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1972년 1월 24일 남태평양의 섬 괌에서 갇혀 지내던 짐승 모양의 한 노인이 발각된 건 세계적인 뉴스거리였다. 이름은 쇼이치 요코이(橫井庄一), 나이 58세,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나고야에서 징집됐던 일본군인, 참전 3년 만에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미군 비행기가 떨어뜨린 전단을 통해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52년 무렵 알고도 미군에게 잡히면 포로 될까봐 동굴 속에 숨어서 27년을 홀로 지냈다. 낮에는 동굴 속에 숨어있다가 밤에만 나와 과일과 물고기로 연명했다. 사람들이 그를 발견한 후 전쟁이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했지만 두려워하며 자기를 동굴에 데려다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귀국해 참의원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그 사람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우리는 두려움의 동굴, 고통의 동굴에 갇혀 진정한 행복과 자유도 누리지 못하며 산다. 어떤 분의 묘비에 적힌 글이다. “사랑했으나 사랑받지 못했고, 기쁨을 주려 했으나 기쁨을 얻지 못했고, 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죽어서도 외로운 이, 여기 잠들다”. 사람들은 죄다 외롭게 산다.

살고는 있으나 산 것 같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본문에도 깊은 동굴에 갇혀 꽁꽁 묶여 죽어 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사로다. 어떤 사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37절)라고 했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 안 들렸을까? 비통히 여기시던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물으셨다.

마르다가 벌써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도 믿음을 강조하시자 누가 옮겼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돌을 옮겨놓았다. 아마 마르다와 몇몇 유대인들이 함께 옮겼을 것이다. 말씀으로 돌문도 자동문처럼 열리게 하며 나사로를 불러내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골든 마우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유대인들이 더 확실한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려고 그들로 하여금 돌을 치우게 하셨던 것 같다”고 했다.

예수님이 큰소리로 외치신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 한 마디에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44절),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님의 ‘나오라’는 명령 때문인데 그 과정이 은혜롭다.

감사 기도하시다

나사로는 죽었고 무덤에 묻혔다. 유대인은 죽으면 그날 바로 매장한다. 날씨가 더워 부패하기 때문이다. 이게 1차 매장, 이때는 밧줄로 꽁꽁 묶어 무덤에 넣어 둔다. 밧줄로 묶는 것은 속죄의 의미다. 평생 지었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육체를 괴롭히는 것이다. 열왕기하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자기 아버지 아하즈의 시신을 끌고 거리를 다닌다. 불효자라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게 구약 사람들의 관습,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랬던 거다. 그렇게 꽁꽁 묶어서 한 1년 놔두면 더운 나라라 뼈만 남는다. 그러면 뼈만 추려서 납골관에 넣는 게 2차 매장이다.

무덤은 삼중 구조로 되어 있다. 무덤 밖, 현관, 그리고 무덤 안. 무덤 밖에는 무덤 안에 있는 시신을 보호하기 위한 돌이 있다. 크기는 대략 길이 1-2미터 전후, 주로 둥글다. 돌을 굴려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현관이 나온다. 현관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놓는 곳, 1년쯤 지나면 거기서 뼈만 모아 납골관에 안장한다. 무덤의 규모는 각각 다르다. 보통은 가족들이 들어갈 수 있는 규모지만 어떤 무덤은 70명까지 들어간다.

그런데 “돌을 옮겨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1-42절). 예수께서 감사기도를 드리신다.

더 이상 울지 않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 이 기도의 핵심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마음이고, 하나님이 항상 당신의 말을 들으신다고 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관계가 아주 좋다는 의미다. 예수님의 뜻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이 하려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고 즉각 행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면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시다. 또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고 로고스다. 인간의 한계나,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없으시다. 그래서 항상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되었던 것이다.

이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사람들이 알아야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기도가 나사로를 다시 살린 것은 아니다. 아니, 사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은 기도나 주문이 필요 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신 것은 이 기도가 세상에 보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으신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어떻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할까에 집중되어 있으시다.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본받아야 한다. 사도행전 16장의 바울과 실라는 예수님의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그대로 본받은 사람들, 그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중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감옥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빠져나오지 않고 간수를 전도한다. 목적이 탈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적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묻는다. 관심이 어디에, 무엇에 집중되어 있나?

큰 소리로 부르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43절), “나사로야 나오라” 마치 요한복음 10장의 양의 이름을 불러내는 목자의 모습 같다. 예수님은 지금 양의 이름을 부르듯 나사로를 부르신다. 주목할 것은 ‘큰 소리’로 부르셨다고 했다. 죽은 자가 듣게 하기 위한 큰 소리가 아니다. 이 소리는 주변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한 큰 소리,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기 위한 큰 소리다.

유대인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생명에서의 완전한 이탈을 의미하는 나흘, 유대교 랍비에 의하면 “사흘이 지나면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고, 시신은 부패하기 시작하며, 그때까지 시신 주변을 배회하였던 영혼은 육체로부터 이탈한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나흘이 지난 무덤 문을 열고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외치셨다. 이 말씀이 바로 부활의 때 우리가 듣게 될 말씀이다.

이때 만약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냥 “나오라” 그러셨다면 그곳이 공동묘지가 있는 지역이었기에 한 500명은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나사로야 나오라” 이름을 부르셨는데 앞으로 우리의 이름도 이렇게 부르실 것이다. 그래서 이 진리를 터득한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라는 유명한 고백을 했다.

