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양의 문이다” “나만 선한 목자다”라는 말씀에 발끈한 사람들, 다시 분쟁이 일어난다. 귀신 들려 미쳤다며 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반응이 다수, 반면에 “귀신 들렸다면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냐” 반론을 펴는 반응은 단수 또는 극히 소수였던 것 같다(20-21절).
사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반응은 요한복음서에 계속 있었던 것이다. 귀신 들려 미쳤다는 것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 율법을 범한 범법자 등 끊임없이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줄곧 자신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신다.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그 문제에 대해 결론을 지으려는 듯 예수님께로 다가와 예수님을 에워쌌다. 그리고 “정말 그리스도 맞냐?”고 다그친다(24절). 더 이상 헷갈리게 하지 말고 딱 부러지게 말하라는 단도직입적이고 직설적인 언사다. 그때 하신 말씀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였다(30절).
답답한 상황에서 하신 말씀
유대인들의 이런 반응이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야 예수님을 당연히 하나님으로 고백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쉐마를 암송하며 자랐기 대문이다. 쉐마가 뭔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 이게 쉐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를 그리스도를 넘어,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 쉬웠겠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신성모독에 참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은근한 주장이긴 하지만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자신을 뛰어난 선각자나, 신의 대리자라고 한 분들은 있었지만 그들은 직접 자신을 신이라 주장하지는 않았다. 석가모니는 먼저 깨달은 자, 마호멧트는 신의 예언자였다. 소크라테스나 피타고라스나 시저도 마찬가지, 모두 다 위대한 삶을 살다가 나중에 신처럼 떠받들어졌을 뿐이다. 설사 신일지라도 제우스처럼 잠깐 인간의 몸을 입었다 곧 사라졌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몸을 입고 살다가, 인간처럼 죽기도 하고 지금 이 땅에 없는데 자신을 신이라 주장하신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입자에서는 답답하지 않았겠나?
예수님은 “나야 나!” 그러시지만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고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는 생각, 그래서 요한복음서 안에는 답답해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그들만 답답한가? 사실은 예수님이 더 답답하시다. 예수님의 답답해하시는 모습도 요한복음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예수님은 이번에도 직답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5-27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직답하지 않으셨을까? 그 이유는 그들의 완악함 때문, 그들이 영치(靈癡)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동안 당신의 가르침과 행하심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진지하게 볼 눈과 들을 귀만 가졌다면 누구든지 벌써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로 믿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25절),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을 행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일을 봤다면 인정하고 믿는 것이 당연한데 아예 믿지 않으려는 완악함을 갖고 있다고 지적하신 것, 그들이 영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지 아니하는도다’를 반복하신다(25, 26절). 처음부터 믿지 않으려는 근본 문제를 지적하신 것, 답답하시다는 뜻이다.
아닌 것 같다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
요한은 때가 수전절(feast of dedication)이었다고 한다. 수전절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벌어진 일이 그 배경이다. BC 167년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스스로 신(神)임을 자처하고 주변 국가들을 침공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짓밟고 지성소 앞에 자기 신상을 올려놓고 숭배하게 하며 유대교 말살정책을 폈다. 그래서 시리아에 대한 민중 봉기가 여러 번 일어났지만 거듭 실패했다. 그러다가 BC 164년 겨울, 쥬다스 마카비우스(Judas Maccabeus)라는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마카비 혁명이라 불렀는데 해방절, 유대인 최대의 명절, 유대인들은 이날을 기념하여 ‘빛의 축제’라는 뜻의 ‘하누카’(חנוכה)라는 축제를 즐긴다. 8일 동안 더럽혀진 성전을 물로 청소했다고 해서 수전절(修殿節), 문자 그대로 성전을 개수한 절기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의 마카비우스가 시리아 학정에 시달렸던 그들을 해방시키자 그를 그리스도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마카비우스는 잠시 동안만 유대인들의 독립을 유지시켰을 뿐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또 다시 로마의 식민지 학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로마의 이 식민지 학정으로부터 그들을 구해줄 또 다른 마카비우스 같은 메시아를 기다린다. 민족의 독립의식이 최고조에 달하는 절기, 그 어느 때보다 민족의 구원자인 메시야에 대한 신앙이 높아지는 때, 바로 그때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풀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먹을 것을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녔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기대와 다르다. 즐거운 소리가 아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절기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만 하신다.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삯꾼이라 혹평하는 공격이 너무 세다. 심지어 강도요 절도, 자기 손으로 양을 잡아먹을 수도 있고, 주인 몰래 내다 팔 수도 있는 삯꾼, 자기를 위해 양을 이용하고, 전혀 양과 친밀하지 않은 삯꾼이란 것, 반면에 자신은 선한 목자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목자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선한 목자가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선한 목자는 능력 있고 강한 목자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정반대다. 희생하고 섬기는 목자,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가 선한 목자라 하신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비범해 보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르자 귀신 들렸다고 들고 일어난다.
