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칭의와 성화를 균형있게 강조하는 설교
‘보수적 복음주의’의 신학적 특징은 ① 성경을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② 인간의 전적 부패, ③ 하나님의 거룩과 주권, ④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 ⑤ 이신칭의와 복음전도, ⑥ 재림신앙과 믿음과 성결을 강조한다. 1885년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러 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미국 대각성 부흥 운동의 귀한 결실이었다. 그래서 초창기 한국교회의 신학적 토대는 이러한 복음주의 운동과 태생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박형진은 미국 대각성 운동의 특징을 ‘회개와 중생을 강조한 갱신 운동으로 요약하면서, 이것이 한국교회에 영적 활력과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체험중심의 신앙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 사회적 현실에 대한 미온적 입장과 같은 명암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임희국은 “한국교회가 평양대부흥운동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하여 통합측은 “화해와 부흥”, 합동측은 “회개와 복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회개와 전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와 복음주의협의회 역시 “회개와 비판적 성찰”에 강조점이 있다고 서술했다. 한 마디로 회심과 회개를 통한 부흥 운동이 초창기 한국교회의 모습으로 특징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생보다 내세에 대한 신앙이 강화되었고, 그와 맞물려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와 회심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만, 그로 인한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전도와 회개를 통한 영혼 구원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하여 신자의 회심 이후 성화의 삶에 대한 강조, 개인 구원과 함께 복음의 사회 변혁적 측면, 교회의 공적인 책임이 충분히 강조되지 못하였다. 1970년 13,007개의 교회와 3,235,475명이던 교인 수가 1980년에는 21,243개의 교회와 7,180,627명으로 늘어나 교인 기준 230%의 폭발적 성장을 경험했다.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수백만의 신자들이 모이는 대중 집회가 성공을 거두자, 교회는 말씀 중심의 설교보다는 회중의 관심을 끄는 데 초점을 두면서 대형집회와 수적인 확장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하여 성도의 균형 있는 성장과 성숙이 간과되었다. 교회성장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하면서 교단과 교세 확장에만 치중한 나머지, 교회의 대사회적 책임과 공적인 역할은 소홀해지고 말았다.
오늘날 기독교 인구가 감소하고, 교회에 대한 적대감과 무관심의 증가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라는 복음의 공공성과 대사회적 책임을 교회가 충분히 강조하지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 일차적 책임으로 성도를 말씀으로 세우는 목회자의 책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부분을 설교에 반영할 수 있을까?
세계관이란 세계와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일관되고 통일성 있는 안목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영혼만을 구원하는 탈출 장치가 아니라, 만물을 속량하고 피조물을 갱신하는 샬롬의 침투라는 제임스 스미스의 지적은 회심한 신자가 새롭게 갖게 된 세계관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성도에게 회심과 칭의 이후에 펼쳐지는 성화의 여정과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신자 한 사람의 구원의 여정에는 회심 사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창세 전에 그를 택하신 예정, 때가 차매 복음으로 그를 부르시는 소명, 복음에 반응할 수 있도록 새 생명의 원리를 심겨주신 중생(重生, 혹은 거듭남), 복음에 대한 회개와 믿음, 값없이 의롭다 불러주시는 칭의, 아버지라 부르도록 자녀 삼아주시는 입양,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싸우도록 돕는 성화, 마침내 영화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 진입했음을 설교자는 알려 주어야 한다.
