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에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번째 표적,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 공생애의 클라이맥스, 이 기적은 그 누구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 가장 큰 기적(Biggest Event)였다.
그전에도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신 적은 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눅7:11-17),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다(막5:35-43). 나사로까지 살리면서 마치 소녀, 청년, 장년, 각 연령층을 대표해서 살리신 것 같다. 그런데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살린 것, 그것도 엄청난 기적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3일 동안 몸 주위에 있다가 떠난다고 믿었는데 그렇다면 떠돌던 영혼을 다시 부른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죽은 나사로를 나흘 만에 살리신 것은 유대인의 상식으로 볼 때 절대 불가능한 일, 이 기적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요 생명의 근원이심을 증명한 최고의 뉴스거리였다.
사랑하시는 자의 죽음
예수님 주변에는 12제자 외에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함께 한 열두 제자, 또 악귀를 쫓아내고 병 고침을 받은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헤롯의 청기지 요안나, 수산나 등 자기들의 소유로 섬겨준 사람들이 나온다(눅8:1-3).
그들은 물론이고, 본문의 주인공 나사로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랑이 각별했던 것 같다.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절),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람을 보내 한 말인데 나사로를 ‘사랑하시는 자’라고 했다.
마리아는 특별히 AD 90년경의 성도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주의 발을 닦던 자’였다. 예수께서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14:9)라고 하셨는데 60년 세월이 지나면서 이 여인의 이야기도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성경은 ‘사랑하시는 자’였음을 강조한다.
5절에도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는 표현이 나온다. ‘본래 사랑하셨다’, 이 ‘본래’라는 표현은 적어도 2-3년간 꾸준히 사랑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나사로의 죽음을 보며 예수님이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씀이 두 번 반복된다(33,38절). 그리고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했다(35-36절). 사람들이 다 알만큼 사랑하셨던 나사로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죽었다. 인간을 절망케 하는 죽음, 죽음이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사랑하는 존재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 창조주이신 예수님마저도 이 죽음의 고통을 느끼셨다. 그만큼 이 죽음이 예수님께 특별했다.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삼 남매 모두에게 빨간불 켜진 심각한 상황이다. 부모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없는 것으로 보아 나사로가 가장(家長)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두 누이는 살길이 막막하다.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는 남자 없는 집안은 특정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에 먹고 살 방법이 구걸이나 창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도 과부를 먹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위로했다(19,31절).
죽음이 이렇게 심각한 것이지만 현대인들에게 죽음은 좀 달라진 느낌이다. 죽음은 꽤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격리되었다. 집에서 장례를 치르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가까이서 보지 않는다. 예전엔 초상집이 마치 잔치집 같았다. 동네 사람들이 초상집에 다 모여 애도하고 며칠간 밤늦게까지 시끌벅적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초상집에서 화투도 치며, 술 먹고 싸움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골까지도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기 때문에 염도 입관도 장례식장에서 상조회가 맡아서 하니 지인이 아니면 옆집조차도 그 집에 장례가 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죽음을 격리시켰다고 해서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안전하게 된 것은 아니다. 누구든 언젠가는 죽고, 사방에서 날마다 죽는다. 예고도 없고 순서도 없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다. 그런데 두려워만 하지 죽음에 대한 대비는 안 된 것 같다. 알렉산더(Alexandros) 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Phillip II)는 자기 신하를 시켜서 매일 아침 깨우면서 “폐하, 당신은 언젠가는 죽습니다”라는 말을 하게 했다고 한다. 그게 필립 왕을 현명하게 만들었단다. 나사로의 죽음을 보며 죽음,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준비가 필요함을 생각하면 좋겠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죽음
성경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병을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 하셨다(4절). 이는 9장에서 맹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았을 때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물론 예수님이 일부러 병들어 죽어가게 하신 것은 아니다. 자연적으로 든 병이지만 삼 남매의 믿음을 증폭시킬 병, 하나님이 죽어서 소망이 없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부활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행동이 좀 이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사랑하시는 자의 집에 느닷없이 닥친 불행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느긋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었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가는 게 맞지 않나? 갑작스런 죽음이 많앗던 시절이라면 더 더욱 그랬어야 했다. 두 자매가 급히 사람까지 보내 SOS를 청하지 않았나?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6절). 무슨 일을 하시지도 않았다. 마치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요한복음서에 반복되는 테마다. 예수님은 인간이 원하는 때에, 인간이 원하는 방법대로 움직이는 하나님이 아니시란 것,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AD 90년경 교회가 로마의 핍박이 당장 사라져 쉽게, 편안하게 신앙생활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 크기의 일을 경험하기를 원하셨다. 우리 편한 것보다 당신의 영광이 드러내는데 쓰기 위해 우리 수준을 향상시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 수준을 예수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원하신다.
