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부터 한국 교계에서 급격히 타나난 현상은 교회 감소다. 이는 성도들의 감소를 말하는 것으로서 1970~80년대 성도들의 가슴에 활활 타오르던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식었음을 말한다. 주간 예배도 1~2 회로 줄어들었고, 새벽기도회도, 심지어 주일학교 마저 없어져 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찾을 때는 성도들의 마음이 믿음에 대한 확신과 타오르는 뜨거운 감정적 열정으로 가득, 즉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고, 동시에 교회도 부흥하였다. 반대로, 세속 사회문화나, 인간철학, 또는 물질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을 때는 여지없이 교회와 성도들은 영적으로 연약해져 냉담한 정신생활을 하게 되었다.
구약에서 성령이란 단어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신 또는 하나님의 영”이라 하므로 하나님의 의지와 뜻, 그 계시성의 형태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하나님 존재의 실체를 말한다. 예를 들어, 다윗을 매우 용감한 왕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데, 사실, 그는 매우 평범한 인물이었으나, 하나님의 영에 의지하고, 감정적으로 그 영과 연합되어 있었을 때 아주 강력한 지도자 모습을 보였던 것을 구약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한 하나님의 영에 의존 한 결과 이스라엘을 당대 근동일대의 강한 국가로 세울 수 있었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영은 온 인류의 생명을 구원 할 메시아 자격까지 부여하는 실체로 활동하기도 했다(이사야 61: 1~2).
“성령”이라는 용어는 신약에서 구체적으로 사용하였다. 신약에서 성령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정신을 말한다. 예수님의 승천 후, 자신을 대신하여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 하셨는데, 용어만 다르지, 그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말한다.
흔히 말하듯, 예수 그리스도 승천 이후를 성령의 시대라 하는데, 이 성령시대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 인간정신을 바꾸고, 변화 시키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던 때였다. 이 변화는 아주 작은 기도회 모임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사도행전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성령의 임재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감화와 감동을 끼쳤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다.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었고, 그 모임은 교회가 되었고, 교회는 세계로 확산 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부흥과 발전은 지적 기능이나 역할에 의한 것이 아닌, 성령에 감동되고 영적 감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미국인들 신앙의 역사를 예로 들어 보자. 17~18세기, 영국이나 스코틀랜드의 미국에로의 이민자들은 신앙으로 험란한 이민생활을 이겨냈다. 회중들은 예배와 기도에 힘 썼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신앙으로 정신적 영적 어려움들을 극복해 냈다. 정착과 자녀교육이라는 매우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그렇게 신앙적 열정으로 해결해나갔다. 초기 이민자들의 열정적 신앙에 의해 교회들은 부흥했고, 성장해 나갔다.
그런데, 어려웠을 때는 성령에 의지하여 살던 이주민들이 부유해지고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자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또한, 부모들의 헌신적 신앙에 의해 교육받고 성장한 자녀들 역시 세속적 문화나 물질의 번영, 그리고 이성적 사고방식을 주도하는 교육의 영향에 의해 믿음, 신앙으로 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교회나 교단이 분열하기까지 했다. 초기 미국 교회의 위기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같은 인물들이 대 각성을 주도하여 부흥을 이끌었다. 이들 설교의 성격은 지적 교리해설같은 것이 아닌 영적 감정에 호소하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일대를 나오고, 프린스톤대학교 총장까지 지낸 지성인이었으나, 지적능력이 아닌, 영적 감동, 감화같은 감정적 설교를 하는 것으로 미국인들의 신앙을 각성시켜 부흥을 이끌었다. 심지어 그는 ‘신앙감정론’(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이라는 책을 쓰기까지 했다.
한국의 경우, 1903년부터 하디 선교사 중심으로 성경공부 하다가, 감동을 받아 회개하게 되고, 이것이 1907년에는 평양에서 부흥의 불길로 타 올랐다. 마가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겪었던 성령체험을 평양에서 조선인들도 똑같은 경험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한국은 1970년내 산업화를 거치면서 교회도 도시주변에 많이 세워지고, 그야말로 세계사적 부흥의 시대를 열어갔다. 부모들은 전국의 어느 교회나 실시했던 새벽 4시나 4시 30분에 시작되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자녀들이 좋은 대학 나오고, 안정적인 직업을 갖도록 정말 열정적으로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런데, 그런 부모들의 기도로 교육받고 성장하여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던 자녀들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지적으로 교육을 받아 비논리적이고 비현실적인 믿음을 말하는 교회를 합리적 공동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적 교육을 받으니 이성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려 한다. 또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으니 기독교 교회에 대한 관심이 없다. 주말에는 가족들과 여행하되, 해외 여행을 즐긴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고, 한 낮 일하는 시간대인데도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로 붐빈다. 인생을 즐기는 문화는 활발하나 신앙에 대한 관심은 없다는 말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는 대부분, 교리 강해성 설교가 많고 지성인 중심이라는 것이다. 신학 강좌인지 설교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성도들을 잃어버리게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다. 교리는 웨슬리의 성령운동 이전 수천년, 수백년 전에 이미 위대한 교부들, 신학자들에 의해 다 정립되고, 그로인해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에게 학습된 바다. 분명한 것은 지적 신앙만으로는 인간영혼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질문하게 하고, 의심하게 한다.
18세기, 영국인들을 변화시킨 웨슬리가 말했다. “인간은 무엇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영혼이 변해야 변화될 수 있다.” 영혼은 성령의 역사함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영적 감성의 설교를 바탕으로 한 성령의 역할이 필요하다. 지성에 호소하는 예배, 설교가 아닌,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의한 영적 감정에 호소하는 설교를 해야 하고, 그런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미 마가 다락방에서의 교훈, 미국 1, 2차 대각성운동에서, 한국에서는 평양 대부흥운동을 통해, 1970년대 한국에서의 오순절 계통의 교회부흥에서 입증된 사례가 있지 않는가. 감성에 호소하는 성령의 역사함을 강력히 간구하는 교회로 재탄생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회개와 더불어 성령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그 길만이 한국교회를 다시 성장하게 하는 방법이 될 줄로 믿는다.
초대교회가 시작된 것은 마가의 다락방기도운동 성령운동이었으며 18세기 영국과 유럽교회가 새롭게 부흥된 것은 성령운동 성결운동이었으며 19세기 미국의 디엘 무디 운동이 오직성령운동 이었으며 20세기 한국교회도 웨슬리언 하디 선교사와 성결교회 이성봉 부흥사를 통해서 성령의 바람이 불게되면서 한국교회는 기독교 2000년 역사상 가장 경이적인 대부흥으로 세계선교 2대 국이되었다.
교회는 영적 감성을 터치(deep touch)하고 신학대학은 영성중심 학문을 지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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