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가장 귀한 것이 가장 흔한 보통의 가치로 나타난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의(義)”라는 단어다. 그렇게 귀한 단어인 의를, 숭고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나 어디서든 쉽게 개념없이 말하고 있다. 심지어 조폭들도 의를 거론하고, 의리를 말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 본래의 뜻을 다시 회복해 보고자 한다. 의란 무엇일까?

본래 의는 직선과 같이 “곧음”을 뜻한다. 구불구불 휘어진 것은 곧은 것이 아니기에, 믿음이나 신념에서의 갈 지(之)자 행보는 의라 말 할 수 없고, 그런 사람을 의인이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의는 “바름” 또는 “옳바름” 같은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말 할 때는 “상식에 어긋나지 않게 바르게 사는 사람” “옳곧게 사는 사람”들을 그렇게 말한다.

동양에서 의(義)의 한자는 羊(양)과 我(아/나)의 합성어인데, 말하자면 양 아래 내가(인간) 있는 형상이다. 양은 어질고, 순하고, 겸손하고, 순종하고, 희생당하는 가축으로 인식되어 있다. 어질고, 순수하고, 겸양의 가치 아래 내가 있을 때 그때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성경을 보면, 요한복음 1:29절에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 말하고 있어 요한은 예수님을 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양을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 아래 사람이 있는 것을 의라 하는 것이다. 한문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상호 상징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지 너무 억지 해석하는지 알 수 없으나, 하여튼 그런 뜻도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았다.

성경은 일찍부터 의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창세기 15장 6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의로 여기셨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성경은 “믿음”이 “의(義)”임을 가르친다. 이와 연관하여,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셨는데, “의를 구하라” 하는 말씀은 “믿음을 먼저 구하고 찾으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의는 믿음임을 확실히게 가르치는 부분이다.

이러한 의는 사회영역에서 쓰는 의와 구별이 된다. 아브라함 현상에서의 “의”에 대한 정의(Definition)는 종교적 신념, 정신이나 양심적 의로서 영어로 보통 “Righteousness”를 쓴다. 반면, 일반적으로 사회적 의는 행위를 근거로 하는 “Justice”를 쓴다. Righteousness는 영적, 신념적 정신적으로서 모든 의에 대한 입법적 의미를 갖으며, Justice는 사회 도덕적 의로 사법적 의미를 갖는다.

범죄자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말 할 때는 도덕적 문제이므로 Justice를 쓴다. 미국의 법원을 영어로 “Department of Justice”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영적 형상의 모습인 양심이나 믿음에 대해 말 할 때는 Righteousness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예언자(선지자) 아모스는 사회의 불의나 부정에 대해서 비판했는데, 그때는 물론 righteousness를 쓰기도 했지만, 주로 Justice를 쓴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정신적 바름, 옳음, 곧음을 말할때는 Righteousness를 쓰지만, 도덕적 문제로서 행위를 말 할 때는 정의인 Justice를 쓴다. 아무튼, 의나 정의는 일반적으로 “바름”을 말한다. 무엇이 바름이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며(Righteousness), 그 뜻을 세워가기에 합당한 행위(Justice)라 할 수 있다.

이제 신학자와 세속사회 철학자가 말하는 의를 알아보자.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토(플라톤의 영어식 발음)는 정의에 대해 말했다. 그에 의한 정의란 “사람들이 각자가 맡은 일과 역활에 최선을 다하여 충실하는 것”이라 하였다. 반대로 말하면, 알지도 못하면서 이것 저것 간섭하며 자신이 맡은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으로서 불의라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평등한 관계성으로 어떤 가치들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이라 하였고, 20세기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정의는 사랑의 근사치이며, 균형 (Balance)”이라 했다. 나아가 그는 정치의 임무에 대하여 말하기를 “정치란 불의한 세상에 사회정의를 수립하는 일”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하바드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던 존 롤스는 “공정성 (Fairness)”을 정의로 보았고, 27세에 하바드대학교 철학과 교수기 된 마이클 샌델은 존 롤스 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계열에 속하는 학자로서 개인이나 공동체 모두 자유와 권리를 공정하게 함께 누림을 정의로 보았다.

이들 철학자들, 또는 니버같은 신학자의 “의”에 대한 설명 역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누구에게나 필요한 내용들이다. 성경 신구약은 믿음에 의한 의를 전면에 앞세워 말하기도 하지만, 인간도덕적 의인 정의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비록 크리스챤이라 할지라도 사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인간들이기에 정의 역시 생활 속에서 실현해야 할 도덕적 가치다.

여기서 인간과 의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필요하다. 인간은 죄인이므로 완전한 의에 이르지 못한다. 성경은 “의인이 되었다”는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은 아니지만 의인인 것처럼 불러주겠다” 하여 칭의론이 나오게 된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크리스챤들이 흔히 영육이라 말 할 때, 영적으로는 믿음에 의한 의의 삶을, 육적으로는 정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영적, 신앙적, 정신적 의(Righteousness)를, 즉 믿음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도덕적으로 의에 이르는 행위적 Justice를 실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Righteousness(의)와 Justice(정의)는 형제요 자매이며, 앞과 뒤이며, 왼쪽인 동시에 오른쪽 관계다. 믿음의 의는 인간 사회정의의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는 루터의 말을 들어보면, 그래도 입법적 의미를 가진 믿음에 의한 의를 우위에 두고 열심히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진정한 크리스챤이란 창조주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신앙적)의 의인 “칭의”와 행함적(사법적) 의인 “정의”를 다 이루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칭의(믿음의 의/Righteousness)를 모르고 플라톤의 사회적 정의(justice)를 등한히 하는 자는 진정한 크리스챤(목사와 신학자)이라 말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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