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팀 켈러의 유신 진화론 주장과 관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유난히 혼란스럽게 만드는 점은 성경적 정당성을 주장한 부분이다. 그는 “현대 과학의 진화에 대한 견해는 정통 개신교인에게 네 가지 어려움을 불러온다.”고 주장한다. 그 네 가지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영역, 두 번째는 생물학과 철학을 혼동하는 것, 세 번째 어려움은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 문제, 네 번째는 폭력과 악의 문제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이번 칼럼에서는 첫 번째 어려움에 대한 팀 켈러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 “성경의 권위에 대한 영역”에 대한 팀 켈러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는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최소한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주장은 이미 문장에서부터 그가 정통적인 성경 해석 방법을 거부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을 맞추는 그의 접근방식은 전형적인 계몽주의적 성경해석방식이다. 신앙은 세상을 수용하기 위해 성경을 조율(tuning)하는 해석 방법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 해석을 하는 신자가 갖고 있어야 할 가장 기초적인 태도다. 성경에 의해 세상은 해석되어야 하고, 그 해석을 기반으로 하여 신자는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함으로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한다. 그의 접근방식은 과학과 진화를 절대 진리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 타협을 시도하는 행위로 간주되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주장을 보자. 그는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노골적으로 도전한다. 그러면 어떻게 읽어야 한다는 말인가? 성경이 기록된 방식, 다시 말해서 장르의 성질에 맞춰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는 시로 해석하며, 산문은 산문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성경 기록자의 의도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록자의 의도는 장르를 존중할 때, 잘 보인다는 말이다.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면 창세기 1장은 어떤 장르로 기록됐다는 것인가? 켈러는 대표적인 보수 구약 신학자로 잘 알려진 에드워드 J. 영이 “(창세기 1장은) 고양된 준-시적 언어”(exalted semi-poetic language)로 쓰였다고 한 주장을 인용하면서, 창세기 1장을 시로 해석해야 한다고 비약한다. 팀 켈러의 이런 주장을 ‘비약’이라고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에드워드 영의 주장을 교묘히 비틀어 주장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 영의 주장은 창세기 1장이 산문이지만 시적인 표현을 활용한 것이라고 이해해야지, 산문이 아니라 시로 보아야 한다고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다. 물론 켈러가 사사기 5장 20절에서 드보라의 전쟁을 시를 묘사했다는 점엔 동의한다. 그러나 구약에서 시의 기록 방식은 대부분 실제 역사적 사건을 염두에 두고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찬양하기 위해 주로 시라는 형식을 빌려 기록한다. 만일 역사적 사건을 염두에 두고 기록하지 않을 경우 시적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기 쉽다. 이런 차원에서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1장을 무작정 시(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면 본문 해석에 너무도 많은 자율을 부여하게 된다.

팀 켈러가 창세기 1장을 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가 무엇인지 들어보자.

첫째로 그는 창세기 1장이 시의 운율 방식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7회, “하나님이 이르시되”와 “~이 있으라”를 10회나 반복하여 기록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이 문체는 산문에서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상당수 산문이나, 소설조차 이런 시적 운율과 표현을 사용하여 그 의미와 감동을 더 선명하게 제시하기도 한다. 산문에 시적인 운율이 사용된 것이 이상할 이유는 없다.

창세기 6일 창조 시에 에드워드 J. 영의 표현처럼 “고양된 준-시적 언어”(exalted semi-poetic language)로 표현한 이유는 하나님의 높고 위대한 창조를 메마른 톤으로 기록할 수 없었던 의도가 담겨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하나님의 이 영광스런 창조 사건을 기록하면서 매우 고양된 상태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이 역사적 사건을 “준-시적 언어”를 사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도록 강조한 것이다.

두 번째로 팀 켈러는 창세기에서 태양을 “큰 광명체”로, 달은 “작은 광명체”로 묘사했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이 시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 또한 쉽게 반박이 된다. 창세기 기록자 모세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당시 태양과 달이 이집트인들의 우상숭배를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 창세기 기록자 모세는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태양과 달과 별은 신이 아니며,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태양이나 달이라는 표현보다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기록한 것이다.

세 번째로 팀 켈러가 창세기 1장을 시로 보는 이유는, 1장과 2장에 드러난 창조의 순서 문제 때문이다. 그는 “창세기 1장의 서술은 ‘자연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서 빛의 근원이 되어주는 해, 달, 별(넷째 날)이 존재하기 전에 빛(첫째 날)이 있었다.”고 의문을 제시한다. 특히 그의 논리는 창세기 2장 5절에서 초목이 아직 없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한 이유를 비가 아직 땅에 내린 적 없고 갈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창세기의 언급을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의 창조는 ‘자연질서’를 따르셨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 1장을 산문으로 보면 자연 질서를 따르지 않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행위는 창세기 2장과 충돌이 일어난다고 한다.

팀 켈러가 창세기 1장과 2장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정통적 해석과 거리가 멀다. 좁은 지면 관계로 창세기 1장과 2장의 관계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다. 단지 여기서 염두에 둘 점은 창세기 자체가 계시라는 사실이다. 계시란 어떤 지식이나 정보를 전해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를 하시되 자연 순리에 맞느냐보다는 자신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시는 데 관심을 둔다. 그런 이유로 때로는 자신이 정하신 ‘자연 질서’를 의도적으로 초월하시기도 하신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연 질서와 법칙을 초월하여 역사하신 흔적들로 가득하다. 홍해 도강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다. 홍해 도강사건은 민족적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계시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자연 질서를 초월하여’ 홍해바다를 가르시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길 기뻐하셨다. 이런 초자연적 방식으로 구원하신 이유는 세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였다. 그 사실이 고린도전서 10:1-2에서 명확하게 설명됐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이성이나 자연 질서를 초월하는 방식과 순서로 6일 창조를 행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한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초이성적, 초과학적, 그리고 초자연적 방식을 사용하심으로 피조물과 구별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더 드라마틱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즈음에서 팀 켈러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다.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불신자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바울은 헬라인들에게 복음이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롬 1:14). 또 자연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 관점(진화론)과 우리의 신앙이 충돌되지 않아야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복음은 언제나 세상과 충돌했고, 대결을 동반했다. 이것은 복음의 숙명과 같다. 그래서 십자가가 동반됐다.

성경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로 세상에 보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성적 타당성이 아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초이성적으로 보는 것은 이성이 마비되었거나, 혹은 광신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타락한 이성 기능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 길을 알게 된 사람들이다. 만일 인간의 이성이 믿음 없이도 타당성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면,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이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전형적인 헬라 철학적 관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르침처럼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골 3:10)이다. 우리의 이성은 비합리성을 추구하는 이성이 아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합리적 이성이다. 이 이성만이 건강하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믿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는 이성적 합리성이 아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합리적 이성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에게 앞서야 할 조건은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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