베와 수건을 동인 채 동굴 무덤에서 나사로가 나온다. 그 모습이 마치 이집트 피라미드의 미라의 부활 같다. 그들이 그리던 부활이 종말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선행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노력 때문도 아니다. 부활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오직 주님의 말씀,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만 무장해야 한다.

금실 좋게 사신 104세 된 할아버지와 99세의 할머니, 자녀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이제는 세상을 떠나셔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본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영감” “왜 그래?”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하나님 명부에서 빠뜨리셨나봐요” “쉿! 조용히 해 하나님 들으실라” 쉬쉬한다고 영원히 살까?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 그런데 죽음이 끝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람들은 죽어서도 자신의 육체를 보존한다. 구소련의 레닌,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 구소련의 스탈린, 구 체코슬로바키아의 고트발트, 베트남의 호치민, 앙골라의 네트, 가이아나의 바남, 중국의 마오쩌둥, 북한 김일성, 김정일 총 10구 정도,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거창하게 보존하지만 사실은 불쌍하다. 2011년 12월 20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김일성 시신 영구보존 과정에 100만 달러(14억)가 들었고, 관리비도 연간 80만 달러(11억 이상)가 든다고 한다. 부활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부질없는 짓이다. 기억하라. 죽음도 부활도 주님의 은혜이다.

요한복음 14장으로 가면 예수님이 떠난다고 하시자 제자들이 근심에 싸인다. 하지만 천국을 마련하신 예수님, 제자들을 데리러 오신다며 근심하지 말라고 큰소리치셨다(14:2-3). 주님은 우리에게도 큰소리치신다. 그 소리가 바로 “내가 책임진다”는 것, “나사로야 나오라”는 이 소리는 내가 책임진다는 주님의 큰소리였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절), 속박되어 있던, 죽어서 매장되어 있던 나사로를 풀어주는 해방 선언이다. ‘수족이 베로 동인 채’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왔을까? 강시처럼 폴짝폴짝 뛰어나왔다는 것일까? 레온 모리스(Leon Lamb Morris)는 “이적 속의 또 하나의 이적”이라는 호스킨스(E. C. Hoskyns)의 말을 인용해 설명했다. 호스킨스는 “걸어 나온 것이 아니라 단단히 묶인 채 강한 능력에 의해 끌려 나온 상태”라 했다. 아니면 묶는 방법이 두 다리를 하나씩 따로 묶는 것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부활은 풀리는 것, 성경을 보면 “풀린다”는 말이 참 많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시71:2), “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시116:16), “보라 내가 오늘 네 손의 사슬을 풀어주노니 만일 네가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좋게 여기거든 가자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렘40:4), 하나님은 풀어주시는 분이다. 죄로부터 풀기 위해 오신 분,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이건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4). 예수님은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푸셨다. 대신 죽음의 밧줄에 묶이며 우리를 생명으로 푼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고 우리를 살리신 곳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신적 교환소, “우리는 교환되었다”(We are exchanged). 예수님이 대신 묶이고 우리가 풀린 것이다.

미국의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가 쓴 『Six Hours One Friday』란 책이 있다. 이 책에서 루케이도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간의 세 가지 F가 풀렸다고 했다. 그 3F는 Futility(허무), Failure(실패), Finality(죽음)이다.

요한복음 11장과 유사한 그림은 구약 에스겔서 37장의 마른 뼈가 부활하는 장면이다. 바벨론의 포로된 땅에서 예언한 에스겔 선지자의 부활에 대한 예언,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망한 지 1년쯤 지나서 했던 예언이다. 에스겔이 주의 영에 이끌려 간 곳은 마른 뼈들이 뒹굴고 있는 죽음의 골짜기, 마른 뼈들이 가득한 데서 하나님이 물으신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겔37:3). 그리고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하여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37:4-5). 뼈들이 모이고 자기 뼈들을 맞추기 시작한다.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7절). 이어서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으로 덮으라”고 명령하니 해골과 뼈 위에 살이 붙어 사람의 형상이 된다. 마지막으로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겔37:9) 하니 마른 뼈들이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룬다.

이스라엘의 해방과 귀환을 의미하는 환상이다. 민족이 두 동강 난 것이 죽음이라면 두 동강난 남북 왕국이 하나가 되는 것은 부활, 부활은 포로에서 해방되고, 가난하고 약한 민족이 강성해지고 지도력을 갖게 되는 민족 비전의 실현이다.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유대인들은 ‘선(先) 순종’이 그들의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후(後) 체험’하게 한 것이다. 마르다와 돌을 옮겨 놓은 몇 사람의 믿음을 쓰셔서 예수님은 죽었던 나사로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다.

선(先) 순종이 중요하다. 요한복음을 통해 계속 강조하지만 믿음과 순종은 동의어(同義語). 믿음이 곧 순종이다. 순종해야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사용하여 붕대를 풀게 하신다. 그렇다면 어려운 상황일수록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야 한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일단 순종하면 기적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돌들을 움직이고 난 후 죽은 자의 수건을 서로 풀어주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문제를 푸는 능력이고, 교회는 푸는 열쇠이며, 기도는 푸는 방법이다. 그리고 믿음은 푸는 연습이다.

“나사로야, 나오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부르심, 우리를 부르는 주님의 음성이다. 십자가에서 이미 풀어주셨는데 도로 묶지 말고, 부활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출발점임을 믿고, 언제나 부활 생명으로 충만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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