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사라지지 않는 어떤 갈망을 느낀다. 참된 소속감, 넘치도록 충만한 형태의 공명에 대한 깊고 강렬한 갈망이다. 현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알려진 저자 미로슬라프 볼프는 라이언 매커널리린츠와 함께 그리스도인 안에 자리 잡은 온전한 의미의 집을 향한 갈망을 탐색한다.
저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의 교제를 위해 소속감, 안식, 상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온전한 집이 되도록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바로 하나님의 집인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책 속에서 “하나님이 오시는 것에 관한 이야기, 구출과 동행하시는 임재의 이야기는 완성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열망은 부재의 경험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속적인 임재의 약속 사이에 편만한 긴장에서 솟아오른다. 또한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들려주는 만물의 이야기에서 이 열망은 오직 사람들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궁극적인 집, 곧 새 예루살렘에서 만족될 것이다”고 했다.
이어 “집이 존재하려면, 그 구성원들이 거기에 있을 뿐 아니라 서로를 ‘맞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집이 존재하려면, 하나님이 거기 계실 뿐 아니라 맞아들여져야 한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기독교의 이야기에서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님은 그저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전하러 오신 것인가, 아니면 그분이 바로 이미 오신 하나님인가 하는 점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령을 통해 제자들 안에 집을 만들기 위해 오시는 아버지와 아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출애굽과 그분의 다시 오심 사이의 광야를 통과하는 여정에 반드시 필요한 지속적이며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다. 떠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분은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신다(요 14:18). 그러나 그분은 불안정함과 고통을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 구속받지 못함, 불완전함의 적대감 안에서도 ‘영원한 생명’이 가능하게 만드신다. 한 각도에서 이것은 회복력과 소망의 원천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제자들도 쉽게 경험했던 믿음의 수치스러운 면이다. 예수님의 고별사는 그들이 고통의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요 16:1)”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성의 각 주민은 새롭고 개인적인 이름을 갖는다. 이름은 각 사람의 고유성과 조종당하지 않는다는 거룩한 신비, 스스로 보여 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이들의 눈이 미칠 수 없고, 심지어 보여 주는 경우에도 오직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는 자아의 핵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 사는 그들 중 누구도 자립적이거나 스스로 규정되거나 주권적인 개인이 아니다. 각 사람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인 두 이름 역시 가지고 있다. 하나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다. 각 사람은 사회적·물질적 전체 공간을 그들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반영한다. 그 각각은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이 ‘보편적 인격’(catholic personality)이라고 부른 것이다. 차이와 소속, 개인의 이익과 공동선 사이의 갈등은 개인이 공동체로 병합되지 않고도 극복되었다. 도시의 이름과 함께, ‘그들의 이마’에 새겨진(계 22:4) 두 번째 공통 이름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서로 안에 거하시며, 그 정체성을 규정하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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