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 박사(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상임대표)
최선 박사(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상임대표)

종교개혁사를 공부하는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스위스와 서유럽을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16세기 스위스의 제네바, 취리히, 바젤은 프랑스 위그노들이 가톨릭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억압으로 고통을 겪었다.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스위스로 프로테스탄트 피난민들과 종교개혁자들이 각국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생명의 진리를 위하여 많은 피를 흘린 그들의 불꽃같은 희생의 정신을 돌아보며 혼란한 시대에 신앙의 교훈을 삼고자한다.

16세기의 유럽은 기독교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양한 발전도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박해와 반성경적인 제도로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에서 벗어나 성도들에게 큰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가톨릭의 극심한 물질적, 윤리적 타락에 맞서서 종교개혁의 등불을 든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 성경과 믿음을 강조하며 등장하게 되었다. 본 글에서는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자들을 찾아서 종교개혁의 정신적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프랑스 출신이며 개혁교회의 기초를 닦은 존 칼빈이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영향은 스위스와 프랑스가 바른 교회 개혁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프랑스 국왕이 위그노들을 박해하자 칼빈은 개신교 도시였던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기욤 파렐의 강력한 요청으로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존 칼빈은 종교개혁 2세대로 마틴 루터의 개혁정신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독일의 루터파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신득의 원칙을 매우 중시했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에 복종하며 가톨릭적이며 신학적인 요소를 유연하게 수용하였다.

마틴 루터가 온건적 개혁주의였다면, 존 칼빈은 하나님 절대중심으로 절대주권과 원칙을 중시하며 국가와 교회분리를 주장했다. 그는 보다 혁신적이며 엄격한 개혁주의로 경건하고 강력한 신앙을 강조하였음을 인식할 수 있다.

심지어 존 칼빈은 십자가 위에 예수의 형상을 달지 못하게 할 정도로 우상숭배에 대하여 매우 엄격했다. 그는 미사를 예배와 설교로 바꾸었다. 칼빈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 출신 존 낙스는 본국으로 돌아가 장로교 목사, 장로, 집사, 교사로 구성된 교회 직제의 기초를 세우며 장로교를 발전시켰다.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기본 원칙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었다. 칼빈에 의해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합쳐져서 이른바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이 완성이 되었다.

칼빈의 종교개혁 동료였던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칼빈보다 먼저 프랑스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그는 스위스에서 활동했던 순회 선교사이자 위그노 종교개혁자로 스위스 베른과 제네바를 종교개혁 도시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칼빈이 제네바에서 활동하도록 주선하였고 개혁교회 설교자로 활동 하였다.

칼빈의 후계자였던 테오도르 베자(Theodor Beza, 1519-1605)는 법률학도로서 1548년 심한 질병 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다. 또한 베자는 제네바와 로잔에서 그리스어를 강의하였고 칼빈이 설립한 제네바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개혁파를 옹호하였고 제네바 종교지도자인 칼빈의 후계자로서 베자 사본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4세기 말 고대 사본으로 1562년 1차 프랑스 종교전쟁 중에 리용이 약탈되던 중에 베자에게 인계되었고 1581년 캠브리지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었다. 베자는 피난과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고통 받았던 프랑스 위그노들의 자문역할을 훌륭하게 담당하였다.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는 16세기 영국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로 칼빈의 스코틀랜드교회의 창시자이며 장로교의 선구자였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였지만 제네바에서 칼빈과 교류하면서 개혁주의 교회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존 낙스는 1561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로마 가톨릭 신자인 여왕 메리스튜어트 1세가 교황 정치로의 회복 시도와 개혁주의 종교개혁을 방해하자 메리 1세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개혁주의 도입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1567년 여왕이 퇴위하고 그 아들 제임스 6세가 프로테스탄트 왕으로 즉위함으로서 존 낙스의 종교개혁이 스코틀랜드에서는 크게 인정받게 되었다.

중세시대는 점점 종교가 타락해 오히려 반성경적이었으며 평신도는 성경을 읽을 수도 없는 시대였다. 성직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 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성경이 주장하는 원래의 복음적인 교회로 돌아가자는 신앙운동이었다. 본질과 멀어진 것들을 혁신적으로 개혁하고 수정하자는 개혁정신을 담고 있었다. 교황 중심 주의적인 권위와 인본주의적 발상으로부터 첨가 되고 오염된 의식 등을 제거하고 오직 믿음중심, 성경중심, 은혜중심, 예수중심의 신앙본질로 돌아가는데 오랫동안 피 흘림과 희생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가식적인 종교의식과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과 기쁨이 없는 신앙행위를 경계하여야 하겠다. 오늘은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자들을 살펴보았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 기독교 정신이 사회를 정화하고 섬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오직 생명의 복음을 전하며 크리스천들이 믿음과 삶의 실천을 통해 향기롭고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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