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자유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자유와 그 본질

자유란 의지와 행동에서의 자연성을 말한다. 자연성이란 아무런 제재나, 규칙이나, 규범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연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말한다.

임마누엘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순수이성비판”에서와 같이 “순수성”을 뜻한다. 조작하거나, 인위적 꾸밈이나, 타자에 의해 정체성과 주체, 형상이 바뀌지 않고 처음부터 있는 그 자체의 의지와, 의지에 따른 행동으로서, 철학으로 말하자면 순수성이고 자연성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자유와 그 뜻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형상을 불어 넣어 주셨다 했는데, 그 형상중의 하나가 자유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유인 것이다. 이 자유에는 하나님의 성품, 즉 거룩함과, 도덕적 존엄과, 자유 그 자체를 말하는 고유의 권한이 내재해 있다.

출애굽기 3장 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자유에 대한 최고의 문구적 명제다.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처음부터 있는 자의 모습 그대로의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결국, 자유란 “자유케 하시는 이(하나님)의 자유성”이다. 이것이 모든 자유의 근본이고, 모든 자유는 이것을 근원하고 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한 존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는 책임적 자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되 자유권 행사를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넘지 않도록 하는 한계적 자유를 주셨다. 선악을 알게하는 과일을 먹지 말라는 것으로서 이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책임성을 말한다. 자유권에 한계를 두신 것이다. “너 맘대로 다 해봐라” 그렇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렵다. 그래서 인간 임의의 의지를 넘을 때는 그에 대한 책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을 부과하신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이를 어겼다가 무한한 죄성의 오명을 남긴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있다.

자유의 가치를 지키는 두 가지 법

21세기 들어, 세계적으로 자유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것은 인간존재 의미에 대한 관찰이나 환경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조성되었기 때문이고, 인권 역시 발전하게 되므로 자신의 자유에 대한 방어능력이 훨씬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유에 대해 논해볼 때, 그것은 도덕 윤리적 성품과 연관된 자유라는 것이다. 자유는 아래 두 종류에 의해 제어와 판단을 받는다.

첫째, 법(法)이다. 규범적 자유(Normative Freedom)라 할 수 있다. 제어할 수 없는 욕망에 대해 어떻게 제동을 걸어 피해를 줄일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법, 규범, 규칙이다. 자유를 남발하거나 오용하면, 또는 한정된 것으로 약속한 경계선을 넘으면 그에 대한 책임으로서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어 자유를 박탈당할 수 있다. 또, 사회 공동체의 합의가 이루어질 경우, 예를 들어 징집체제의 국가같은 경우,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일정기간 개인의 자유는 그러한 조건 때문에 유보되기도 한다.

둘째, 양심(良心)이다. 초월적 자유(Meta-Freedom)의 본질이다. 양심은 자연도덕적 성품의 일종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선한 정신체계를 말한다. 자유는 그 양심에 의해 제어될 수 있다. 법의 외적 환경에서 발생하는 타인에 대한 인격모독, 비하, 불편함, 불쾌감, 불안감, 불이익, 또는 정신적 손상이나 손해를 입히는 자유는 있을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을 행하는 자유는 바로 이 양심에 의해 제지될 수 있다. 그런 요소들을 행 할 자유는 없다는 말이다.

자유 존재의 목적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자유냐 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유를 행사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동안, 독일 철학자들의 자유론, 루스벨트의 4가지 자유론 같은 것들이 자유가 존재해야 하는 목적을 잘 말해 준다. 자유를 행사할 때는 생산적, 창조적, 도덕적인 것과 같은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어떻게 하든지 깍아 내리려는 행동들, 비생산, 혼란야기,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자유는 무책임한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방종이고, 궁극적으로는 죄악에 가까운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기를 거치면서 학문의 자유라는 말을 자주한다. 그런 가운데 학문의 자유라 하여 하다보면 본질적인 것이나 고유의 내용을 폄훼하는 주장이나 논리를 펴는 경우가 있다. 신학에서 예를 들자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연,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는데, 그것이 아닌 진화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라든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나 신성을 부인하는 성경해석적 자유는 올바른 자유권행사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자신을 존재케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 국가의 덕을 보면서 표현의 자유가 있다 하여 마르크시즘(Marxism) 철학에 동조하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글이나 말을 하면 그 또한 올바른 자유권 행사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유라 하여 모든 것을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어떤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생산적인 것으로서 가치없는 자유성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를 피괴하는 자유권 행사 같은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인류와 역사는 이러한 선한 가치를 파괴하는 자유권행사로 몸살을 앓아왔다. 그러므로, 학문의 자유는 어떤 선한 것에 “부합한다”라는 동의를 가지고 있을 때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자유가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갈라디아서 5:1) 자유를 오용, 남용한 역사 파괴자들에 대한 경고를 한 것이다. 성경에서의 자유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능력을 부인하는 불신앙으로부터, 죄로부터, 그리고 사망권세로부터 자유를 말한다.

아무튼, 기독교 영역 밖이라 할 지라도, 특히 학문 세계에서의 자유는 항상 “무엇을 위한, 또는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그것에 부합되는 자유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자유에는 그 자유를 누리는 것에 대한 책임이 항상 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유임을 망각하지 말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 안에서 자유(自由)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고린도후서 6:7) 말씀 안에서 좌우(左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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