물론 사람이 죽어가는데 가시지도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 운운하신 것은 인간적으로 섭섭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오빠의 죽음을 앞에 둔 두 자매가 들어야 할 말씀이고, 죽어가는 나사로가 가져야 될 소망이다. 또 같은 병과 죽음의 고통을 장차 경험해야 할 제자들과 현대 신앙인들이 다 들어야 될 말씀이기도 하다.
엉뚱한 말씀만 하신다고 삐칠 일이 아니다. 병에 걸려도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성취하는 병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정말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병을 통해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거나 더 소중한 것을 보게 된다면 그 또한 병이 가져다주는 유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신앙은 죽음마저도 뛰어넘게 하는 것, 신앙은 내 목숨이 끊어진다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것이라는 소망이다. 이게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믿음이다. 내가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 그 믿음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써 그 영광을 보여주셨다. 주님은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갖기 원하신다.
주님은 결국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나사로 사건을 하나의 상징, 예로 삼으신다. 그렇다.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다시 산다. 루터는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장면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렇게 해석했다. “오늘은 나에게 아직 아들이 있지만 내일이면 재밖에 없을 것이다. 그 재가 얼마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 생전에든 내가 죽고 천년이 지난 뒤에든 그 재가 도로 살아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신다. 죽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라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 그게 나사로의 병이고, 죽음이다.
“잠들었다”고 하신 죽음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표현이 놀랍다. 잠들었다고 하셨다. 엉뚱한 소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나사로의 죽음을 모르고 이러시나? 아니다. 제자들이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했을 때는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잠들었다고 하신 것, 죽음을 잠이라고 하셨거다. 잔다는 것은 깬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것,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으나 다시 살아날 것을 암시하신다.
성경에서는 죽음을 잔다고 표현할 때가 많다.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 대한 묘사가 그랬고(행7:60), 부활에 대해 말씀하실 때도 그랬다(고전15:20, 살전4:13).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영원한 집,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초월하는 부활을 경험하는 자들이기에 성경에서는 죽음을 자는 것 이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먼저 간 사람은 먼저 자러 간 것, 우리도 모두 주님의 시간표에 따라 자러 들어갔다가 예수님 재림하실 때 나팔소리를 듣고 다 함께 일어날 것이다(고전15:51-52).
물론 나사로는 죽었다가 살아난 후 좀 살다가 다시 죽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임할 부활의 예표로 보여주신 거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신 후 불과 15일 남짓 되었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다.
어이없어 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현장에 계시지 않았던 것에 대해 기뻐하신다(15절). 그 이유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어찌 들으면 ‘잘 죽었다’는 말씀이다. 물론 다시 강조하지만 일부러 병들게 하고 죽이신 건 아니다. 3년 반이나 함께 했지만 아직도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 또 믿는 다는 것은 계속되는 과정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제자들의 믿음이 더 커질 기회인 것 만큼은 틀림없다. 그래서 기뻐하셨다.
베다니,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핍박을 두려워하여 예루살렘 근처로 가기를 두려워했다. 도마는 예수님이 나사로 죽은 얘기를 하시니 마치 자기들이 순교하러 가는 줄 알고 뚱딴지같은 헛소리를 한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16절). 비장한 모습이지만 제자들이 여전히 죽음의 기운에 짓눌러 있을 때였다. 도마는 예수님께 계속 붙어 있었기 때문일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전승에 의하면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정말 주와 함께 죽는 순교자의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나사로의 죽음을 잠들었다고 표현하신 예수님, 그분께 죽음은 두려운 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다. 우리도 죽음을 잠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잠은 참 묘한 것, 잠깐 잔 것 같은데 깨어보면 오랜 시간이 지났다. 밤새 엎치락뒤치락할 때도 있지만 막상 잠이 들면 잠깐 같은 시간이다.
류시화 시인의 『지구별 여행자』란 인도여행 에세이를 보면 우리 인생을 ‘지구별 여행자’라 표현했다. 참 좋은 표현이다. 그런가 하면 천상병 시인은 인생을 ‘소풍’에 비유했다. 역시 인생과 죽음에 대한 가장 멋진 표현이다. 서울 상대를 졸업하고 부산시청에 근무하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은 천상병 시인은 그 후유증으로 성불구자가 되었다. 6개월 뒤 선고유예로 풀려나지만 거지처럼 살다가 정신병원에 들어가기도 했고, 42세에 장가를 갔지만 아이는 낳지 못했다. 술과 친구를 좋아해서 그런지 63세에 간경화로 작고했는데 그가 쓴 시 중에 ‘귀천’이라는 시가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런데 이 천상병 시인이 ‘행복’이라는 시도 썼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그는 행복하다고 노래했다.
그 행복이 귀천이라는 시를 쓰게 했을 것이다. 죽음, 두려운 적 맞다. 그런데 언제 우리를 덮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하려 하기보다 가까이 두고 신앙으로 극복해야 한다. 언젠가 누리게 될 편안한 안식이요 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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