 영감이 있었다. 그 영감님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입으로만 예수를 믿었지 남에게 베푼 적이 없었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할 뿐, 삶으로는 신앙인이 아니다. 이 영감은 결국 지옥행으로 결정되었다. 그러자 그 영감이 펄쩍 뛰면서 “내가 지금부터 10여 년 전에 거지에게 백원을 준 적이 있는데, 왜 한 번도 베푼 적이 없다고 합니까?” 확인 결과 사실이었다. 정말 백 원을 거지에게 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재판장이 고함을 질렀다. “저 영감에게 백원 돌려주고 지옥으로 보내!” 가진 것이 있다면 있는 것으로 사랑해야 한다.
논산훈련소에서 부모들을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다. 자식들이 연병장으로 들어오는데 손발이 짝짝 맞다. 절도가 있고 일사분란하다. 그런데 훈련병 한 명의 손발이 맞지 않는다. 다른 훈련병들과 반대로 움직인다. 관람석 여기저기서 “쟤는 안 맞네” 그러는데 그 훈련병의 엄마가 투덜거린다. “세상에. 우째 발 맞는 놈이 내 아들 하나밖에 없노”, 이게 부모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도 그 부모의 마음과 같다. 실수해도 예쁘게 보신다. 사랑스러워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신다.
주님의 칭찬이 있는 잔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26:10), ‘좋은 일’이라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26:13)라고 하신다. ‘잘한 일’, ‘기념 될 만한 일’이라고 극찬하신다. 유다가 아니라 마리아의 손을 들어 주신 거다.
독일계 유태인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은행가 아버지 덕분에 멘델스존은 부족함이 없이 행복하게 어린 시절을 지낸 음악가다. 그가 17세 때 작곡한 ‘한 여름밤의 꿈’ 가운데 ‘결혼행진곡’은 미혼여성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곡이다.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은 유사한 점들이 많다. 두 사람 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재성을 드러냈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요절했다. 그런데 모차르트의 음악은 대체로 좀 무겁고 장중하고 어렵다는 느낌이다. 철없는 아내가 곁에서 많이 힘들게 해서 결혼생활이 힘들었던 것, 그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반면에 멘델스존의 음악은 경쾌하고, 즐겁고, 행복한 느낌을 준다. 부유한 집안 분위기가 영향을 줬지만 곁에서 힘이 되어 준 아내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게 중요한데 마리아는 낭비하는 사랑으로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마태도 마가도 좋은 일한 마리아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 분명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14:9)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이를 순종하지 않았다. 공관복음을 기록할 때는 종교 지도자들이 아직 나사로를 죽이려 했고, 마리아를 적대시했기에 당국의 눈을 피할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세기 후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할 때만 해도 이 사람들이 이미 죽었기에 안심하고 실명(實名)을 밝힌 것 같다. 요한은 그녀의 이름이 마리아라고 분명히 밝혔다. 아름다운 일을 했다는 주님의 칭찬과 예수님이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은 자기 꿈을 이루는 수단이었지만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꿈 그 자체였고, 목표였고, 소망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고 마리아의 꿈을 이루어주셨다. 꿈이 중요하다. 그리고 목표가 선해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중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가난한 홀어머니 품에서 성장했다. 모녀는 전쟁 중에 먹을 것이 없어 아사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한 구호단체 직원이 모녀를 찾아와 음식을 제공했다. 모녀는 구호품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구호품으로 생명을 유지한 소녀는 세계적인 영화배우로 성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유엔아동기금, 유니세프의 (UNICEF)의 친선대사가 되어 전 세계를 누볐다. 그녀의 고백이다. “이제 내가 받았던 사랑의 빚을 갚을 차례입니다. 내가 나를 구해준 단체를 위해 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나는 정말 기쁩니다.”
이 배우가 바로 그 유명한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천사로 살다간 세기의 미인이다. 사랑의 손길이 없었다면 그녀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자선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명배우의 화려한 연기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귀한 일을 했다. 오지, 전장, 전염병 지역 어디든 달려가 사랑을 베푼 정말 아름다운 손길이었다.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주님이 칭찬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아름답고 숭고한 그 보은(報恩)의 손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한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했다. 기억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하는 순간 그 사람은 부분적으로 살아나는 것, 죽었어도 우리가 아름답게 기억하고 사랑한다면 그녀의 일부가 살아 있는 것과 같아진다. 수십 년, 수백 년이 흐른 후에도 사람들은 기억 속에 존재한다. 누군가가 그 이름을 불러준다면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타산적이고 이기적으로 바뀌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 가정이 파괴되고, 기본적 인정마저 메말라가고 있을지라도 나사로를 불러내시듯 우리 이름을 부르신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사는 사람, 그 사랑 맛을 알고 사랑으로 살아 인생의 맛을 음미하며 예수님을 위해 잔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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