설교자가 칭의와 성화를 균형 있게 설교한다고 할 때, 은혜로 의롭게 되었으니 이제 힘써 열심히 성화를 이루어가자는 율법적 설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칼빈은 설교자의 이러한 난제를 예견하듯이 칭의와 성화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동시에 주어지는 이중은혜(duplex gratia)라고 힘주어 말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참여함으로 받는 이 이중은혜는, 첫째 그리스도의 의(義)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재판관이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이요, 둘째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화되어 생활의 흠 없음과 순결을 좇는다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distinct but not separate)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주어지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이중은혜이다. 회심과 칭의만을 강조하게 될 때, 성도는 이미 거듭나고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에 그 후 성화의 여정에서 주어지는 신자의 책임을 놓치기 쉽다. 성화 설교를 강조하되 성도의 종교적 열심을 자극하는 인본주의적이거나 세미펠라기안적 설교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칼빈이 강조한 바와 같이 이 성화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어지는 구원의 은택임을 분명하게 강설해야 한다. 설교자는 성도의 모든 선행과 수고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 가운데 주어진 은혜의 산물임을 설교해야 한다. 칭의는 성화의 토대이고(엡 2:8, 10), 성화는 칭의의 열매임을 강조해야 한다(마 7:17).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선행이라는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칭의와 성화가 설교를 통해 균형있게 강조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기존의 한국교회는 보편적으로 ‘칭의’에 대해 강조를 해왔다. 그 결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한다는 미명으로 칭의 이후 마땅한 성결과 선행을 소홀히 여기는 방임주의(licentiousness)에 노출되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로 성화를 실천하려는 그릇된 성화론이 율법주의(legalism)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풍성한 구원의 서정을 성경을 통해 계시해 주셨는데, 지나온 폭발적 교회 성장의 시기에는 칭의와 회심에만 강단에서 강조해 온 것이 현실이다. 필자는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광대한 은혜와 그에 걸맞는 신자에게 요청되는 통합적 세계관을 다 담기에는 역부족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결과 협소한 구원관, 왜곡된 성화론을 형성하였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 구원 사건(historia salutis)을 일상 가운데 주관적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으로 적용하지 못하는 이원론적인 신앙에 이르게 되었다. 로날드 사이더는 칭의를 넘어 성화로, 회심을 넘어 구원의 서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제 나는 그분이 나와 생명의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는 사실과 나를 친구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이 사랑의 구원자께서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분이 억압, 불의, 포악, 인종차별, 그리고 환경파괴를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배웠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나를 그의 선한 청지기로 부르시고 그의 창조를 훼손시키고 그의 백성들을 짓밟는 억압적 구조와 체제들을 바로잡으시는 사역에 내가 동참하기를 원하신다.
한국교회가 구령의 열정과 회심의 강조로 지금껏 성장과 부흥의 은혜를 경험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온 지 140여 년의 시점에 한국교회는 성장기를 넘어 성숙기로 나아가느냐, 쇠퇴기로 주저앉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설교자는 회심과 전도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되, 회심 이후 세상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 공공신학적 감수성을 갖춘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한다. 자신이 목양하는 성도가 신실한 교인은 물론, 책임 있는 시민으로 살아가게끔 한국교회가 의인을 방출한다면 어떤 결과가 펼쳐질까? 지역교회가 공공신학적 소양이 깊어짐에 따라 교회에 대한 대사회적 신뢰도는 회복될 것이다. 이것은 다시 복음 전도의 문턱을 낮추는 목회 생태계를 구축하는 선순환으로 작용할 것이다(행 2:47).
3) 성경적 종말론에 기초하여 문화명령과 재림신앙을 강조하는 설교
종말론은 성령론과 더불어서 이단 사이비들이 많은 혼란을 야기 시켜 온 분야 중 하나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주제는 신천지 이단에 의해서 왜곡되고 있다. 종말론을 내포한 요한계시록, 다니엘서 같은 묵시문학은 다양한 상징이나 비유, 은유, 환상적 이미지에 대한 신비한 묘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종말론이나 계시록에 대한 설교를 설교에 충분히 다루어 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와 반대로 오히려 교회 주변부에서는 종말론에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만 설교하며 거기에 열광하는 경향도 있다. 성경적 종말론을 설교하는 것이 성도가 공공신학적 삶을 실천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앞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언급하였는데, 같은 맥락에서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이 공존한다. 필자는 종말론의 이러한 두 측면을 성도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성숙한 공공신학적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서술하고자 한다.
첫째, 현재적 종말론이다. 현재적 종말론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재 실현되고 도래했다 것에 방점을 둔다. C. H. 다드는 신약성경에 특징적으로 나타난 현재 이루어진 종말을 ‘실현된 종말론’이라는 용어로 설명하였다. 한국교회의 종말론은 이생에서의 책임 있는 삶과 영원한 천국을 균형 있게 강조한 길선주 목사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내세적 소망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현실의 고난과 핍박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천년왕국이 임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먼저 오셔서 모든 억울함을 신원해 주실 것이라는 전천년설이 한국 보수교회에 주요한 흐름이 되었다. 더구나 지상천국을 꿈꾸는 사회주의와 사회복음주의 신사조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그들을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길선주의 종말론에는 교회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덕을 나타내고, 사회도덕을 일정 수준 유지 시키는 요소가 없지 않았지만, 사회변혁과 문화 창출에는 소극적으로 이끄는 요소도 다분했다. 그 결과 “땅의 것은 썩어질 것이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다”는 미래적 종말론이 한층 강화되었다. 어차피 심판의 날에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지고, 영혼만 구원받을 것이라는 관점은 현실의 부조리나 문화의 변혁에 소극적인 성도를 양산했다.
