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Tolstoy)의 참회록과 어거스틴(Augustine)의 참회록, 그리고 루소(Rousseau)의 참회록은 세계 3대 참회록으로 꼽힌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자신의 대표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마무리할 무렵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고 삶의 회의에 빠져 자살까지 생각하며 절망하던 내적 고뇌 끝에 참회록을 썼다. 전쟁 중 수없이 살상하고,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사기, 절도, 폭력, 음행 등 온갖 죄를 다 저지르며 살아왔음을 적나라하게 고백했다.
하지만 “55년의 인생을 살았는데 성인이 되고부터 30년 동안 쾌락주의자 또는 허무주의자로 인생을 살았다. 그러면서 많은 책도 썼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았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5년 전 나이 50이 되었을 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죄인인 내가 어떻게 내 죄를 해결할 수 있겠나? 그래서 예수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했는데 그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며 “예수 믿는 것이 지혜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라고 한 그의 참회록은 고백록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아우렐리우스, 성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심취한 이교 행위, 거짓말과 도둑질, 정욕과 간음 등으로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살다가 가장 위대한 성인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지만 인기와 존경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때인 나이 43세에 ‘참회록’을 출간해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다. “명예와 돈과 결혼을 열망하며 욕망을 추구해 나갈 때 나는 아주 쓰디쓴 곤경을 당해야 했지만 주님의 자비는 그 곤경을 통해 크게 역사하셔서 내가 당신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셨다”고 고백한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진 『사회계약론』과 ‘자연으로 돌아가자’며 자연주의 교육을 주장한 혁신적 교육소설 『에밀』 등 많은 저서로 지금까지 사회에 많은 영향을 준 루소는 바바리맨이자 성도착자였다. 그래서 멸시와 냉대, 정부와 교회로부터 탄압받고, 망명과 도피자로 떠돌며 보헤미안적 삶을 살았던 사람이지만 “사람 하나를 발가벗겨 세상 사람들에게 전시하려 한다. 그 인간이 바로 나 자신인데 선악을 가리지 않고 감추거나 과장 없이 모두 말하고 싶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참회록을 썼다. 다른 사람에게 도둑 누명을 덮어 씌운 것, 오래도록 뒷바라지해 준 사람을 배신한 것, 다섯 자녀를 고아원에 보낸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다.
루소는 프랑스의 사회계약론자이자 직접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계몽주의 철학자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고, 어거스틴은 서방교회의 아버지이자 바울 이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기독교계의 거장이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예수 영접한 후 엄청난 유산을 노예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을 해방시킨, 평생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다. 그리고 『전쟁과 평화』, 『부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 복음적인 문학 작품들을 많이 썼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 누구나 ‘생명의 길’을 갈 수도 있고, ‘죽음의 길’을 갈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본문의 주인공도 그랬다.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이름 모를 사람, 실로암에서 눈을 떴다.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그런데 축하는커녕 사람들이 의심하고 출교(excommunication)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 사람은 끝까지 자기에게 일어난 은혜의 사건을 붙잡고 결국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믿음의 투쟁과 점점 더 발전하는 믿음의 고백이 멋지다. 그 고백은 진리에 인생을 건 믿음의 고백이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보게 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기적 자체에 대해 다룬 것은 6절과 7절 단 두 구절뿐이다.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기 전에 맹인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내용도 없다. 전체 41절 중 39절은 기적이 일어난 사건 전후의 갈등을 다루었다. 요한복음의 패턴은 어떤 사건이나 기적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놀라고 오해하고 예수님이 해명하는 설교를 하면서 정체를 드러내시는 것이지만 9장의 주인공은 고군분투(孤軍奮鬪), 혼자 전쟁을 치른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은혜로 눈을 떴다면 잔치해야 마땅한데 오히려 예기치 못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눈을 뜬 기적, 사람들의 반응이 뜨겁다.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이었던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8-9절). 사람들은 자기들이 경멸하던 거지가 너무 당당한 모습으로 확 바뀐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싫었을까? 마치 더 이상 조롱할 수 없는 사람이 되자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완고한 시선은 변화된 당사자를 기분 나쁘게 하는 법,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는데 졸지에 걷잡을 수 없는 논란거리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때 “어떻게 네 눈이 떠졌느냐”는 질문에 “내가 그”라는 맹인이었던 이 사람의 대답은 멋진 믿음의 고백이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절),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보게 했다는 것이다. 멋진 간증 아닌가?
5장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던 38년된 병자가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다고 대답했던 것과 너무 다르다. 38년된 병자였던 사람은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5:13) 9장의 주인공은 몇 번을 물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어떻게 눈이 떠졌느냐”라는 질문이 9장에 무려 네 번이나 나온다.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10절),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15절),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19절),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26절), 처음에는 이웃 사람들이 묻고, 그 다음에는 바리새인들이 물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답을 듣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그의 부모에게 다시 묻고 그 아들에게 또 물은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어떻게?’(How)에만 관심이 있었지 ‘누구?’(Who)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만 그럴까? 일반 사람들의 모습 아닌가? 사람들은 기적을 보면 어떻게(How)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누가(Who) 고쳐주었는지를 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 맹인이었던 사람의 고백을 보라. ‘어떻게’보다 먼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자기를 고쳐준 분을 알고 있다. 예수님이라는 인격에 관심을 가진 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의 첫 단계였다. 그렇다. 무엇보다 관심이 중요하다.
