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사도 베드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고 했다. 이 말씀에는 전도의 중요한 요소를 보여준다. 먼저는 “묻는 자”이다. “묻는 자”라는 말은 복음에 어떤 식으로든 마음이 열린 사람을 말한다. 복음에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전도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만일 복음에 문을 닫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도록 힘써야 한다. 복음에 마음이 열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에 관심 갖는 사람이다. 성경은 이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 다음이 중요하다. 베드로는 이렇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사전에 미리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미리 성경을 상고하고, 교리를 배워서 불신자들이 우리 신앙에 관한 질문을 할 때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님은 이렇게 미리 준비된 것을 사용하셔서 전도하신다. 초대교회 때, 종교개혁기 때, 부흥기 때에는 성도들이 불신자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명쾌하게 대답해 줄 수 성경적, 교리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청교도 시대 때는 농부들조차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전도는 불신자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무조건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불신자들에게 명확하게 논증하고,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방식으로 전도가 이루어지도록 하셨다. 이 문제는 다음 칼럼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전도에 대해 이 정도 설명하면 그다음에 나올법한 질문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불신자들이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도록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면 불신자들은 자동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에 관심 갖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삭개오 같이 돈에 인색하고 욕심 많은 사람이 변화된 삶을 살거나, 불신자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인생의 문제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해결될 때,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에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이 무엇이기에 저들은 이런 삶이 가능한가?”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불신자들이 볼 때 부도덕하고, 몰상식하며, 불신자들과 아무런 구별됨이 없다면 전도의 문은 닫힐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은 복음에 마음을 열 이유가 없게 된다.

신약성경을 잘 관찰하면 대부분의 전도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모습을 보이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소망의 이유에 관심을 갖고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접촉점(contact point)이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함과 탁월함을 드러내면,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이 영광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성도의 거룩한 삶이 ‘보이는 말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전도는 이런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사람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워하며 의문을 품었다. 어떤 사람은 놀랐지만, 어떤 사람들은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했다.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신자들에게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에 의문을 품게 했다. 이 의문을 품는 상태는 복음을 향해 마음이 열리는 작용을 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았다. 그 결과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행 2:41).

사도행전 3장은 베드로가 성전의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키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장면의 핵심은 치유 기적이 아니다. 기적은 단지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마음을 열도록 사용하신 수단에 불과했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이 사건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이 계기를 통해 믿는 자가 남자만 약 오천이나 되었다(행 4:4).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복음 전도의 접촉점이 되었다.

이와 아울러 기억해야 할 복음 전도의 접촉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의로 인해’, 혹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당하는 박해이다. 이것이야말로 불신자들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에 대해 관심 갖고 마음을 여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불의해서, 혹은 우리가 어리석어서 받는 고난이나 박해는 해당되지 않는다. 도리어 이것은 복음에 대해 불신자들이 마음 문을 닫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전도 파송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전도 파송을 하시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박해받게 될 것을 경고하셨다. 여기서 문맥을 잘 보아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고난이 전도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악하기 때문에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마 10:17)고 가르치신 것이다. 세상은 악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이리 속에 있는 양과 같아서 오는 박해다. 이 경고 다음 말씀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이 박해가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마 10:18)고 한다. 박해를 전도의 기회로 주신 것이라는 뜻이다. 박해 가운데 성도가 끝까지 인내하고, 거룩한 삶을 살면 이로 인해 이방인들(불신자들)은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에 의문을 품게 된다. 복음에 마음을 열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때 성령님은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라”(마 10:20)고 한다. 성령님은 박해를 전도의 기회로 삼아 죄인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

이제 사도행전의 스데반을 보자. 그는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하며 논쟁하다가 공회에 심문받게 되었다. 이때 스데반은 이 심문을 자기변호의 기회로 삼기보다 전도의 기회로 삼으며 복음을 전했다. 바울도 아그립바 앞에서 심문받을 때, 그 자리를 복음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심문은 좋든 싫든 피고의 발언을 듣는 자리이기 때문이므로 바울은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이때,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전도를 받고 자신이 “네가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구나”(almost christan)고 감탄했다(행 26:28).

고넬료의 전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가정이 복음을 듣도록 마음을 미리 열어 놓으셨다. 그리고 그다음에 베드로를 불러와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게 하셨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전도를 보자.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전도하실 때, 우리처럼 무턱대고 복음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매우 상식적인 방식으로 서서히 그녀의 마음을 여시는 과정을 사용하셨다. 그리고 그녀가 예수님께 대해 서서히 경계심을 풀고 마음을 열자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셨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전도를 ‘기술’(technic)처럼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지면상 더 많은 성경의 예를 언급하고 싶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성경적인 전도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보자.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교회를 향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골 4:3)고 했던 기도 요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말은 전도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전도하도록 가르치는가?

첫째, 성령께서 마음 문을 열어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을 만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전도는 내가 원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준비하신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구별된 삶’을 통해 불신자들이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에 마음을 열고 관심 갖도록 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신자의 구별된 삶은 전도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의로 인해 박해받는 상황이 전도의 기회로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때, 전도는 논쟁이 되기도 하고, 설득이 되기도 하고, 변론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불신자들이 납득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구별된 삶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대다수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복음에 대한 오해가 큰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당수 불신자들은 복음을 정확히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 기독교 신앙에 호의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네 번째는, 전도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전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의 루디아 전도가 나온다. 여기서 사도행전 기자는 바울의 전도가 온전히 성령의 인도였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빌립보의 기도처로 바울을 인도하셨다. 이때 하나님은 구원받기로 예비 된 루디아를 그 자리에서 만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통해 바울이 말씀을 증거하게 하셨다. 성령님은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고, 순종하게 하셨다.

다음 칼럼에서는 불신자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어떤 방식으로 전도하셨는지 구체적인 방식과 전도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계속)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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