하지만 현재적 종말론은 이 편협하고 왜곡된 시각을 교정해 줄 수 있다. 하나님은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을 통해 문화적 노력과 결실에 대한 긍정적 의도를 드러내셨다(창 1:26, 28). 예수님의 구속 사건은 피조계를 단지 에덴동산으로 되돌려 놓는 정도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은 피조계의 우주적 회복과 재창조를 의미한다. 십자가는 아담 안에서 실패한 문화명령을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서 신자가 수행할 수 있도록 발판을 구축하였다(롬 5:17).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피조물을 허무와 탄식에서 해방하는 하나님의 회복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 볼프는 하나님이 문화명령을 지시하셔 놓고, 이생의 것을 종말에 멸절시키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관성과 신실성에 모순된다고 지적하였다.
종말론적 멸절과 책임성 있는 사회 참여가 논리적으로는 양립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모순이다. 세상이 종말에 가서 멸절하리라는 예상은 창조의 선함이라는 신념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이 멸절시키는 바는 매우 악한 것이라서 구속될 수 없든지 아니면 워낙 하찮아서 구속받을 가치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이 완전히 멸절시키는 그 대상에게 내재적 가치와 선함이 있다고 믿기는 매우 힘들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성도가 현재적 종말론의 관점을 확립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매일 반복되는 가사, 육아, 힘겨운 일터에서 성경적 가치를 따라 사는 노력,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호의와 친절이 내세와 무관하지 않고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마 25:35). 오늘 소자를 섬긴 수고가 심판 날에 의미 있게 결산된다는 사실을 알 때, 성도의 일상은 달라질 것이다. 종말이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지금 여기’ 종말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적 종말론이다. 설교자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종말의 시기가 초림부터 재림 전체임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럴 때 성도는 실현된 종말의 빛 아래에서 매일을 조망하고, 다음과 같은 공공신학적 삶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독교는 계산대 건너편의 점원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있어서, 식당에서 음식 주문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종업원을 어떻게 대하고 고용주를 어떻게 섬기느냐에 있어서, 게임을 어떻게 하고 오토바이를 어떻게 몰고 어떻게 세우는지에 있어서, 매일의 언어 사용과 매일의 읽을거리에 대한 취사선택에 있어서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뿐 아니라 공장, 일터, 조선소, 광산, 강의실, 수술실, 부엌, 골프코스, 야외 경기장 등에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둘째, 미래적 종말론이다. 설교자는 성도에게 현재적 종말론을 통해 삶의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도록 가르치되, 현실에 함몰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이 미래적 종말론이다. 그리스도인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믿고 최선을 다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유토피아를 조성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죄와 싸우고, 불의에 순교자적 자세로 저항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재림의 시점에야 비로소 이루어짐을 믿는 사람이다. 이른바 선지자적 비관주의자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기복신앙과 번영 신학의 영향 아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세상의 기업들도 ESG를 외치며, 환경과 사회적 책임과 지배구조에 대한 가치들을 세워가는 마당에 교회는 세습과 성적 타락과 재정 비리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다. 누가 거대한 맘몬주의와 세속 문화의 도전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안락한 현실, 화려한 명성, 축적된 부와 권력에 도취된 교회에게 “아멘 주 예수여 어서 곧 오시옵소서” 마라나타의 재림신앙을 기대할 수 있을까?
미래적 종말론, 곧 재림신앙은 안락과 탐욕에 빠진 성도들에게 빛을 던져주고, 해독작용을 할 수 있다. 설교자는 현재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본향이 모든 순례자가 사모해야 할 도성임을 환기해 주어야 한다. 미래적 종말론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회복하고, 그 소망의 힘으로 현실의 유혹과 고난을 이기는 푯대가 된다. 목회자는 성경적 종말론의 두 국면인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을 균형 있게 설교해야 한다. 그럴 때 성도들은 일상에서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변혁가이자, 재림신앙으로 본향을 사모하는 순례자로 서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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