그래서 요한은 의도적으로 수전절, 때는 겨울이라 했다(22절). 냉각기,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의 관계가 겨울 날씨 같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의 예수님과의 날씨는 어떨까?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속시원하게 “내가 그리스도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지금까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그로라” 하신 것 외에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 없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을 에워싸고 “그리스도라면 밝히라”고 다그친다. 보통 열심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은근히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계신다. 물론 속시원하게 밝히시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바라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리스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떡 얻어먹고 병 낫기만 바란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 “첫째, 나는 청와대 개구리다. 둘째, 내가 말만 하면 나라가 시끄러워진다. 셋째, 나는 김 아무개씨의 남편이다. 넷째. 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정도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다 안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정체에 대한 힌트를 주셨다. 문제는 힌트를 아무리 많이 주고 완벽하게 줘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깜깜한 방에 들어가 “이 세상에 빛은 없다” 외치는 것과 같다.
자기들이 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안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 ‘에고’(Ἐγώ)라는 표현을 거듭 쓰시며 그들에게 기회를 주신다. 내가, 내 아버지, 내 양, 내 음성, 내 손,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고, 내가 영생을 주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 등등. 25절에서 30절까지 ‘나’라는 1인칭 주어 형식이 5회, 인칭대명사 형식을 총 13번이나 말씀하셨다. 엄청나다. 그만큼 ‘나’, ‘내 것’을 강조하셨다. 양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중심적인 영치들에게 내 양만 된다면 나를 알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예수님은 자기 계시적 언어,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형식을 누누이 강조하신다.
관계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 내 양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청소해준다고 아내인가? 아니다. 뭘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Being이면 Doing 한다. 아내라면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청소한다. 예수님이 자신이 누군지 알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안다’는 단어가 핵심단어(key word) 중 하나다. 요한은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1:10-11)고 했다. 문제는 예수님을 모르는 것, 창조주 예수님, 생명을 주신 분인데, 그분 때문에 생명이 풍성해지는 건데 예수님을 모른다. 마치 육신 안에 영혼의 빛이 꺼져 있는 것과 같은 존재로 산다. 이 빛을 다시 밝히려고 오셨지만 아닌 것 같다는 그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계속 기회를 주신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신다. 사실 이때 이미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를 밝히셨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 곧 ‘파테르’(πατήρ)란 단어가 무려 118번이나 사용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씀인데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다. 만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라고 한 말씀은 의미가 없어진다. 또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기도하셨다는 기사나 그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고 아버지에게 순종하셨다는 말도 다 이상한 말이 되고 만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구별되시면서도 행하시는 일에 있어서 완전 하나, 아들이 행하는 것을 아버지가 행하시고, 또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아들이 행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서로 구별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계시면서 신성과 권능과 영원성에 있어서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이게 우리의 정통 삼위일체 신앙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것에 대해 못마땅하기는 했어도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고, 또 스승을 아비라 부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해했지만 “나와 하나님은 하나”라는 말씀에는 격분했다. 분노가 극에 달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것, 감히 유일하신 하나님,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라는 그 말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하나라는 말씀은 존재의 하나 됨이라는 말씀이지만 뜻으로도 하나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아버지 기뻐하는 것을 행하신다. 두 분을 엮는 강력한 끈은 사랑,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아버지를 높이고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기에 높이고 영화롭게 하신다. 아들이 기도하고 부탁한 것을 다 들어주시고, 심지어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해도 들어주신다. 아들이 소유한 모든 것들을 아버지 또한 소중하게 생각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이다. 예수님은 자기 양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28절), 그만큼 소중히 여기시는 양이다. 다음절에 보면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29절),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또 다른 표현인데 이 구절은 좀 의역된 것이다. 원문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양이 이 세상 어떤 것보다 크다”는 의미다. 우리가 엄청 귀한 예수님 짜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나와 하나님은 하나이니라”, 이 선언은 우리를 크게 보신 예수님의 사랑의 선언이다. 그렇다. 우리는 우주보다 더 큰 어마어마한 존재, 예수님 짜리, 보물단지다. 누구에게든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셨다. 우리를 확고하게 하는 사랑이자, 우리를 든든히 붙드는 사랑이다. 이 사랑을 확신하며 우리의 건강도, 마음도, 미래도, 우리의 소중한 어떤 것이든 다 맡겨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우리를 그냥 버려두시겠나? 그러실 분이 아니다. 건져주고 보호해 주신다. 기억하라. 예수 안에 생명 있다. 예수 안에 구원 있고, 예수 안에 사랑 있다. 예수님의 양들답게 확신을 갖고, 여유를 갖고,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