“그는 선지자니이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보게 되는 역사, 보지 못하던 드문 일이라 사람들은 그를 바리새인에게로 데리고 간다(13절). 바리새파에게 고발했다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검사처럼 이 사람에게 여러 질문을 했다. 먼저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라고 물었다. 그때 이 사람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더도 덜도 없이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15절). 그러자 그들 중에 쟁론이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한 사람이 눈을 떴다는 놀라운 사건에는 관심이 없다. 날 때부터 맹인, 세상에 맹인이 눈을 뜨는 일이 흔한 일인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어야 하지 않나? 죽었던 생명이나 다름없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을 축하하고 기뻐했어야 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곁다리에 불과한 안식일 조항을 들먹인다. 안식일에 일을 하면 안 되는데 진흙을 이긴 것은 일에 해당한다는 것, 또 안식일에 치료한 것도 의료 행위, 일에 해당하기에 안식일 위반이라는 것이다.
할 일은 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바리새인들, 안식일 위반이라는 꼬투리를 잡아 걸려들었다고 호들갑을 떤다. 예수도 죄인이고 너도 그 세력에 가담했으니 죄인이라 규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고정관념, 결국 예수님을 잡아넣을 꼬투리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본심을 드러낸 셈이다. 과연 예수님과 같은 편이면 출교시키겠다고 결의했던(22절) 사람들답다.
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할 것으로 여기고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17절). 38년 된 병자의 부인(否認)이 예수님께 치명적이었는데 맹인이었던 이 사람도 부인하면 그를 눈 뜨게 한 메시아다운 사건은 의미가 없어지고, 오히려 예수님을 완전히 매장시킬 수 있다. 그런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상외로 안식일을 범해서 죄인 취급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증거한다(17절). 유대인들의 기대를 묵살하는, 인생을 건 믿음의 고백이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말하던 단계가 아니다. 심문을 받다보니 믿음이 더 강해진 걸까? 예수님을 선지자라 한다. 단순한 대답이 아니다. 진리에 목을 걸겠다는 자세, 발전된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고백
18절부터 23절에 보면 첫 번째 계획이 무산되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의 부모를 불러 세 가지 질문을 한다. 그 질문은 “① 아들 맞냐? ⓶ 정말 맹인으로 났느냐? ⓷ 아들이 어떻게 나았으며 누가 낫게 했냐?”였다. 그런데 첫 질문과 둘째 질문 중 하나라도 사실이 아니면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몰 수 있는데 그 부모는 둘 다 사실이라 한다.
그러나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발뺌을 한다. 출교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출교라는 단어는 ‘아포쉬나고그스’(aposunagogos), 유대교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조치다. 가족은 물론 친척과도 갈라서야 한다. 상업이나 친교 활동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 부모는 심지어 자기 아들이 눈을 뜬 것도 별로 기쁘지 않은 듯하다. 아들이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증거하자 아예 아들을 버린 것 같다.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21절), 아들에게 떠넘긴다. 참 못났다. 너무 비겁하다.
본문 가운데 아들이 눈뜬 것에 대한 부모의 기쁨이 전혀 없다.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도 없다. 그저 눈치 보기 바쁠 뿐, 어저면 아들이 눈을 뜨면서 나름 벌어오던 구걸의 수입이 끊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이유를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못박았다.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22절). 이게 바로 노예근성이다. 부모는 아들이 장성했다고 한다. 노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그렇지 부모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아무리 출교가 무서워도 부모 아닌가? 물론 자기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모두를 생각했을 수 있다. 출교가 그만큼 엄청난 일이었다는 뜻이다.
유대 사회는 회당 중심 사회이자 대가족 중심 사회, 핵가족 중심인 우리와는 다르다. 예루살렘에만도 122개 회당이 있었고, 개인의 삶은 자기가 속한 회당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출교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철저히 고립당하는 것, 치명적인 불명예는 물론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는 것, 생존권 박탈이나 다름없다.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 세계에까지 고립됨으로 사실상 삶의 터전을 완전히 상실하는 무서운 조치, 가족 중 하나만 출교당해도 온 가족의 살길이 사실상 막막해지는 초강력 조치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난리를 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도 맹인이었던 이 사람 좀 보라.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또 논란을 빚는다면 차라리 다시 눈을 감고 맹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할 만도 한 데 아니다. 고쳐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사람 눈을 뜨게 해서 출교라는 이 난리를 겪게 했다고 원망하지도 않는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철학과의 한 노 교수가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한 학생이 댓글을 단다. “교수님, 제 고생 좀 사 가십시오. 제가 싼값에 드릴게요” 고생 좋아하는 사람 누가 있나? 고생, 싫다는 거다.
그러나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님을 잠깐 만났지만 이제는 고생하거나 죽어도 좋다는 태도다. 예수님 때문에 구걸하며 살던 이 사람의 인생의 대반전이 시작된다. 예수 만난 인생은 외로운 밤 중에도 노래하는 인생이라고, 눈을 부릅뜨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부모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심이라도 한 것 같다. 이제는 경제적으로, 사상적으로, 주체적으로 서야 할 나이,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책임질 나이다. 지금까지는 부모에게 기댄 측면이 있었지만 이제는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것 같다. 산 순교자가 되었다. 그게 예수님을 다시 만난 비결이다(35절). 그게 벼랑 끝에서도 흔들림 없이 진리의 길을 뚜벅뚜벅 걷게 된 비결이다.
코로나19 펜데믹 시대에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요?’라는 말이 유행이었는데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러기만 하지 말고 예수님과 굳게 손잡아야 한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멋진 신앙고백으로 반전의 역사를 시작하며 누렸던 그 은혜를 우리도 누리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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